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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강화의 옛 이름 갑비고차(甲比古次)는 무슨 의미일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19. 11. 23. 08:09

윤여동설 - 강화의 옛 이름 갑비고차(甲比古次)는 무슨 의미일까? - 최초주장

 

 

 

  신증동국여지승람 강화도호부(江華都護府) 조를 보면,

  "본래 고구려 혈구군(穴口郡)이다.[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부른다] 신라 경덕왕이 해구(海口)라고 개칭했고, 원성왕이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했다. 고려 초에 지금의 이름으로 바꿔 (강화)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의 강화도에 관한 연혁으로 생각하겠지만, 사실 이 기록은 한반도 강화도의 연혁이 아니라, 지금 북경 동쪽 난하 반가구수고, 대흑정수고 동쪽에 위치한 하북성 천서현의 청산관(靑山關) 부근에 대한 연혁이다.

 

 

 

 

 

 

 

 

 

  그리고 고조선 때의 갑비고차(甲比古次)를 고구려 때 왜 혈구(穴口)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갑비고차(甲比古次)가 갑곶(甲串)의 옛날 발음이라면, 지금 천서의 청산관 남쪽의 지형상 그 의미가 뾰족하게 튀어나온 곶() 형태의 지형을 말하는 것으로서 첫곶, 즉 첫번째 곶이라는 의미일 수 있고,

 

  또한 혈구(穴口)를 고구려의 깊은 협곡이나 국동대혈(國東大穴)과 연관시켜보면,

  고구려에서는 그곳이 깊은 협곡이나 국동대혈(國東大穴)로 들어오는 입구라는 의미로 혈구(穴口)라고 불렀을 수도 있다.   

  만약 갑비고차(甲比古次)와 혈구(穴口)가 같은 의미라면,

  갑비(甲比)깊은 협곡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고,

  고차(古次)입구라는 의미일 수도 있어,

  갑비고차는 깊은 협곡으로 들어오는 입구라는 의미로도 해석해 볼 수도 있는 것이다.

 

고구려 때의 혈구(穴口)를 통일신라 때는 해구(海口)라 했다고도 하는데, 이는 이곳을 바다로 나아가는 입구라고 보아 그러한 이름을 붙였을 것이다. 고구려와 신라는 바라보는 방향이 반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로 지금 천서 청산관 북쪽의 난하(옛 패수)는 깊은 협곡지형을 흐르는 강으로서 지금은 난하의 강물을 막아 반가구수고, 대흑정수고를 만들어 수위가 상당히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깊은 협곡이니, 옛날에 수고(水庫 : 물을 가두어 놓는 저수지라는 의미)를 만들기 전에는 난하가 하늘만 빤히 보이는 아주 깊은 협곡을 흐르는 강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고구려 사람들은 그러한 협곡을 ()”이라고 표현했고, 그곳을 혈()로 들어오는 입구라는 의미로 혈구(穴口)라 불렀을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어찌되었든 지금의 하북성 천서현의 청산관 부근이 원래 옛날 단군의 세 아들들이 갑비고차(甲比古次)에 쌓았다는 삼랑성(三郞城)이고, 고구려의 혈구(穴口)였으며, 신라의 해구(海口)였고, 고려 강화(江華)였던 것이다.

  또한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은 지금의 하북성 관성(寬城 : 관성만족자치현)이었으므로 고려 때의 삼별초도 바로 이곳 청산관 부근에서 대몽항쟁을 했었고, 고려의 팔만대장경도 바로 이곳에서 판각이 이루어졌었는데, 지금 반도사관론자들은 그를 꿈에도 알지 못하고 수 천리 떨어진 엉뚱한 장소인 한반도 강화도에서 그 역사의 흔적들을 찾으려 하고 있으니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한반도 강화는 옛 갑비고차, 혈구, 해구가 아닌 것이고, 고려의 강화도 아닌 것이다.

  조선시대에 대륙으로부터 한반도로 그 지명만 가져온 곳일 뿐이다.

  한반도 강화도에서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 고대 역사의 흔적을 찾으려 하지 마라.

  그것은 매우 바보 같은 짓이다.

 

[위 : 노파의 얼굴모습(마고전설 발상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