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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임나국(任那國)과 포상8국(蒲上八國)의 진짜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 2021. 1. 30. 03:30

윤여동설 임나국(任那國)과 포상8(蒲上八國)의 진짜 위치 최초공개

 

 

 

  일본서기 10세 숭신천황 65년 조를 보면, “가을 7임나국(任那國)이 소나갈질지를 보내 조공하였다. 임나(任那)는 축자국에서 2천여리 떨어진 곳에 있다. 북쪽으로는 바다(필자주 : 큰 호수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된다)로 막혀 있고 계림의 서남에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또 11세 수인천황 2년 조를 보면, “이해 임나인 소나갈질지가 나라에 돌아가고 싶다고 말하였다. 아마 선왕 대에 내조하여 아직 돌아가지 않았던 것인가? 고로 소나갈질지에게 후하게 상을 주었다. 붉은 비단 백필을 주어 임나의 왕에게 하사하였다. 그런데 신라인이 길을 막고 빼앗았다. 두 나라의 원한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임나국(任那國)이 왜국에 사신을 보내 교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왜국에 가서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던 임나국 사신이 신라를 지날 때 신라 사람들이 왜국왕이 임나왕에게 보낸 비단 1백필 등의 선물을 빼앗았기 때문에,

  이때부터 신라와 임나국 사이가 아주 나빠지게 되었음을 알게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임나국(任那國)이 어디에 위치했었기에 임나국 사신이 왜국에서 돌아올 때 신라 해역을 지났던 것일까?

 

《일본서기》562년 조에는,  "卄三年春正月新羅打滅任那官家[一本云卄一年任那滅焉]. 總言任那, 別言加羅國安羅國斯二岐國多羅國卒麻國古嵯國子他國散半下國乞飡國稔禮國合十國. 

  23년(562) 봄 정월 신라가 임나관가(任那官家)를 쳐서 멸망시켰다(어떤 책에는 21년에 임나가 멸망했다고 한다). 통틀어 말하면 임나요, 별도로 말하면 가라국(加羅國), 안라국(安羅國), 사이기국(斯二岐國), 다라국(多羅國), 졸마국(卒麻國), 고차국(古嵯國), 자타국(子他國), 산반하국(散半下國), 걸찬국(乞湌國), 임례국(稔禮國)으로 모두 열 나라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임나가 10국의 연합체였음을 알게 한다.  

 

  문헌비고 충주목 조를 보면, “본래는 임나국(任那國)이었는데, 백제의 영토가 되어서는 낭자곡성(狼子谷城)이라 하였다.[낭자성이라고도 하고, 미을성이라고도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임나국이 충주(忠州) 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였음을 알게 하고,

  삼국사기 권제35 잡지 제4 지리2 중원경 조를 보면, “중원경은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인데 신라가 이를 평정하여 진흥왕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였고, 문무왕 때에 여기에 둘레가 2,592보인 성을 쌓았고, 경덕왕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개칭한 것인데 지금의 충주(忠州)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

  또 조선시대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 권지14 충청도 충주목 건치연혁에도, “본래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인데[혹은 미을성이라고도 하고 혹은 완장성이라고도 한다] 신라가 빼앗아 진흥왕이 소경(小京)을 설치하여 귀척의 자제와 6부의 호족과 백성들을 옮겨 채웠고, 경덕왕이 중원경(中原京)으로 고쳤다. 고려 태조23년에 지금의 이름(충주)으로 고쳤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구려의 국원성(國原城), 백제의 낭자곡성(狼子谷城), 신라의 중원경(中原京), 고려의 충주(忠州)가 곧 같은 곳을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신라의 강수가 바로 이 임나국인 임나가량(任那加良) 출신이라 한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10대 나해이사금 14(A.D.209)년 조를 보면, "가을 7월에 포상8(浦上八國)"이 공모하여 가라(加羅)를 침범하자 가라왕자가 구원해 주기를 요청해 왔다.
  왕이 태자 우로와 이벌찬 이음으로 하여금 6부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해 주도록 하였는데, 8국 장군들을 격살하고 포로 6천여 명을 잡아 돌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열전 물계자전에도, 신라 10대 나해이사금 때 "8포상국이 공모하여 아라국(阿羅國 : 아라가야)을 치니 아라에서 사신을 보내 구원해 주기를 요청해 왔다. 나해이사금이 왕의 손자 나음을 시켜 부근의 군과 6부의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해 주도록 하였는데, 곧 포상8국의 병사들이 패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본기와는 인물의 이름이 다르나 포상8국이 가야를 침공했다는 기본 내용은 동일하고, 골포(骨浦) · 칠포(柒浦) · 고사포(古史浦)가 언급되고 있고,
  삼국유사 피은 제8 물계자 조를 보면, "10대 나해왕 즉위 17(임진: A.D.212)에 보라국(保羅國) · 고자국(古自國) · 사물국(史勿國) 등 여덟 나라가 합세하여 변경을 침범해 왔다.

