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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김유신은 한반도 경주가 아니라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서쪽 북보타산(北普陀山)에 묻혔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20. 5. 16. 19:42

윤여동설 - 신라 김유신은 한반도 경주가 아니라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서쪽 북보타산(北普陀山)에 묻혔다 - 최초주장

 

 [신라 서악이었던 요녕성 금주시 서쪽에 위치한 지금의 북보타산]

 

                                                    

   삼국유사 김유신 조를 보면,

   김씨 집안의 재매부인(財買夫人 : 옛날의 복부인이었을까?)이 죽자 청연(靑淵)위 골짜기에 장사지내고 재매곡이라 불렀다. 해마다 봄이 되면 온 집안의 남녀들이 그 골짜기 남쪽 시냇가에 모여서 잔치를 열었다.

   이때쯤 백가지 꽃이 화려하게 피고, 송화가 골짜기 안 숲속에 가득했다.

   골짜기 어귀에 암자를 짓고 이름을 송화방(松花房)이라 하여 전해오다가 원찰로 삼았다.

   경명왕 때에 공을 봉해서 흥호대왕(흥무대왕)이라 했다.

   (김유신의) 능은 서산(西山) 모지사(毛只寺) 북쪽에서 동쪽으로 향하여 뻗은 봉우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능묘 조에는 김유신묘는 경주부의 서쪽 서악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삼국사기 열전 김유신전에는 “문무왕 13년(A.D.673) 가을 7월 1일에 유신이 자기 저택에서 죽으니 향년이 79세였다............김산원(金山原 : 김산벌판)에 장사지내고, 관리로 하여금 비석을 세워서 그의 공적을 새기게 하였으며, 사람을 지정하여 묘를 지키게 하였다”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기록대로라면 김유신의 묘가 서라벌의 서산(필자주 : 서악,선도산,서술산,서형산,서연산이라고도 불렀다)에 조성되었을 것이고, 서쪽에서 동쪽방향으로 도읍인 서라벌을 바라볼 수 있게 조성했던 듯하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고적 재매곡 조를 보면, 재매부인이 김유신의 종녀(宗女 : 집안 조카)라고 했다.

 

   그런데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신라의 서라벌은 한반도의 경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를 말하는 것으로 밝혀졌으므로, 신라의 서산(西山, 西嶽, 西岳)은 지금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의 서쪽 7km쯤에 위치한 북보타산(北普陀山)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따라서 신라 김유신의 묘는 지금의 금주시(錦州市) 서쪽에 위치한 북보타산에서 동쪽방향으로 뻗은 산줄기에서 찾아야 할 것이고, 또한 법흥왕릉, 진흥왕릉, 진지왕릉, 태종무열왕릉, 김양묘 등도 모두 김유신묘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위 그림을 보시라.

 

☆ 신증동국여지승람 경주부 산천 조를 보면, “선도산(仙桃山)은 경주부의 서쪽 7리에 있다. 신라에서 서악(西嶽)이라 불렀다. 혹은 서술산, 서형산, 서연산이라고도 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능묘 조에는 “김유신묘는 경주부의 서쪽 서악리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법흥왕릉, 태종무열왕릉, 진흥왕릉이 함께 서악리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또 “김양묘는 태종왕릉에 배장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결국 신라 법흥왕릉, 진흥왕릉, 진지왕릉, 태종무열왕릉, 김인문묘, 김양묘, 김유신묘 등이 모두 서악리 일원에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경주의 가짜 김유신묘, 한반도 경주에 도읍했던 흉노족왕국의 왕릉일 것인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김유신묘라고 하게 되었다]

 

[참고]

 

나릉진안설(羅陵眞贋說)

화계 유의건

 

신라시대 55명의 임금가운데 박씨 성의 왕은 10명, 석씨 성의 왕은 8명, 김씨 성의 왕은 37명이다.

그 가운데 장례를 화장으로 지낸 왕은 3명이며, 나머지 왕릉을 조성한 왕은 52명으로 왕비릉의 숫자와 합하면 104기의 능이 될 것이다.

그 가운데 여왕으로 재위한 왕 3명은 왕비가 없는 반면 다른 왕들은 혹 왕비를 두 명 또는 세 명씩 얻었으므로 모두 합하면 100여기 아래로는 내려가지 않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과 동경지(東京誌) 등을 살펴보면, 왕릉의 위치에 대하여 명확히 알 수 있도록 기록된 것은 다만 11기의 왕릉에 그친다.

