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부여(夫餘, 扶餘)의 원래 위치와 부여족의 확산 - 최초주장
우리 고대사(古代史)의 잃어버린 역사 강역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지금의 중국 북경(北京)이 고대의 요동(遼東)이었음을 인식해야만 한다.
이를 인식하지 못하면,
한민족의 성산 태백산(太白山)과 단단대령을 찾을 수 없고,
왕검조선(고조선)과 삼한(마한, 진한, 변한)을 찾을 수 없으며,
위만조선(衛滿朝鮮)과 한사군(漢四郡)을 찾을 수 없다.
또한 원래의 부여(扶餘, 扶餘) 위치와 북부여, 졸본부여, 동부여의 변화를 알 수 없다.
그리고 요수(遼水), 압록수(鴨綠水, 鴨淥水), 살수(薩水), 패수(浿水)를 찾을 수 없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의 위치를 찾을 수 없으며,
말갈(숙신, 믈길, 읍루, 여진), 개마국, 예(창해군 예와 동예), 맥, 북옥저, 동옥저, 남옥저의 위치를 명확히 알 수 없다.
또한 왕건의 고려(高麗)와 이성계의 조선(朝鮮) 위치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어, 역사의 미로를 헤맬 수밖에 없다.
☆ 요즈음 우리 고대사 관련 유튜버나 블로거들이 매우 많은데, 대부분 지금의 중국 북경(北京)이 고대의 요동(遼東)임을 모르고 있다.
우리 고대사를 해석하면서, 지금의 북경이 고대의 요동임을 모르고 하는 주장들은 모두 엉터리라고 보면 틀리지 않는다.
왕검조선(고조선)의 단군왕검이 나라를 세우고, 넷째 아들 부여(扶餘, 夫餘)를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고, 서쪽으로부터 침공해 오는 외적을 방어하도록 하게 되어 우리 역사에 “부여(夫餘, 扶餘)”가 등장하게 되는데, 지금의 북경 서북쪽 중국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일원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흘러 고조선 말기 왕가의 외척으로 보이는 해모수(解慕漱)가 부여 땅을 차지하고 왕위에 오르자, 부여의 직계혈손인 동명(東明)이 졸본에서 나라를 세워 부여는 잠시 북부여(北扶餘)와 졸본부여(卒本扶餘)로 쪼개졌다가, 얼마 후 졸본부여가 북부여를 병합하게 된다.
그러자 해모수의 혈손인 북부여 해부루(解夫婁)가 유민들을 이끌고 동북쪽 예(濊, 필자주 : 창해군 예이다)의 땅으로 옮겨가서 창해군 예(필자주 : 이때 남려가 예의 통치자였다)를 밀어낸 후 그 땅을 차지하고 동부여(東扶餘)를 세우게 되어 부여는 다시 남쪽의 졸본부여와 북쪽의 동부여(東扶餘)로 거듭나게 된다.
☆ 동부여에게 땅을 빼앗긴 창해군 예는 동쪽의 임둔(臨屯) 땅으로 옮겨가서 예를 부활시키는데, 이가 곧 동예(東濊)이다.
그런데 졸본부여 2대왕 때 해모수의 후예인 주몽이 동부여로부터 졸본부여로 도망쳐 와서, 아들 없이 딸만 있던 졸본부여 왕의 둘째 공주와 혼인을 하게 되고, 얼마 후 졸본부여 왕이 죽자 주몽이 그 왕위를 이어받게 되고, 그 뒤를 이어 주몽의 전처소생인 유리가 졸본으로 와서 왕위를 잇게 된다. 그리하여 역사서에 고구려가 졸본부여(卒本扶餘)에서 나왔다고 한 것이다.
