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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반도백제의 추정 강역과 초기 왕위계승 – 최초주장

윤여동 2023. 9. 23. 10:16

윤여동설 반도백제의 추정 강역과 초기 왕위계승 최초주장

 

 
 
 

반도백제의 초기 왕위계승

 

건국시조 무광왕(武廣王) : 생몰연대 미상 : 325년경 출생(추정)

무광왕의 생몰연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 아버지 계왕이 재위 3년인 346년에 죽었고, 바로 근초고왕과 왕위다툼을 벌였음을 감안하면 당시 20세쯤은 되지 않았을까 싶다. 따라서 생년은 325년쯤으로 추정해 볼 수 있고, 대륙백제에서 근초고왕과의 20여년에 걸친 왕위다툼에서 최종적으로 패하고 대륙을 떠나 한반도의 지모밀(枳慕) 땅으로 와서 그곳에 도읍하고 국호를 백제(반도백제)라 하고, 왕위에 오른 365년경에는 40세쯤 되었을 것이다.

百濟 武廣王 遷都 枳慕地 新營精舍 以貞觀 十三年 歲次 己亥 冬十一月 天大雷雨 遂災帝釋精舍(백제 무광왕이 지모밀 땅으로 천도하고 정사()를 새로 지었다. 그런데 정관 13(A.D.639) 기해년 겨울 11월에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제석정사에 불이 났다.)”는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 기록 속의 백제 무광왕이 바로 이 반도백제의 건국시조 무광왕이고, 지모밀(枳慕蜜)은 익산 왕궁면이며, 정사()는 제석사임이 발굴로 밝혀졌다.

그리고 지금 일본의 석상신궁(石上神宮)에 있는 칠지도(七支刀)라는 칼의 전면에 "()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鍊鐵七支刀世辟百兵宜供供侯王☆☆☆☆(()4516일병오정양조백련철칠지도세벽백병의공공후왕****. 태화 4(A.D.346) 병오년 516일 하지날에 백번을 제련한 쇠로 칠지도를 완성하였다. 왕이 백병을 거느리고 왕위에 올랐을 때 공후왕이 ....를 시켜 만들어 바쳤던 것이다"이라고 금상감으로 새기고, 후면에는, "先世以來未有此刀 百濟王世子奇生聖音 故爲倭王 旨造 傳示後世(선세이래미유차도백제왕세자기생성음고위왜왕지조전시후세. 선세이래 이러한 칼은 없었다. 백제 왕세자가 성음을 터트리며 기이하게 태어나 왜왕이 되었으므로 칙지로서 글자를 새겨 후세에 전하여 보이도록 하노라)"라는 명문을 금상감으로 새겨 왜왕이 되었던 그 아들에게 칠지도를 내려주었던 인물이기도 하다.

 

2대 실명 : 345년생(추정)

 

3대 실명 : 365년생(추정)

 

4대 실명 : 385년생(추정)

 

5대 모도왕(牟都王) : 405년생(추정), 488년붕(崩) (84)

모도왕은 모대(대륙백제 동성왕)의 할아버지였고, 백제왕이었다고 중국 남조 사서의 기록들에 언급되는 의문의 인물이었는데, 그가 반도백제의 5대왕이었음을 필자가 최초로 주장하였다.

이 왕 재위 시에 국력이 쇠약해진 대륙백제의 개로왕(근개루왕이라고도 한다)이 두 백제의 통합을 제안해오자 모도왕은 왕자인 곤지를 대륙백제로 파견했다.

그런데 통합협상을 반대하는 대륙백제 외척 해씨들이 곤지왕자와 대륙백제의 문주왕을 시해하고 삼근왕을 추대하여 왕위에 올리자 반도백제 모도왕은 해씨들과 삼근왕을 제거하고 대륙백제를 흡수통합한 후 둘째 손자인 모대를 대륙백제로 보내 왕위에 올렸는데 이가 곧 대륙백제 동성왕이고, 이후 대륙백제의 왕들은 모두 이 모도왕의 후손으로 이어졌는데, 혹시 강성해진 이 모도왕 때 반도백제가 강역을 북쪽으로 넓히고, 남쪽의 지모밀(枳慕密)에서 북쪽의 고마성(固麻城)으로 도읍을 옮겼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모도왕은 488년에 죽고 그 뒤를 장손자인 남제왕이 계승하였다.

 

왕자 곤지(昆支) : 425년생(추정), 477년 졸 (53)

곤지는 모도왕의 왕자(필자주 : 장자 또는 외아들이었던 듯하다)로서 반도백제와 대륙백제의 통합을 위하여 그 아버지 모도왕의 명을 받고 대륙백제로 건너갔다가 통합을 반대하는 병관좌평 해구(解仇)에 의해 시해당한 듯하다. 그리하여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6대 남제왕(男弟王) : 450년생

남제왕은 모도왕의 장손자로 보이는 인물로 아버지인 곤지가 대륙백제에서 시해당하여 죽었으므로 그 할아버지 모도왕의 뒤를 이어 488년에 반도백제의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501년에 이르러 대륙백제에서 동복아우인 동성왕이 시해 당하자 다시 이복아우인 사마(무령왕)를 대륙으로 보내 백가의 난을 수습하고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르도록 했다.