그러나 조선 영조6년 경술년(A.D.1730) 이후에 더하여 28기의 왕릉이 되었는데, 그 가운데 17기는 이전에는 모르는 바였으나 이제야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대체로 천년 후에 이르러서 천년 이전의 일에 대한 자취를 살필 때 문자의 기록에 의하지 않고서 어찌 알 수 있으리오. 비록 신라 사람으로서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 있다 하여도 상세하게 알지는 못할 것이다. 무슨 왕릉이 어느 곳에 있다 함이 하물며 당시의 무지한 촌부의 말한 바에 따름에야.

지금 선도산 아래와 경주읍이 관할하는 10리 안에는 고분이 첩첩이 쌓여 무수히 많고, 왕릉과 같은 것도 셀 수 없이 많은데, 어떻게 왕릉이 이곳에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또한 당시 훈구대신의 장례로 인한 묘는 각간 김양과 김후직의 묘 등인데 왕릉과 거의 같다. 즉 경술년 이후에 새로 지정된 17기의 왕릉이 훈구대신의 묘인지 아닌지 고분이 무수히 많은 그곳에 혼재하고 있는지 여부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왕릉은 100여 곳에 위치하고 있었을 것이나 지금에 이르러 다 알 수는 없으므로, 알고 있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한다고 하여 진실로 의리를 해한다고 할 수 없다. 어쩌다 구차하게 일반인들의 장지를 잘못 인정하여 왕릉이라 하였다면 그런 기만은 무엇과 같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것이 왕릉이라 할지라도 말한 바의 모 왕릉이 모 왕릉이 아닐 경우 미안하지 않겠는가. 하물며 그것이 능히 왕릉임을 알 수 없음에는 더욱 그렇지 않겠는가? 그런 이유로 진흥왕, 진지왕, 문성왕, 헌안왕 등 4기의 왕릉을 논함에 있어서는 더욱 기만으로 가득 차 위배됨이 많다고 하겠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사서를 살펴보면, 진흥왕릉은 서악리에 있고, 진지왕릉은 영경사 북쪽에 있으며, 문성왕릉과 헌안왕릉 두 릉은 모두 공작지에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지금 황정언(황정)의 묘 곁에 있는 1기의 고분을 가리켜 진흥왕릉이라 한다. 또한 진흥왕릉 가까운 부근에는 3기의 고분이 더 있는데, 이 고분들을 진지왕릉, 문성왕릉, 헌안왕릉 등 3릉으로 인정하고 군사를 동원하여 축대를 수리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엇에 근거한 조치란 말인가.

천년 후에 증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옛 부터 전해오는 문자뿐이다.

즉 진지왕릉은 당연히 영경사 북쪽에서 찾아야 할 것이며, 문성왕과 헌안왕의 두 릉은 마땅히 공작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지금 영경사 북쪽에 고분으로서 왕릉과 같은 것이 많이 있는데, 진지왕릉이 이곳 공작지에 없다고 어찌 할 수 있으리오.

비록 이곳이 어떤 지명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이곳의 산작지가 공작지의 변형된 형태의 음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이 사이에 역시 왕릉과 같은 고분이 여러 곳에 있으니 또한 3기의 왕릉이 그곳에 없음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진흥왕릉 만이 서악리에 있다고 널리 알려져 있으나, 영경사로부터 금산원에 이르기까지 모두 서악리라 부르고, 또 그 사이에는 왕릉과 같은 고분이 무려 수십 곳에 이르므로 진흥왕릉이 과연 어느 곳에 위치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지금 말하고 있는 진흥왕릉은 황정언(황정) 묘 옆의 반걸음 정도의 위치에 있다. 황정언(황정)의 장례 역시 200년 전에 있었던 일로서 당시의 노인들이 듣고 보았다고 해도 반드시 오늘날과 같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은 어리석고 눈이 어두워서 만약 이를 왕릉이라고 하였다면, 그때는 어찌하여 사물의 이치를 몰랐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알았다면 신하의 묘를 왕릉 곁에 아주 가까이 쓰는 것이 가능했겠는가.

정언(황정)의 자손 역시 일찍이 그 묘를 잊어버렸으나 묘아래 부러진 비석을 얻은 바에 기인하여 찾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곁에 있는 옛 묘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것으로 쌍분이 아닌가 하였다. 그러나 증거로 삼을 문자가 없는 까닭에 그 자손들 역시 감히 선비(先妣)의 묘라고 주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이 고분을 진흥왕릉이라 함을 어찌 큰 잘못이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이곳의 지명은 탑동이지만 영경사 북쪽은 아니며 또한 공작지라는 지명에 가깝지도 않은데, 무엇에 근거하여 반드시 4명의 왕릉이 모두 이곳에 있어야 하는 것인가.

