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요동군 서안평(西安平)과 거란(요)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의 관련성 여부에 대한 새로운 가설 - 최초주장
전한서 요동군(遼東郡) 조를 보면, 요동군의 통현 18개현 중에 “서안평현(西安平縣)”이 있고, 왕망이 북안평 (北安平)이라 고쳤다고 기록되어 있고,
또 후한서 요동군 조에도 11개현 중에 서안평현(西安平縣)이 기록되어 있는데,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의 요동(遼東)은 지금의 북경(北京) 일원을 말하는 것이고, 요수(遼水)는 지금의 영정하(永定河)를 말하는 것으로서 고대에는 대개의 경우 이곳은 중국과 동이 세력 간 상호 공수의 요충지인 접경 지역이었다.
그런데 후대에 이르러 거란(요)이 발해를 멸망시키고는 이 요동(지금의 북경부근)을 차지하자 처음에는 남경(南京)이라 하였는데, 그 후 연운 16주를 후진으로부터 할양받아 강역이 커져 5경을 설치하게 되자 남경을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로 바꾸었고, 금(金)나라 때도 그대로 동경요양부가 되는데, 지금의 북경 동남쪽 향하현(香河縣)에 “안평진(安平鎭)”이 있다.
지금의 북경 부근이 고대의 요동군이었음이 확실하므로 지금 북경 동남쪽 안평진(安平鎭)이 옛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이었을 가능성이 많은 곳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요사(遼史) 지리지 상경도를 보면,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는 본래 한(漢)나라 때의 요동군 서안평(西安平) 땅이다. 신나라의 왕망은 북안평(北安平)이라 하였다. 태조(야율아보기)가 천제(天梯), 몽국(蒙國), 별로(別魯) 등 세 산의 형세를 취하고 금착전(金齪箭)을 쏘아서 위전을 정하고 그곳을 용미궁(龍眉宮)이라 하였다. 태조 신책(神冊) 3년(A.D.918)에 그곳에 성을 쌓고 이름을 황도(皇都)라 하였다가, 태종 천현(天顯) 13년(A.D.938)에 다시 이름을 상경(上京)이라 고치고 부(府)는 임황(臨潢)이라 불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한(漢)나라 때의 요동군 서안평현이 곧 거란(요)의 상경임황부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이 되지 않는 기록인 것이다.
[우리의 고구려, 백제, 신라가 지금의 북경 동쪽에 위치했다고 그려져 있다]
거란은 원래 송막지간(松漠之間)에 살던 종족으로서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영락 5년(A.D.395)에 비려(碑麗)를 정벌할 때 갔던 염수(鹽水)부근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바로 거란족이었다.
그리하여 거란족은 그 송막지간(천리송림과 사막사이 지역)의 땅에서 힘을 키워 나라를 세웠고, 야율아보기가 발해를 급습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을 빼앗아 기초를 다졌으며, 그 후 후진 석경당으로부터 연운 16주를 할양받아 대제국으로 발돋움했다.
그들은 처음 나라를 세운 송막지간 땅의 황수(潢水)변에 도읍을 정하고 황도(皇都)라고 했다가 상경임황부로 바꾸었고, 요동 땅도 처음에는 남경(南京)이라 했다가 동경요양부로 바꾸었으며, 상경과 동경의 중간지역인 신안평에는 중경대정부를 설치하게 된다. 그리고 또 연운 16주 땅인 유주 연경에 남경석진부를 설치했고, 대동에 서경대동부를 설치함으로써 5경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서의 기록들을 보면, 전한서와 후한서에도 요동군 조에 서안평(西安平)이 나타나고, 요사지리지에도 요동군 서안평(西安平) 땅의 상경임황부, 요서군 신안평(新安平) 땅의 중경대정부 등이 언급되어 있어 역사연구자들이 매우 헷갈리게 되었는데,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아직까지도 그 “서안평(西安平)”의 위치를 명쾌하게 밝힌 사람이 없다.
이렇듯 학자들이 옛 지명의 위치를 헷갈리고 있는 데에는 무슨 곡절이 있을 것인데, 필자가 보기에는, 거란(요)이 발해를 멸망시키고 요동(遼東) 지역을 차지하고 보니 통현 중에 “서안평(西安平)”이라는 지명이 있었는데, 그 지명이 좋아 보였는지 거란이 원래의 요동 서안평을 안평(安平)으로 바꾸어 놓고는, 그 서안평(西安平)이라는 지명은 상경임황부 부근으로 가져다가 붙였고, 또 중경대정부 부근은 신안평(新安平)이라 했기 때문에 그때부터 헷갈리기 시작했던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이때 요사의 편찬자들이 한(漢)나라 때의 원래 요동 서안평과 새로 옮겨온 지명인 임황의 서안평 연혁을 확실하게 알고 있었다면, 거란(요)의 상경임황부가 한(漢)나라 때의 요동군 서안평 땅에 위치하고 있다는 어이없는 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그러한 사실을 알지 못하고는, 전한서, 후한서 요동군 조에 서안평이 있었고, 거란(요) 상경임황부에 대한 기록에도 상경임황부 부근이 서안평이라는 기록이 있자 이를 상경임황부가 한(漢)나라 때의 요동 서안평에 위치했던 것으로 착각하고는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는 본래 한(漢)나라 때의 요동군 서안평(西安平) 땅이다.”라고 기록했던 것이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다.
[필자주 : 요사에 중경대정부의 위치에 대하여 "한(漢)나라 때의 요서군 신안평현 땅"이라고 기록한 것도 서안평과 똑같이 착각한 것이다]
지금의 내몽골 오란찰포시 동북쪽 상도현(商都縣)이 거란(요)의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로 비정되는 곳이고, 지금의 북경 동남쪽 향하현의 안평진(安平鎭)이 원래 한(漢)나라 때의 요동군 서안평현(西安平縣)으로 비정되는 곳인데, 9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요동군 서안평과 거란(요) 상경임황부 서안평의 상호관계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없어 전전긍긍했던 것인데, 이는 서안평(西安平)의 지명이 거란(요) 초기 요동으로부터 송막지간으로 이동되었음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던 것이다.
맨 위 지도를 보시라.
한 눈에 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그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