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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조선(왕검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과 봉국(封國)의 진짜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 2023. 2. 3. 07:55

윤여동설 고조선(왕검조선)의 도읍 왕검성(王儉城)과 봉국(封國)의 진짜위치 최초주장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紀)를 보면,

  “이때 단군의 교화가 사방에 두루 미치게 되어 북쪽으로는 대황(大荒)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알유(猰貐)를 거느리고, 남쪽으로는 해대(海岱)에 이르고, 동쪽으로는 창해(蒼海)에 닿았다.

  위엄과 가르침이 더욱 높고 커져 천하의 땅을 나누어 훈적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

  치우씨(蚩尤氏)의 후손들에게는 남서쪽의 땅을 주었는데, 들이 넓고 바다와 하늘이 푸르러 람국(藍國)이라 하니 치소는 엄려홀(奄慮忽)이다.

  신지씨(神誌氏)의 후손에게는 동북쪽의 땅을 주니 산하가 웅장하고 풍기가 굳세어 오진국(傲侲國) 또는 숙신(肅愼)이라 했는데 방언으로 호장(豪莊)이라는 의미이다. 치소는 숙신홀(肅愼忽)이다.

  고시씨(高矢氏)의 후손은 동남쪽의 땅에 봉했는데, 산하가 수려하고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하였다. 치소는 낙랑홀(樂浪忽)이다.

  주인씨(周因氏)의 후손에게는 개마국(蓋馬國)을 주고,

  여수기(余守己)는 예군(穢君, 濊君)으로 삼았다.

  부소(夫蘇), 부우(夫虞) 그리고 막내아들 부여(夫餘)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했는데, 구려(句麗), 진번(眞番, 필자주 : 진번은 왕검성의 동쪽에 위치했었다), 부여(夫餘)등의 여러 나라이다. 

  그 후에 부루가 동쪽에서 온 세 사람을 각지에 봉하였다. 후세의 옥저(沃沮), 졸본(卒本), 비류(沸流)라고 한 것은 봉국의 나라 이름이다. 단씨의 세대를 통하여 보면, 큰 나라는 아홉, 작은 나라는 열둘로 나뉘어 천하의 여러 주를 다스렸으나 자세한 것은 지금 알 수 없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조선의 건국시기에 이미 제후를 봉한 봉건국가 체제를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고조선(왕검조선)의 왕검성(王儉城)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고조선은 처음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건국되었으나 그곳이 넓은 강역을 통치하기에 교통상 불편하다고 판단되자 패수(浿水)의 동쪽에 위치한 왕검성(王儉城)으로 도읍을 옮겼고, 그 후 강역이 중국 쪽으로 넓어지자 도읍을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로 다시 옮기게 된다.

  그랬다가 국력이 쇠약해져 당장경(장당경)을 거쳐 첫 도읍 아사달로 되돌아갔다가 결국 소멸하고 말았는데,

  첫 도읍 아사달과 당장경(장당경)은 지금의 내몽골 적봉시 영성현(寧城縣) 부근이고,

  두 번째 도읍 왕검성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에 있는 청나라 때의 피서산장(열하행궁) 자리이며,

  세 번째 도읍 백악산아사달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에 위치한 무령산(霧靈山) 부근인데, 이 무령산이 곧 궁홀산(弓忽山), 구월산(九月山)으로 밝혀졌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고조선의 왕검성을 한반도 북한의 평양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니 전혀 엉뚱한 곳에서 고조선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 선조들이 살았던 원래의 땅은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 북쪽 대륙이었다.

  고려의 도읍 개경(開京)은 지금의 하북성 관성현(寬城縣, 관성만족자치현)이고,

  신라의 천년도읍지 서라벌은 요녕성 금주시(錦州市)이며,

  백제의 도읍 웅진은 하북성 진황도 노룡(盧龍)이고, 사비는 당산시 난주(灤州, 난현)이며,

  졸본부여와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은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이며, 국내성은 북경시 연경구 영녕진(永寧鎭)이고, 평양성은 하북성 승덕시(承德市)이다.

  이것이 우리 역사의 진실이다.

  위 그림을 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