황정언(황정)의 자손들은 이것에 관하여 관가에 소송을 제기했으나 관가는 참봉들의 말한 바에 따라 모두 왕릉으로 정했다고 하였으므로 관가에서는 가능하지 않았다.

모든 참봉들에게 청하였으나 왕릉에 대해서는 말하지 못하고 “왕릉은 능지기들이 알려준 바에 의하였다”라고 하였다.

오호라 능지기들은 글자 한 자도 모르는 무지한 촌부들이다. 수백 년 전의 노인과 선비들이 알지 못하는 바를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생각건대 그 사람들이 산작지에 살고 있으면서도 공작지의 두 왕릉이 그곳에 있음을 믿고 헤아려 찾는 폐단을 두려워 한 까닭에 이를 말한 것이다. 이로써 후일에 다시 찾는 일을 막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참봉은 그 지명과 방위가 어떠한지를 자세히 살피지도 않고 모두 그대로 그 말을 믿고 관가에 보고하였다. 관가 또한 성급하게 그 말의 옳음과 잘못됨에 대해서 다시 살피지도 않고 그 말을 믿고 따랐다.

대체로 왕릉은 체제상 다른 분묘와는 구별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서 말하는 왕릉은 체제가 매우 작을 뿐만 아니라 한 조각의 석물도 없어 왕릉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로써 보면, 경술년 이후에 새로이 비정된 왕릉이 많은데, 같은 성격으로 두릉동(杜陵洞)에서도 1기의 왕릉이 확인되어 희강왕릉으로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의 사서에서는 말하기를 희강왕릉은 소산(蘇山) 북쪽에 있다고 하였으나 이곳에 소산이라고 일컫는 산은 예전부터 없었다. 그러므로 그것을 일러 희강왕릉이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모 참봉이 말한 바의 두릉동은 이릉동(二陵洞)을 말하는데, 이곳에는 두 릉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대개 둘(二)이라고 하는 것은 방언에서 두(杜)라고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두릉동은 예전에 칭하기를 두응동(杜應洞)이라 하였는데, 오래전에 한처사(韓處士)가 피하여 이 동네에 머물렀는데, 두응이 무의미한 까닭에 고친 것이다. 그러므로 두릉이라는 명칭을 사용한 것이 수십 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지금 두응이 변하여 두가 되고, 두가 다시 둘(이) 되었다. 반드시 그 사이에서 2기의 왕릉을 찾고자 할 것이나 진실로 만족스럽지 못하여 한 웃음에 붙인다.

지난날에 김씨 족보를 보았는데, 모두 경순왕을 시조로 하고 있었다. 대저 김씨 30여왕 등이 어찌 모두 후손 없이 혼자이며, 경순왕만 자손들이 많이 있겠는가. 하물며 경순왕이 동도(東都)에 있을 때 한 아들은 금강산으로 들어갔으며, 한 아들은 해인사로 들어가서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나 왕은 개경으로 가서 고려왕의 부마가 되어 아들 은열(殷說)을 낳고, 은열은 4명의 아들을 낳아 나누어 각처에 봉하였는데, 시조는 용(容)이다. 그러나 혹 경주에 와서 거주하는 자가 있으면 경주 김씨인데, 어찌 모두 그의 자손일 것인가?

이것은 왕릉의 일컬음이 혼동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같이 논하여 그 잘못을 바로 잡고자 한다.

 

☆ 화계도 추사나 다산처럼 어쩔 수 없는 반도조선인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위와같은 나릉진안설을 남겼다.

화계는 한반도 남부의 경주나 김해가 흉노족들이 대륙에서 광무제에게 쫓겨 도망쳐와서 흉노족왕국을 이루고 살았다는 것 자체에 대하여 꿈에도 생각치 못했을 것이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무슨 의도로 만들어진 책이라는 것을 몰랐으며, 경주의 고총들이 신라왕릉이 아니라 흉노족 왕국의 왕릉들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이러한 글을 남기게 되었을 것이다. 

조선 500년간 우리 고대역사가 완전히 왜곡되어 버렸으니, 한민족의 대륙역사를 어찌 정립해야 하는 건지 대책이 서지 않는다. 그야말로  오호통재라 라고 할 수 밖에 없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