  왕이 태자 나음과 장군 일벌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이를 막게 하니 여덟 나라가 모두 항복했는데, 이때 물계자의 군공이 제일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포상8(蒲上八國)의 일부 나라이름을 알 수 있게 하는데, 특히 삼국유사에는 고자국(古自國)이 지금의 고성(固城), 사물국(史勿國)이 지금의 사주(泗州)를 말한다고 주를 달아 놓아 그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 즉 포상팔국(蒲上八國)은 지리산(智異山) 동쪽 지역에 위치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의 왜국(倭國)은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했고,

  신라의 천년 도읍지 서라벌(徐羅伐)은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이며,

  수로왕의 금관가야(金官伽倻)의 도읍성인 금관성(金官城)은 지금의 요녕성 흥성시(興城市)에 있는 흥성고성(興城古城)이며,

  백제는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 도산(都山) 남쪽에서 건국되었고, 백제의 웅진은 하북성 진황도 노룡(盧龍)이며, 사비는 당산시 난현(灤縣)이고,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을 말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패수(浿水)는 지금의 난하(灤河) 중류, 백제의 백강(白江)은 난하 하류, 백제의 웅천(熊川)은 지금의 진황도 청룡하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백제의 북한산(北漢山)은 지금의 진황도 도산(都山), 가야산은 호로도 대홍라산(大虹螺山), 지리산(智異山)은 진황도 창려현의 갈석산(碣石山)을 말하는 것이며, 충주(忠州)는 진황도 태영진(台營鎭)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왜국(倭國, 필자주 : 지금의 요동반도 부근)의 축자국에서 2천리 떨어져 있었고, 신라 계림(서라벌)의 서남쪽 방향에 위치했던 고대의 임나국(任那國)은 지금의 발해 북쪽 하북성 진황도시 무녕구 태영진(台營鎭) 부근으로 비정할 수 있어, 고대의 왜국이었던 지금의 요동반도에서 진황도 태영진까지 2천여리쯤이라는 기록은 정확하다고 할 수 있고,

  또 임나국(任那國)이 신라 계림(서라벌)이었던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의 서남쪽 방향에 위치한다는 기록 역시 정확하며,

  임나국 사신이 고대의 왜국으로부터 임나국으로 돌아올 때, 배를 타고 연안항로를 따라 항해할 수밖에 없었을 것인데, 지금의 요동반도를 출발하여 북쪽으로 향하여 발해 요동만을 돌아올 때 지금의 발해 금주만(錦州灣) 부근에서 신라 사람들이 왜국왕이 임나왕에게 보낸 선물(비단 등)을 모두 빼앗았을 것이고, 그 이후 신라와 임나국이 사이가 나빠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한 악화된 감정이 쌓여 임나국(任那國)의 영향권 하에 있는 해변가에 위치하고 있던 8개 소국인 포상8국이 연합하여 국경을 접하고 있는 아라가야(阿羅伽倻)를 치기도 하고, 신라의 변경을 침공하기도 했다고 보여지므로 포상팔국(蒲上八國) 즉 골포(骨浦) · 칠포(柒浦) · 고사포(古史浦), 보라국(保羅國) · 고자국(古自國) · 사물국(史勿國) 등은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秦皇島市) 부근으로 비정해 볼 수 있는 것이다.

 

☆ 호태왕비문 영락10년(A.D.400) 조에 나타나는 “임나(任那) 종발성(從拔城)”은 지금의 진황도 산해관의 산해관고성(山海關古城)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지금의 진황도 부근에 포상8국이 위치했던 것으로 나타나고, 요녕성 호로도시 수중현 부근이 아라국(아라가야)의 강역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며, 지금의 산해관 부근은 예나 지금이나 교통의 요지이고, 상호공수의 요충지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