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구려 고국원왕이 전연 모용황에게 쫓긴 단웅곡(斷熊谷)의 위치 찾기 - 최초주장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은 10대 산상왕 2년((A.D.198)에 쌓고, 13년(A.D.209) 10월에 국내성(國內城)으로부터 옮긴 도읍이었다.
그랬다가 11대 동천왕 20년(A.D.246)에 위나라 관구검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자 고구려는 다음 해 2월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겨, 12대 중천왕, 13대 서천왕, 14대 봉상왕, 15대 미천왕 대에 이르게 된다.
미천왕은 왕위에 올라 중국 5호16국의 혼란기를 틈타 302년에 현토군을 침공하고, 311년에 요동 서안평을 빼앗았으며, 313년에 낙랑군을 빼앗았고, 314년에 대방군을 빼앗았으며, 315년에 다시 현토성을 빼앗아 차지하게 되어 고구려의 강역이 중국 쪽으로 많이 넓어지게 된다.
그러나 아직 중원으로의 진출로이며, 곡창지대인 요동을 수중에 넣지 못하자 계속하여 요동을 침공했으나 미천왕은 생전에 그 목표는 달성하지 못하고 죽고 만다.
그리하여 미천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그의 아들 16대 고국원왕은 평양성을 증축하고, 또 환도성을 보수하고, 국내성도 다시 수리해 쌓아놓고는 평양성으로부터 환도성으로 이거하는데, 이는 중국의 혼란스런 상황을 이용하여 요동을 지나 중국 쪽으로 진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연 모용황의 선제침공을 받아 환도성을 함락 당하게 되자 고국원왕은 급히 환도성을 빠져나와 단웅곡(斷熊谷) 방향으로 도망치게 된다.
이때 고국원왕은 단웅곡을 지나 도읍인 평양성으로 되돌아가기 위함이었을 것인데, 연나라 장군 모여니가 뒤쫓아 와서 이곳 단웅곡에서 왕의 어머니인 태후 주씨와 고국원왕의 왕비가 포로로 잡히게 되고, 왕의 아버지인 미천왕의 유골을 탈취 당하고 만다.
그렇다면 단웅곡(斷熊谷)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고구려 환도성(丸都城)은 지금의 북경 북쪽 회유구 발해진(渤海鎭)으로 밝혀졌고, 평양성(平壤城)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으로 밝혀졌다.
따라서 단웅곡(斷熊谷)은 환도성과 평양성의 사이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인데, 지금의 북경 동북쪽 무령산 북쪽 백초와국가삼림공원(百草洼國家森林公園) 부근의 지형이 곰의 머리 형상으로 나타나므로 단웅곡(斷熊谷)은 그 남쪽 계곡으로 비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위 그림을 보시라.
이후 고국원왕은 선왕인 미천왕의 유골을 돌려받고, 태후인 주씨의 송환을 위하여 전연 모용황에게 무려 13년 동안 온갖 보물을 바쳐야 했고, 신하를 칭하는 등 온갖 수모를 겪게 되어 중원으로 진출할 절호의 기회를 놓쳤고, 또 369년에는 백제를 침공했다가 실패했고, 그 다음해인 370년에는 오히려 백제 근초고왕의 침공을 받고 평양성 전투 중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만다. 비운의 왕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