지금 일본의 우전팔번신사(隅田八幡神祠)에 있는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은 반도백제 남제왕 재위 16년인 계미년 즉 503년 계미년에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라 있던 사마(무령왕)가 장형인 반도백제 남제왕의 장수를 염원하기 위하여 만들어 바친 동경이다.

그리고 익산 미륵사지서탑 출토 사리봉안기에 이르기를, 왕후는 좌평 사탁적덕의 따님이라 하였고, 기해년(필자주 : 519년 기해년이다)에 왕의 장수를 기원하기 위하여 왕후의 시주로 가람을 창건했다고 하였는데, 이 해에 남제왕의 나이가 70세였다. 아마 이때에도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라 있던 무령왕은 많은 시주를 했을 것인데, 남제왕이 몇 살까지 살다 죽었는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이후 한반도의 반도백제가 언제까지 존속했고, 왕위계승이 어떻게 이루어졌으며, 당시 발해 북쪽 대륙백제 땅을 빼앗아 차지하고 있던 대륙신라와의 관계, 그 후 고려(대륙고려)와의 관계 등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전해지지 않았고, 또 조선(근세조선)과는 무슨 관계였기에 근세조선이 발해 북쪽 대륙에서 고려를 멸망시키고 건국된 후 왜 그곳을 떠나 어떻게 반도백제 강역이었을 한반도로 옮겨오게 되었으며, 그 후 어떻게 대륙의 땅을 잃어버리게 되었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역사학자들이 연구해야 할 것은 바로 이러한 것들이지, 한반도에 삼국과 가야를 설정해 놓고 역사왜곡에 매달릴 일이 아니다.

하루 빨리 한반도의 고대 역사를 명명백백 밝혀줄 관련 기록이나 유물이 발견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바이다.

 

[참고]

대륙백제 24대 동성왕 : 반도백제 모도왕의 둘째 손자로서 452년경 출생하여 479년에 그 할아버지 반도백제 모도왕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렸고, 501년 약 50세쯤에 대륙에서 백가에게 시해당했다. 능이 어디에 조성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대륙백제 25대 무령왕 : 반도백제 모도왕의 여섯째 손자로서 462년에 출생하여 501년에 동성왕의 뒤를 이어 장형인 반도백제 남제왕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렸고, 523년에 62세로 붕하였다.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른 후인 503년에 장형인 반도백제 남제왕(54세시) 즉위 16년에 그의 장수를 염원하기 위하여 인물화상경(우전팔번신사인물화상경)을 만들어 바쳤고, 또 반도백제 남제왕 70세 때인 519년 기해년에 세운 미륵사 창건 때에도 많은 시주를 했을 것이다.

 

[참고자료]

[관세음응험기 백제 무광왕 천도 기사]

 

[번역문]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枳募) 땅으로 천도하고 새로이 정사()를 지었다.

(그런데) 정관(貞觀) 13(A.D.639) 기해년 겨울 11월에 제석정사(帝釋精舍)에 벼락이 떨어져 불이 났다. 불당과 칠층탑 그리고 회랑과 승방이 모두 불타버렸다.

탑 아래의 초석 안에는 온갖 칠보와 불사리가 든 채색 수정병 또한 동판에 금강반야경을 새긴 사경과 이를 담은 목칠함을 넣었었다.

초석을 열어 보니 모두 불타 없어지고 오직 불사리병과 반야경을 넣었던 칠함만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수정병은 속이 훤히 보였으나  뚜껑은 열리지 않았고, 사리는 온데 간데 없었다. 어디로 빠져나갔는지 알 수 없었다.

병을 가지고 대왕에게 가니 대왕은 법사를 청하여 곧바로 참회하게 한 다음 병을 열어 보니 6개의 사리가 모두 있었다.

이에 대왕과 모든 궁인들의 공경과 믿음이 배로 늘어 공양을 올리고 다시 절을 지어 사리를 봉안하였다.[필자주 : 이때 넣었던 금제사리기와 금제반야경판이 익산 왕궁리 5층석탑에서 발견되었다]

이 내용은 법화경의 보문품은 불도 능히 태우지 못한다는 응험에 해당한다.

무릇 성인의 신기한 기적은 온 세상을 인도하고 교화하니 어찌 마음으로부터 믿지 않을손가.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고, 이와 같은 일은 계속해서 일어날 것이다.

