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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요녕성 조양시 북표(北票)의 라마동고분군(喇麻洞古墳群)은 고구려 호태왕(好太王) 때 망명해온 동부여인들의 무덤 - 최초주장

윤여동 2021. 5. 29. 16:13

윤여동설 요녕성 조양시 북표(北票)의 라마동고분군(喇麻洞古墳群)은 고구려 호태왕(好太王) 때 망명해온 동부여인들의 무덤 - 최초주장

 

[중국에서 선비묘군(鮮卑墓群)이라고 새겨 세워놓은 요녕성 조양시 북표의 라마동고분군(喇麻洞古墳群) 표지석]

 

   중국 요녕성 조양시 북표시에서 발견된 라마동고분군(喇麻洞古墳群)]은 고구려 호태왕(광개토태왕)이 영락 20(A.D.410)에 동부여를 침공하여 64개 성 14백개촌을 빼앗고 개선할 때 따라온 동부여 관리들과 그 후예들의 무덤일 것이다.[필자주 : 길림대 주홍(朱泓) 교수도 부여족의 무덤이라고 주장했다]

   필자가 왜 라마동고분군이 동부여(東扶餘) 사람들의 무덤일 것이라고 하냐면,

 

  호태왕 비문 영락 20(A.D.410) 조에,

  二十年 庚戌 東扶餘舊是鄒牟王屬民

  영락 이십년은 경술년이다. 동부여는 옛날 추모왕의 속민이었는데

  中叛不貢

  중간에 배반하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다

  王躬率往討

  왕이 몸소 (군대를) 이끌고 가서 토벌하였다

  軍到餘城 而餘擧國駭服

  군대가 부여성에 도착하자 부여의 온 나라가 놀라 항복했다

  獻出...

  ...을 바쳤다

  王恩普覆 于是旋環

  왕이 은혜로움을 널리 펼치고 개선하여 돌아왔다

  又其慕化隨官來者

  또 그를 (호태왕의 은혜로움을) 사모하여 따라온 관리도 있었다

  味仇婁鴨盧 卑斯麻鴨盧 椯社婁鴨盧 肅斯舍鴨盧 ☆☆☆鴨盧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였다

  凡所攻破城六十四 村一千四百

  무릇 공격하여 빼앗은 곳이 64개 성 14백개촌이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때 호태왕은 동부여를 정벌하고 돌아온 후 따라온 동부여 관리들 즉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 등을 고구려 강역 어디엔가에 배치하여 살 수 있게 배려했을 것인데, 그 후에 대한 기록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호태왕이 이들을 과연 지금의 어디에 배치했을까 의문이었는데, 이제 발해 북쪽 라마동고분군 일원이 바로 그 장소가 확실하다고 판단되어 이 글을 쓴다.

 

압로(鴨盧)”가 어떤 직급이나 직책을 말하는지는 아직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동부여의 하급관리 또는 부족장 정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 요녕성 조양시 북표시 라마동고분군(喇麻洞古墳群)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한결같이 유목민족들의 문화유물들이 출토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중국학자들은 라마동고분군을 선비족의 무덤들이라고 생각하고는 선비묘군(鮮卑墓群)이라고 표지판을 세워 놓은 듯한데, 사실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朝陽市) 일원은 선비족과는 관련이 없고, ()나라와도 아무 관련이 없는 곳이다.

   그곳은 옛날 고조선의 땅이었고, 한사군(漢四郡) 때는 임둔군과 진번군의 사이지역이었으며, 그 후에는 동예(東濊)와 맥()의 사이지역에 해당하는 곳이었다.

   그리고 호태왕 때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이나 황성(黃城)은 한반도의 북한 평양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承德市)를 말하는 것으로 밝혀졌고, 동부여는 고구려의 북쪽인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일원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평양성 동북쪽 방향으로 가까이에 위치한 지금의 요녕성 북표시(北票市) 일원은 고구려의 강역이었을 것이기 때문에, 호태왕이 개선할 때 따라온 동부여 관리들에게 자리 잡고 살 수 있도록 내려준 땅이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라마동고분군은 동부여 사람들이 살다 죽어 묻힌 무덤이지 선비족들이 살다 죽어 묻힌 곳이 아닌 것이다.

