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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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려의 철령(鐵嶺)은 지금의 내몽골 적봉 남쪽 - 최초주장

윤여동 2020. 3. 8. 09:47

윤여동설 - 고려의 철령(鐵嶺)은 지금의 내몽골 적봉 남쪽 - 최초주장

 

 

 

   고대의 요동(遼東)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요수(遼水)는 옛 요동이었던 지금의 북경 서쪽을 흐르는 영정하를 말하는 것이며,

   압록강(鴨綠江)은 지금의 북경 북쪽, 동쪽을 흐르는 백하, 밀운수고, 조백하를 말하는 것이고,

   살수(薩水)는 북경 동북쪽 고북구를 지나 밀운수고로 흘러드는 조하를 말하는 것이며,

   패수(浿水)는 난하 중, 상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려의 철령(鐵嶺)을 찾으면 우리 고대 역사에서 아직 확실하게 밝히지 못하고 있는 많은 것들을 밝혀낼 수 있게 된다.

   고대 한() 무제의 침공을 받아 위만조선이 멸망하고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될 때 초기현토군이 설치되었던 옥저지역이 지금의 어디인지를 알 수 있게 되어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의 위치도 찾을 수 있게 되고, (동예), 맥국의 위치를 정확히 찾을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지금까지 밝히지 못하고 있는 고려의 천리장성과 고려의 동북면(동계) 그리고 윤관장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쌓았던 동북9성의 위치를 찾을 수 있게 되고, 고려 때 관동, 관서, 관북지역이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지 알 수 있게 되며,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 와서 오국성에서 비참하게 살다가 죽어 그 부근에 묻힌 요 천조제의 능도 찾을 수 있을 것이고, 송 흠종의 능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원나라가 철령 이북 땅에 설치했고 고려 공민왕 때 탈환했던 쌍성총관부의 위치도 찾을 수 있어, 고려 말 명()나라가 차지하려 했던 철령이북(鐵嶺以北) 땅이 지금의 어디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게 되어 고려에서 왜 그 땅을 명나라에게 빼앗기지 않으려고 요동정벌을 도모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면 이렇듯 사연 많은 고려의 철령(鐵嶺)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신증동국여지승람 강원도 회양도호부(淮陽都護府) 산천 조를 보면, 철령(鐵嶺)에 대한 고려 때 사람 이곡의 글이 소개되어 있고 그 글 속에 철령은 우리나라(고려)의 동쪽(필자주 : 사실은 동북쪽이다)에 있는 요해지이니 소위 한사람이 막으면 열 명이 덤벼도 열지 못한다. 그러므로 철령 동쪽의 여러 고을을 관동(關東)이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철령의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

   그런데 사실 고려는 한반도에 위치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내몽골에서 발원하여 하북성을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가로 지르며 흐르는 난하(옛 패수) 중류 부근의 관성(개경)에 도읍하고 하북성, 요녕성, 내몽골에 걸친 강역을 가지고 있던 나라였고, 철령(鐵嶺)은 지금의 내몽골 영성(寧城)에서 적봉(赤峰)으로 가기 위해 넘는 고개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곳이 고려 천리장성의 철령관(鐵嶺關)이 있던 곳이었다.

   고대 북옥저와 동옥저, 남옥저는 바로 이 철령 북쪽에 위치했었는데, 고려 때 윤관장군이 별무반을 이끌고 옥저지역을 점거하고 있던 여진을 내쫓고 동북9성을 설치했다가 몇 년 후 여진에게 돌려주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후일에 이르러 이 철령이북 옥저지역에 원나라에서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기도 하는 곳인데, 그로부터 99년이 흐른 원나라 말 공민왕 때 이르러서야 고려가 철령으로부터 옛 공험진까지의 천리 땅을 모두 다시 되찾게 된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총서에는, “공민왕이 환조에게 쌍성의 백성을 진무하게 하였다..... 이해 5월에 기씨(奇氏)를 평정하고 밀직부사 류인우(柳仁雨)에게 명하여 가서 쌍성(雙城)을 토벌하게 하였다. 인우(仁雨) 등이 등주(登州)에 머무르니 쌍성과의 거리가 2백여 리(里)였다. 그곳에 머무르면서 나아가지 않으니, 왕은 이 소식을 듣고 환조에게 시소부윤(試少府尹)을 제수하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내리고 중현대부(中顯大夫)로 계급을 승진시키고는, 병마판관(兵馬判官) 정신계(丁臣桂)를 보내어 교지(敎旨)를 전하여 내응하게 하였다.

환조(李子春)는 명령을 듣고 즉시 군졸과 말을 준비하고 행군하여 인우와 더불어 군사를 합쳐 쌍성을 쳐부수니, 조소생과 탁도경 등은 처자를 버리고 밤에 도망하였다.

이에 화주(和州), 등주(登州), 정주(定州), 장주(長州), 예주(預州), 고주(高州), 문주(文州), 의주(宜州)와 선덕진(宣德鎭), 원흥진(元興鎭), 영인진(寧仁鎭), 요덕진(耀德鎭), 정변진(靜邊鎭) 등 여러 성(城)과 함주(咸州) 이북의 합란(哈蘭), 홍헌(洪獻), 삼살(三撒)의 땅을 수복(收復)하였으니, 고종(高宗) 때 원(元)나라에 점령당한 때로부터 99년 만에 이를 모두 수복하였다. 왕이 환조(李子春)를 승진시켜 대중대부(大中大夫) 사복경(司僕卿)으로 삼고, 서울에 집 1구를 내리고 이내 머물러 거주하게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고려 말 명()나라가 서자 명나라에서는 철령이북(鐵嶺以北) 땅이 원래 원나라의 개원로(開元路, 開原路)에 속했던 땅이라고 하면서 공험진은 고사하고 두만강보다도 더 남쪽에 위치한 철령(鐵嶺)을 국경으로 삼아 그 이북 천리 땅을 차지하겠다고 통고해 왔으니 고려가 그 조치에 반발하고 요동을 정벌하고자 하였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이 요동정벌은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으로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고려가 멸망하고 말았지만..........

   인식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 역사는 그 진실을 알지 못한 채 계속 미로를 헤맬 수밖에 없다.

   필자의 주장을 따르면 우리의 모든 고대역사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고, 대륙의 우리 옛 땅을 모두 찾아낼 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반도 주변을 맴돌고 있으니 필자는 매우 안타깝고 안쓰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