 

[백제 무광왕이 칠지도에 글자를 새겨 왜왕이 된 그 아들에게 하사한 칠지도]

 

[칠지도 명문과 해석]

 
 

[전면]

泰和 四年 五月 十六日 丙午正陽 태화 4(A.D.346) 병오년 516일 하지날에

造百鍊鐵 七支刀 백번을 제련한 쇠로 칠지도를 완성하였다.

世辟百兵 왕이 백병을 거느리고 왕위에 올랐을 때

宜供供侯王☆☆☆☆공후왕이 장인..........를 시켜 만들어 바쳤던 것이다.

[후면]

先世以來未有此刀 선세 이래 이러한 칼은 없었다.

百濟王世子奇生聖音 백제 왕세자가 성음을 터트리며 기이하게 태어나

故爲倭王 왜왕이 되었으므로

旨造 칙지로서 글자를 새겨

傳示後世 후세에 전하여 보이도록 하노라

 

[익산 쌍릉(대왕릉과 소왕릉)]

 

[익산 쌍릉 중 대왕릉인데, 반도백제의 왕릉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반도백제 초기 왕릉으로서 반도백제 건국시조 무광왕의 능일 가능성도 있다]

 

 [양직공도 백제국사 : 백제에서는 치성(治城)을 고마(固麻)라 하고, ()을 첨로(檐魯)라 불렀다고 하는데, 반도백제의 도읍이었던 충남 공주에 고마나루가 있다]

 

[반도백제 모도왕(牟都王)과 대륙백제 동성왕의 관계]

 

남제서 백제국전을 보면, “행도독백제제군사진동대장군 모대(동성왕)에게 조서를 내렸는데, 모대를 그의 할아버지 모도(牟都)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여 백제왕으로 삼는다고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모도가 백제의 왕위에 올랐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또 양사 백제전과 남사 백제전에도, “여경(개로왕)이 죽고 그 아들 모도(牟都)가 왕위에 올랐다. 모도가 죽고 그 아들 모태(또는 모대, 동성왕)가 왕위에 올랐다라고 백제 모도왕(牟都王)이 언급되어 있는데,

사실 모도왕은 반도백제의 왕위에 올랐었던 인물이고, 여경은 대륙백제 개로왕을 말하는 것이며, 모대(동성왕)는 모도왕의 둘째 손자로서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었다. 이를 보면, 양사와 남사를 편찬한 사관들은 두 개의 백제가 발해 북쪽 대륙과 한반도에 떨어져 있었음을 몰랐고, 개로왕, 모도왕, 동성왕의 관계도 부자관계로 잘못 알고 있었던 듯하다.

 
 

[우전팔번신사(스타하치망) 인물화상경]

 

[동경 명문 : 癸未年八月 日十六王年 男弟王在意紫沙加宮時 斯麻念長壽 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 取白上同二百旱 作此鏡 계미년(A.D.503) 8월 일 남제왕 재위 16년 의자사가궁에 있을 때 사마(무령왕)가 왕의 장수를 염원하기 위하여 개중비직과 예국사람 금주리 등 2인을 보내 백상동 2백한으로 이 거울을 만들었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봉안기]

 

[사리봉안기 명문]

삼가 생각해보면, 법왕(부처님)께서 세상에 나타나셔서 감응하시고, 현신하시는 것은 물속에 달이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왕궁에서 태어나셨으나 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시면서 8곡의 사리를 남겨 3천 세계를 이익 되게 하셨으므로, 정신을 맑게 하고 오색으로 빛나는 사리를 돌면 그 신통 변화는 불가사의할 것입니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 사탁적덕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 동안 선을 베풀어 금생에 좋은 보은을 받아 만민을 기르는 동량이 되셨으므로 재물을 희사하여 가람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519) 정월 29일에 사리를 받들어 모시게 되었습니다.

원하오니, 세세토록 공양할 수 있게 하여주시고, 겁겁이 다할 때까지 이 선한 마음 변치 않게 하여주시고, 대왕폐하의 수명[필자주 : 이 해가 반도백제 남제왕의 나이 70세 되는 해였다]은 산악과 같이 견고하게 하여주시고, 치세는 천지와 함께 영구하며, 위로는 정법을 널리 펼치고 아래로는 창생을 교화하게 하여주시옵소서.

또 원하오니, 왕후의 마음을 수경과 같이 하여 법계를 비추게 하여주시고, 몸은 금강처럼 불멸하게 하시어 칠세의 먼 조상까지도 함께 복리를 입게 하시고, 모든 중생들도 함께 불도를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반도백제에서 왕을 大王陛下(대왕폐하)”라고 호칭한 것으로 보아 남제왕은 황제를 칭했을 것이고, 사실 그러할 만하다. 왜냐하면 이때 반도백제는 대륙백제, 탐라국, 열도백제 등 여러 소국들을 거느리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