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려의 강화 마니산과 참성단, 삼랑성의 원래 위치 찾기 - 최초공개
[하북성 당산시 천서현의 관할구역]
[삼랑성 성벽]
[한반도 강화 마니산의 참성단이라고 부르고 있는 제단]
[한반도 강화도의 석릉(고려 희종릉)이라고 부르는 묘의 옛 사진]
[한반도 강화도의 홍릉(고려 고종릉)이라고 부르는 묘의 옛 사진인데, 고려 고종릉을 조성한 지 500여년 후인 조선 영조때 이르러서 다시 찾았다고 하는 곳이다.
조선 영조 때 강화유수로 있던 조복양이 왕의 명을 받고 수색끝에 다시 찾았다고 하는데, 이때 조복양은 무슨 근거로 이곳을 고려 고종릉인 홍릉이라고 했는지 매우 궁금하고, 묘앞의 비석(묘표)도 조선 영조 때 새겨 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규모와 수준의 묘들이 과연 고려왕릉일 수 있을까?
그리고 고려는 원래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가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관성현에 도읍하고 그 주변을 차지하고 있던 나라였다.
따라서 한반도 강화의 이 묘들은 고려왕릉이 아니라 한반도 지방 호족정도가 죽어 묻힌 묘일 것이다]
[조선 태조 건원릉(이성계의 능)]
[조선왕릉의 석물조각과 배치]
신증동국여지승람 강화도호부(江華都護府) 건치연혁을 보면,
“본래 고구려 혈구군(穴口郡)인데 갑비고차(甲比古次)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이 해구(海口)라 고치고, 원성왕(元聖王)이 혈구진(穴口鎭)을 설치하였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고쳐서 현(縣: 강화현)으로 만들었다. (고려) 현종 9년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고려) 고종이 몽고병을 피해 들어가 도읍하고 군(郡)으로 승격시키고 이름을 강도(江都)라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산천 조를 보면,
“마니산(摩尼山)은 강화도호부의 남쪽 35리에 있다. 고려 고종 46년에 교서랑 경유의 말에 따라 이 산의 남쪽에 이궁을 지었다.
전등산(傳燈山)은 강화도호부의 남쪽 32리에 있다.......
갑곶진(甲串津)은 강화도호부의 동쪽 10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사단(祠壇)조를 보면,
“참성단(塹城壇)은 마니산 꼭대기에 돌을 모아 쌓은 단이다. 높이는 10척이며, 위는 모가 나고 아래는 둥근데, 위는 사면이 각각 6척 6촌이요, 아래 둥근 것은 각각 15척이다. 세상에서 전하기를 단군(檀君)이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 과연 지금 한반도 강화 마니산의 참성단 규격이 위 기록과 일치할까?
고적(古跡) 조를 보면,
“삼랑성(三郞城)은 전등산에 있는데, 세상에 전하기를 단군이 세 아들을 보내 쌓았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위 기록은 한반도 강화에 대한 기록이 아니라 대륙고려의 강화에 대한 기록이다. 따라서 진짜 강화도호부(江華都護府)의 위치는 지금의 하북성 당산시 천서현 왕가탄(王家灘) 일원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되고, 갑곶진(甲串津)은 왕가탄의 동쪽 장하(長河) 강변에 위치한 황괴욕촌(黃槐峪村)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강화도호부로 비정되는 왕가탄의 남쪽 32리에서 전등산과 삼랑성을, 왕가탄의 남쪽 35리에서 마니산과 참성단을, 그리고 마니산의 남쪽에서 고려이궁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를 보면, “단군이 이미 제후를 봉한 후 천하가 밝아지고 조용하더니 10년 만에 남이의 환란이 일어났다. 갑비고차(甲比古次)는 이미 남이인의 땅이었다. 그래서 부여를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평정하였다. 후에 부소와 부우를 더 보내어 갑비고차에 성을 쌓게 하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지키게 하였다. 이곳이 지금 강화도의 삼랑성(三郞城)이다. 마리산(摩利山)에는 참성단(塹城壇)이 있으니 이것이 곧 단군이 단을 만들고 하늘에 제사지내던 두악(頭嶽)이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곳은 북쪽으로 사냥가면 태백산(太白山)이었고, 남쪽으로 가면 두악(頭嶽)이었다. 갑비고차(甲比古次)는 바닷가에 위치해 있어 배를 타고 가기가 쉬워 남쪽으로 행차할 때는 반드시 단소에서 제사지냈다. 더구나 그곳은 육지와 떨어져 있어 조용하고 산악이 정결하며 밝은 하늘과 바다가 보인다. 고요하고 깊고 밝고 깨끗한 기운은 사람들에게 신의 오르내림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두악과 마리산, 마니산은 같은 산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 단군이 북쪽으로 갔을 때 하늘에 제사지냈다는 태백산은 지금의 칠로도산산맥 중 최고봉인 대광정자산(大光頂子山, 2,067m)을 말하는 것이다.
이암의 단군세기(檀君世紀)를 보면, “무오 51년(B.C.2283) 단군왕검께서 운사인 배달신에게 명하여 삼랑성(三郞城)을 쌓고 혈구(穴口)에 제천의 단을 마리산(摩璃山, 필자주 : 두악, 마니산과 동일한 산을 말하는 것이다)에 쌓게 하였으니 지금의 참성단(塹城壇)이 바로 그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두악, 마니산을 마리산이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는데, 단군세기에는 삼랑성을 축성한 사람이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아니라 운사인 배달신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으나 필자는 이를 당시 단군왕검이 운사인 배달신에게 갑비고차에 성을 쌓으라고 명하고는 또 세 아들인 부소, 부우, 부여를 보내 축성 작업을 감독, 독려하도록 하였다고 보면 삼랑성을 단군왕검의 세 아들이 쌓았다고 전해진 것이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본다.
☆ 필자의 글을 계속 읽으신 분들은 필자가 주장하는 마니산 참성단과 삼랑성에 대하여 이해가 될 것이라 생각되지만, 필자의 주장에 수긍하지 못하시는 분들은 필자가 볼 때에는 그 원인이 우리의 상고, 고대사를 한반도 내에서 이루어진 역사라고 착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오랫동안 우리 역사를 연구해 본 결과 우리의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의 역사 강역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으로서 대개 서쪽으로는 지금의 북경을 지나 산서성 북부로부터, 동쪽으로는 요하까지였고, 북쪽으로는 내몽골까지였다. 그곳이 우리의 옛 땅이었다.
따라서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는 한반도가 아닌 발해 북쪽 바로 그곳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필자의 주장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이를 먼저 깨달아야만 한다.
반도사관을 깨야 우리의 대륙역사가 새로이 태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필자는 대륙의 강화 마니산, 삼랑성을 찾아내고 있고, 왕검성도 찾았고, 삼국의 도읍들을 모두 찾아 놓았는데, 역사의 진실은 오직 하나 뿐일 것이다.
과연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의 상고사, 고대사는 대륙역사이고, 조선부터 한반도 역사라는 필자의 주장이 진실인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상고사, 고대사 등 우리 역사 모두가 한반도에서 이루어졌다는 반도사관론자들의 주장이 진실인 것일까?
판단은?
독자 여러분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