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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단군왕검(檀君王儉)은 환웅천왕(桓雄天王)의 아들이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19. 9. 16. 08:39

윤여동설 - 단군왕검(檀君王儉)은 환웅천왕(桓雄天王)의 아들이 아니다 - 최초주장 

 

 

 

  산해경(山海經) 대황북경(大荒北經)을 보면,

  대황가운데 산이 있어 이름하여 불함인데, 숙신씨의 나라에 있다.(大荒之中 有山 名曰不咸 有肅愼氏之國)

 

  산해경(山海經) 해내경(海內經)을 보면,

  동해의 안쪽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이름하여 조선이다.(東海之內 北海之隅 有國 名曰朝鮮)

 

  환단고기(桓檀古記)

  안함로(安含老) 삼성기(三聖記) 전상편(全上篇)을 보면,

  뒤에 신인왕검(神人王儉)께서 불함산(不咸山)의 단목지허(檀木之墟)에 내려 오셨다. 그는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짐을 겸비하였으니 이에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었다. 나라를 세운 뜻과 법은 높고도 넓고, 강하고도 열렬하였다. 이에 구환(九桓)의 백성들이 마음 깊이 복종하여 그를 받들어 천제의 화신이라 하며 제왕으로 옹립하였다. 그가 곧 단군왕검(檀君王儉)으로 신시(神市)로부터 전해지던 오랜 법을 되찾고,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설치하여 나라를 열고 조선(朝鮮)이라 불렀다..............

병진년 주나라 고임금 때 나라 이름을 대부여(大夫餘)라고 바꾸고 백악(白岳)으로부터 또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

단군왕검(檀君王儉)은 무진년부터 나라를 다스려 47세를 전하니 그 년수가 2,096년이다.

 

 

  북애자(北崖子)의 규원사화(揆園史話)를 보면,

  단군기(檀君記) 조에,

  환웅천왕(桓雄天王)이 세상을 거느리기 무릇 궐천세이니 이 분이 곧 신시씨(神市氏)이다. 봉정유궐(蓬亭柳闕)에 살며, 도발과우(陶髮跨牛)로 다스려 자연의 이치를 널리 펴서 나라를 세우고 창업을 이룩하니 그 근원은 만세나 된다.

(환웅왕조의) 말년에 나라의 기틀이 튼튼하여 민물(民物)이 즐겁게 사는 것을 보고 태백산(太白山)에 올라가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연못가의 박달나무 아래에 두고 신선이 되어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고 하는데, 이 못을 조천지(朝天池)라고 한다.

 

옛날 환웅천왕은 환인천제로부터 천부인 세 개를 직접 전해 받았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단군왕검은 환웅천왕으로부터 천부인 세 개를 직접 전해 받지는 못했던 듯하다. 단군왕검이 환웅천왕의 아들이었다면 천부인 세 개를 당연히 전해 받았을 것인데, 기록은 전혀 그렇지를 않은 것이다. 아마 환웅국 말기에 무언가 변란이 있어 천부인 세 개를 전해 줄 틈도 없이 환웅국 왕조가 갑자기 종말을 고하게 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볼 수 있게 한다.

 

 

  고시씨와 여러 사람들이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받들고 그 아들 환검신인(桓儉神人 : 왕검신인)을 군장으로 삼으니 바로 왕검(王儉)이시다

 

왕검이 환웅국에서 발생한 변란을 진압하게 되자 민심이 왕검에게 쏠렸을 것으로 생각되고, 그러자 고시씨 등 대신과 호족들이 환웅왕조에 전해졌던 천부인 세 개를 왕검에게 받치며 왕위에 추대하자 왕검이 단군의 자리에 올라 첫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정하고, 국호를 조선(朝鮮 : 古朝鮮)이라 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단군왕검이 왕위에 올라 국호를 바꾸는 것으로 보아 단군왕검은 환웅천왕의 친아들이나 친손자는 아닌 것으로 판단된다. 왜냐하면 왕검이 환웅천왕의 친아들이나 친손자였다면 1500년도 넘게 존속한 유서 깊은 국호를 함부로 바꿀 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만약 왕검이 성씨가 다른 제3의 인물이었다면 새로운 나라에 어울리는 새로운 국호를 정하려고 했을 것은 당연한 것이다.

  고구려의 경우, 건국시조인 추모왕(주몽왕)으로부터 5대 모본왕까지는 해씨(解氏)로서 추모왕의 아들의 후손들(친손)이고, 6대 태조대왕으로부터 그 이후는 고씨(高氏)였는데, 이 고씨왕들은 추모왕의 딸의 후손들(외손)이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6대 왕에게 나라를 처음 세운 왕에게만 붙일 수 있는 태조(太祖)라는 시호를 붙일 수 있었던 것이고, 국호도 고씨의 구려라는 의미로 고구려(高句麗)라 했던 듯한데, 왕검조선(고조선)도 이와 유사하지 않았을까 싶은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대강 계산하면 약 4천여년이 된다. 연대적으로는 당요[帝堯陶唐氏]와 같은 시대로 세상에서 요()와 아울러 함께 일어났다는 말은 바로 이를 말한다............

  여러 고을 땅의 길흉을 판단하여 도읍을 태백산(太白山) 서남쪽(필자주 : 동남쪽의 오기일 것이다) 우수하지원(牛首河之原)에 정하고 왕검성(王儉城, 필자주 : 아사달(阿斯達)의 오기이다 )이라고 했다...........