 

   앞서 한() 무제에 의하여 창해군(滄海郡, 蒼海郡)으로 명명되었던 예국(濊國)을 북부여 해부루가 침공하여 빼앗아 그 땅에 동부여를 세우자, 그 땅을 빼앗긴 창해군의 예족(濊族)은 동쪽으로 향하여 개마산을 넘어 한사군(漢四郡)의 한 군이었던 임둔군(臨屯郡) 땅으로 이동하여 그 땅에 동예(東濊)를 다시 건설했었다. 당연히 당시 전한(前漢)이 승인을 하고 도와주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해부루의 동부여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오갈 데 없던 창해군의 예족에게 임둔군 땅으로 옮겨 다시 동예를 세울 수 있도록 전한(前漢)이 도와주었기 때문인지 동예는 고구려에 병합되기 이전까지 중국세력들에게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수백년이 지난 고구려 호태왕 때 이르러 동부여 관리가 망명해왔고, 호태왕은 그들을 동예(東濊, 지금의 내몽골 고륜기 일원)와 맥(, 요녕성 능원 일원)의 사이지역인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 북표시 지역에 배치했다면, 호태왕이 개선할 때 따라온 동부여 관리들은 원래 동부여족이 아닌 예족(濊族)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기원전 86년경 창해군의 예족이 동쪽 임둔군 땅으로 이동해 갈 때 어떤 사정이 있어 함께 가지 못하고 남게 되어 동부여의 통치하에 들어갔던 잔여 예족이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호태왕 당시 동부여의 모든 권력은 통치세력인 동부여족이 차지했을 것이고, 그곳의 원주민이었던 잔여 예족들은 잘해야 하급관리 정도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불만이 쌓여 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런데 마침 고구려 호태왕이 동부여를 침공해 왔고, 고구려가 승전을 했기 때문에 당시 동부여의 하급관리였던 미구루압로, 비사마압로, 타사루압로, 숙사사압로, ☆☆☆압로 등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고구려로 망명해 왔고, 호태왕은 그들이 원래 예족이라 하여 동족의 나라인 동예(東濊)에 가까운 지역에 그들을 배치하여 살게 했던 것이라 생각해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이 원래 동부여족이었지만 동부여에 불만이 쌓여 고구려로 망명해 왔을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 있다.

   어찌되었든 요녕성 북표의 라마동고분군(喇麻洞古墳群)은 선비족들의 무덤군은 아니고, 호태왕 때 고구려로 망명해 왔던 동부여 관리들과 그 후손들이 살다 죽어 묻힌 곳일 가능성이 많은 곳이다.

   이렇게 우리 역사에서 의문의 장소였던 영락 20(A.D.410)에 호태왕이 동부여를 침공하여 승전하고 개선할 때 따라왔던 동부여 관리들의 배치장소를 찾은 것 같다.

  지금의 요녕성 조양시 북표시 일원이 바로 그곳일 것이다.

 

지금 우리학자들이 한반도 김해 대성동고분군에서 출토되는 유물과 요녕성 북표의 라마동고분군에서 출토되는 유물이 비슷하자 그를 잘 설명할 수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는데, 한반도 김해대성동고분군은 투후 김일제의 후예인 흉노족들이 남겨 놓은 것이다.

태조(太祖) 성한왕(星漢王)으로 나타나는 인물이 바로 후한 광무제에게 쫓겨 한반도 남부로 도망쳐 와서 흉노족왕국을 세운 인물 투후 김성(金星)이다.

그리고 흉노족이나 동부여족은 원래 지금의 중국 내몽골지역에서 서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살던 유목민족들로서 그 생활방식이 비슷했기 때문에 한반도 김해 대성동고분군과 중국 요녕성 북표의 라마동고분군에서 유사한 유물들이 출토되는 것 뿐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