한편 졸본부여 동명왕의 직계 혈손인 비류와 온조는 그 어머니 소서노(召西奴)의 손에 이끌려 졸본을 떠나 대수(帶水)와 패수(浿水)를 건너 진번 남쪽 한산(漢山) 부근에 자리 잡고 살다가 한산 부아악(負兒嶽)에 올라가서 지세를 살펴보고는 형인 비류는 한산 서쪽 미추홀(彌鄒忽)에 도읍하고 백제(百濟)를, 동생인 온조는 한산 동쪽 위례성(慰禮城)에 도읍하고 십제(十濟)를 세웠다가 비류왕이 일찍 죽자 온조왕이 그 백성들을 합하여 백제(百濟)로 거듭나게 된다.
☆ 비류왕과 온조왕의 아버지는 졸본부여 동명왕의 손자인 부여우태(扶餘優台)이지 주몽이 아니다. 따라서 온조왕은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의 증손자이다. 그리하여 온조왕은 백제를 건국하고 맨 처음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던 것이다.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의 혈손인 온조왕은 진번 가까이 위치한 한산(漢山) 부근으로 옮겨가 그곳에 백제(대륙백제, 온조백제)를 건국했던 것인데, 13대 근초고왕 때에 이르러서는 4대 개루왕의 작은 아들이었던 구태(仇台)의 후손인 무광왕(武廣王)과 왕위다툼을 벌여 최종적으로 패한 무광왕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건너가 지모밀지(필자주 : 익산 금마)에 도읍하고 다시 백제(반도백제)를 세우게 되어 백제가 한반도와 인연을 맺게 되고, 그리하여 백제는 대륙과 반도에 각각 존재하게 된다.
그랬다가 그로부터 1백여년 후인 반도백제 모도왕(牟都王) 때 강국이 된 반도백제가 쇠잔해 가던 대륙백제를 흡수통합하게 되고, 둘째 손자인 모대(牟大, 필자주 : 백제 동성왕)를 대륙백제로 보내 왕위에 올리게 된다.
그리하여 동성왕 이후 대륙백제의 왕위는 모두 이 반도백제 모도왕의 후손들이 오르게 되고, 서기 660년에 나․당 연합군의 침공을 받고 멸망하게 되는 것인데, 무광왕이 세운 반도백제(半島百濟)의 왕위계승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은 아직 발견되지 않아 자세히는 알 수 없다.
한편 졸본부여 동명왕에게 북부여 땅을 빼앗기고, 동북쪽 창해군 예(濊)의 땅으로 옮겨가 그 땅을 빼앗아 차지하고 나라를 세웠던 동부여(東扶餘)도 고구려 문자왕 3년(A.D.494)에 이르러 고구려에 복속되고 만다.
그런데 위서(후위서) 두막루(豆莫婁) 전을 보면, 두막루를 舊北扶餘也(구북부여야) 라고 기록하고 있어 옛날 원래의 북부여가 졸본부여에 병합되자 해부루는 동북쪽 창해군 예(濊)의 땅으로 가서 동부여를 세웠고, 또 다른 세력은 더 북쪽(필자주 : 물길 북쪽 천리라 했다)으로 옮겨가서 그곳에 자리 잡고 두막루국을 세웠던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리고 후일에 이르러 무려 580년 동안 존속했던 동부여가 고구려에 복속해 왔을 때도 모든 동부여 사람들이 그에 순응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인데, 지금 바이칼 호수 동쪽 부랴트공화국 사람들은 우리와 많은 부분이 같다고 하니 아마 동부여 사람들 중 일부가 그곳으로 옮겨가서 자리잡고 살았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또 다른 일파는 돌궐과 흉노로 들어가 서진을 계속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지금 부여의 옛 땅이 어디였는지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고 있지만, 우리와 같은 혈통을 가진 일부 부여족 사람들은 돌궐, 흉노와 함께 파미르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로 가기도 했고, 또는 비단길 천산북로를 따라 중앙아시아, 서아시아를 지나 유럽까지 가서 지금까지 그 혈통을 이어오고 있다고 하니,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보다 훨씬 멀리까지 이동해 갔던 것으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