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서산 마애삼존불은 반도백제 작품 - 최초주장
[백제의 미소로 널리 알려진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 ; 여유롭고, 평화스런 시기의 반도백제 작품]
[발견 당시 사진(1959)]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백제(百濟)가 한반도 서남부에만 위치했던 나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백제는 발해 북쪽 대륙과 한반도 서부에 각각 위치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알고 있는 삼국사기 기록 속 백제는 온조백제로서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나라가 아니라 발해 북쪽 진황도 도산(都山) 남쪽에서 기원전 18년에 건국되었다가 660년에 멸망한 대륙백제이고,
한반도에는 대륙백제(온조백제)에서 13대 근초고왕과 왕위다툼을 벌이다가 패한 12대 계왕의 아들 무광왕(武廣王)이 365년경 한반도로 건너와 지모밀 땅(지금의 전북 익산 왕궁면)에 도읍하고 세웠던 반도백제가 있었다.
그런데 이 반도백제는 한반도에서 와신상담 끝에 강국이 되었고, 100여년 후인 반도백제 모도왕(牟都王) 때 이르러 발해 북쪽에 위치하고 있던 대륙백제를 흡수 통합하게 된다.
무광왕이 그토록 염원했던 못 이룬 꿈을 그 고손자인 후손이 이루어 낸 것이다.
그리고는 모도왕은 자신의 둘째 손자인 모대를 대륙으로 보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렸는데, 이가 곧 대륙백제 동성왕(東城王)이다.
☆ 반도백제 모도왕의 장손자는 반도백제의 왕위를 이어야 했기 때문에 둘째 손자인 모대(동성왕)를 대륙으로 보냈던 것이고, 동성왕의 뒤를 이어 그 이복동생인 무령왕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으며 그 이후 대륙백제의 왕위에는 모두 이 반도백제 모도왕의 후손들이 올랐다.
그리하여 중국 사서들에 백제(반도백제, 필자주 : 중국 사가들도 반도백제와 대륙백제를 명확히 구분하지 못한 것 같다) 모도왕이 동성왕의 할아버지라는 기록이 남겨지게 되고, 얼마 후 탐라 등도 백제의 영향권 내로 들어오게 되고, 지금의 요동반도에 위치하고 있던 고대의 왜국 역시 백제의 영향권 안으로 들어오게 되어 반도백제는 가히 황제국이 된다.
백제 무광왕이 그 아들에게 하사한 칠지도 명문에 “백제 왕세자가 태어나 왜왕이 되었기 때문에 칠지도에 글자를 새겨 내리니 후세에 전하라”고 쓰여져 있으니 왜국 역시 반도백제의 영향권 아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 지도를 보시라]
[칠지도 전면 명문]
泰和 四年 五月 十六日 丙午 正陽[태화 4년(A.D.346) 병오년 5월 16일 하지날에]
造百鍊鐵 七支刀 [백번을 제련한 쇠로 칠지도를 완성하였다]
世辟百兵 [왕이 백병을 거느리고 왕위에 올랐을 때]
宜供供侯王☆☆☆☆作 [공후왕이 ....를 시켜 만들어 바쳤던 것인데]
先世以來未有此刀 [선세이래 이러한 칼은 없었다]
[칠지도 후면 명문]
百濟王世子奇生聖音 [백제 왕세자가 성음을 터트리며 기이하게 태어나]
故爲倭王 [왜왕이 되었으므로]
旨造 [칙지로서 글자를 새겨]
傳示後世 [후세에 전하여 보이도록 하노라]
이렇게 되자 반도백제는 대륙백제와 대륙왜국 그리고 탐라, 중국과의 교역이 잦아지게 되고, 문물의 교류도 많아지게 되어 그 길목에 많은 흔적들을 남기게 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다.
아마 당시 사람들은 파도치는 위험한 서해바다를 가로질러 동청주(산동반도)로 가기 전에 그곳에 들러 부처님께 항해의 안전을 기원했을 것이고,
또 돌아올 때도 그곳에 들러 부처님의 가호 덕분에 잘 다녀왔노라고 고했을 것이며, 그렇게 웃고 있는 부처님은 기도하면 잘 들어주는 효험있는 부처님이라고 소문이 났을 것이다.
근엄하거나 고뇌에 차 사유하고 있는 모습이 아닌, 화사하고 여유로운 해맑은 얼굴 모습에서 풍요한 삶을 영위했던 당시 번성하고 평화로운 황제국 반도백제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