  우수하 가에 산지 10년에 도읍을 백산(白山 : 태백산)의 남쪽이며 패수(浿水)의 북쪽으로 옮기니 이곳이 평양(平壤)이며 제2의 왕검성(王儉城)이다.

  지금의 속말 땅은 기후가 춥고 토질이 나빠서 들이 넓기는 하나 농사짓기가 남쪽보다 좋지 않았다. 속말의 물은 북쪽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으로 들어가니 남쪽과의 교통이 불편하여 도읍을 옮기게 된 것이다.

  청평은 단군 때에 4번이나 도읍을 옮겨 나라를 새롭게 했는데, 두 번째 천도는 패수의 북쪽, (세 번째는) 곧 발해의 서경압록부(西京鴨淥府) 땅인 신주(神州)가 바로 그곳이라고 했다.

 

[필자주 : 왕검조선의 첫도읍은 우수하지원의 아사달, 두번째 도읍은 패수 동쪽의 왕검성, 세번째 도읍은 백악산아사달로서 이곳이 신주였고, 네번째는 다시 장당경(당장경)을 거쳐 첫도읍이었던 아사달로 돌아감으로써 왕검조선이 소멸하고 말았다.       

 

  일연(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를 보면,

  고조선 왕검조선 조에,

  위서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천 년 전에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있었다. 그는 아사달(阿斯達, 필자주 : 내몽골 적봉시 영성현 대명진고성)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이 나라를 세워 국호를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이것은 고(: 요임금)와 같은 시기였다...............

  단군왕검은 당고(唐高: 唐堯)가 즉위한 지 50년에 평양성(平壤城, 필자주 :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에 도읍하여 비로소 조선(朝鮮)이라고 불렀다.

  또 도읍을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 필자주 : 지금의 북경 동북쪽 무령산 부근)로 옮겼는데, 궁홀산(弓忽山)이라고도 하고, 금미달(今彌達)이라고도 한다. 그는 1,500년 동안 여기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 호왕(虎王 : 武王)이 즉위한 기묘년(B.C.1122)에 기자(箕子)를 조선(朝鮮)에 봉하니, 이에 단군은 장당경(藏唐京, 필자주 : 내몽골 적봉시 영성현)으로 옮겼다가 뒤에 돌아와서 아사달(阿斯達)에 은거하다가 산신이 되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이암(李嵒)의 단군세기(檀君世紀)를 보면,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왕검(王儉)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고 어머니는 웅씨왕(熊氏王)의 딸이며 신묘년(B.C.2370) 52일 인시에 단목(檀木) 아래에서 태어났다. 신인의 덕이 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경외하여 복종했다.

  14세 되던 갑진년(B.C.2357)웅씨왕(熊氏王)은 그가 신성하다는 말을 듣고 그를 비왕(裨王)으로 삼아 대읍(大邑)의 다스림을 대행하도록 하였다.

 

단군왕검의 아버지를 단웅(檀雄), 어머니를 웅씨왕의 딸로 기록한 것은 단군왕검이 왕족의 후예로서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신분임을 나타내기 위함일 것인데, 결과적으로 단군왕검은 왕위에 올라 국호를 바꾸고, 새로운 도읍을 정하는 등 역성혁명과 유사한 조치를 취했다.

  따라서 우리가 지금까지 환웅(桓雄)과 단웅(檀雄)을 동일인으로 생각해 왔던 것이 잘못이 아닌가 싶고, 단웅은 환웅과는 전혀 다른 별개의 사람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웅씨왕의 비왕에 관한 기록은 왕검이 왕가의 외손임을 나타내려한 것이 아닌가 싶고, 환웅국 병합 이전에 이미 웅씨왕국[필자주 : 웅씨왕국은 곰을 신성시하는 맥족을 말하는 것으로서 옛 환인환국의 후예로 생각된다]의 실권자가 되어 있었음을 나타내는 기록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 북쪽 환웅왕조에 갑자기 변란이 발생하여 왕조가 멸망하게 되자 왕검이 군사들을 이끌고 그 변란을 진압함으로써 환웅국 백성들의 지지를 얻게 되어, 자연스럽게 환웅국을 병합한 후 단군에 오를 수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무진년(B.C.2333) 제요도당 때에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阿斯達)의 단목터(檀木之墟)에 이르르니 국인(國人)들이 추대하여 천제의 아들이 되었다.

  이를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니 비왕으로 24, 제위에 93년간 재위하였다. 130세까지 살았다.

  무진원년(B.C.2333) 개천 1,565(필자주 : 안함로의 삼성기와 원동중의 삼성기 공히 환웅왕조의 역년을 181,565년으로 기록하고 있다) 상월(10) 3일에 이르러 신인 왕검이 오가의 우두머리로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지허(단목터)에 자리 잡았다............구환의 백성들이 모두 마음으로 따르며 천제의 화신이라 하고 그를 임금으로 삼아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였다. 신시의 옛 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阿斯達)에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朝鮮 : 古朝鮮)이라 하였다.

 

왕검이 환웅국을 접수하기 위하여 좌우 대신들을 이끌고 왔을 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환웅국의 백성들이 변란을 진압한 왕검을 열렬히 환영했고, 그를 추대하여 단군의 자리에 올리고 새로운 나라 조선(고조선)을 건국하게 되었다고 보면 당시의 상황이 이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