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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청천강변 위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석상을 찾아라

윤여동 2023. 12. 2. 05:39

윤여동설 청천강변 위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석상을 찾아라

 

 [고북구의 명나라 장수 척계광 석상]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려국본기(高句麗國本紀)를 보면,

책성에 태조무열제의 기공비가 있고,

동압록의 황성에 광개토경대훈적비가 있다.

안주 청천강변 위에 을지문덕의 석상이 있고,

오소리강(烏蘇里江) 밖에 연개소문의 송덕비가 있다.

평양 모란봉 중간 기슭에 동천제의 조천석이 있고,

삭주 거문산 서쪽 기슭에 을파소의 묘가 있으며,

운산 구봉산에 연개소문의 묘가 있다.

(柵城有太祖武烈帝紀功碑

東鴨綠之皇城有廣開土境大勳蹟碑

安州淸川江岸上有乙支文德石像

烏蘇里江外有淵蓋蘇文頌德

平壤牡丹峰中麓有東川帝朝天石

朔州巨門山西麓有乙巴素墓

雲山之九峰山有淵蓋蘇文墓)”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오늘은 이 중 安州淸川江岸上 有乙支文德石像(안주 청천강변 위에 을지문덕의 석상이 있다)의 기록에 따라 청천강변 위에서 고구려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석상을 찾아보는 시간을 갖도록 해보자.

 

 

[지금 북한에 있다는 을지문덕 장군 석상이라 하는 돌조각품]

 

 

  청천강(淸川江)의 옛 이름은 살수(薩水)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안주목(安州牧) 산천 조를 보면, 청천강(淸川江)에 대하여 일명 살수(薩水)”라고 설명해 놓아, 청천강의 옛 이름이 살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살수(薩水)에 대하여 이름은 전해졌으나 그 위치를 알 수 없는 유명미상지분(有名未詳地分)으로 분류해 놓았는데, 강 이름이 살수(薩水)에서 청천강(淸川江)으로 바뀌었다고 하여 정말 옛 살수의 위치를 알 수 없었을지 의문스럽기는 한데, 어찌되었든 612년 수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하여 우문술로 하여금 평양성까지 진격했다가 퇴각할 때 30만 대군이 거의 몰살당하고 참패했던 장소가 바로 이 살수(薩水)였고, 그 전쟁을 대승리로 이끈 고구려 장수가 바로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이었다.

  그리하여 우리 역사에서는 그 전쟁을 살수대첩(薩水大捷)이라 부르는데, 그 후 언젠가 고구려에서 그곳 자랑스런 장소인 살수(薩水) 강변에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석상을 세웠던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옛 살수요 청천강이었던 지금 북경 동북쪽 고북구를 통과하여 밀운수고로 흘러드는 조하(潮河)의 흐름]

 

  그렇다면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는 안주(安州)의 청천강변은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고대의 요동(遼東)은 지금의 북경(北京)을 말하는 것으로 밝혀졌고, 고구려 평양성(平壤城)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承德市)를 말하는 것이다.

[필자주 : 지금 많은 사람들이 지금의 영정하가 고대의 요수(遼水)였고, 지금의 북경이 고대의 요동(遼東)이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어 우리 고대사 연구가 더 이상 진전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북경 동북쪽 고북구(古北口)를 지나 밀운수고로 흘러 들어가는 강이 옛 고구려 때의 살수(薩水)요, 고려 때의 청천강(淸川江)으로 비정되는 강으로서 지금의 조하(潮河)이다.

  강물이 매우 구불구불한 계곡 사이를 흘러 그 굴곡진 모양이 마치 스님의 머리 모양으로 보였기 때문인지 고구려 사람들은 그 강 이름에 보살살() 자를 붙여 살수(薩水)라 불렀던 듯하고, 후일 고려시대에 이르면 이름이 청천강(淸川江)으로 바뀌게 되는데, 고려 때 사람들은 그 강물이 굴곡져 흐르는 모양을 거북이 머리모양으로 보았는지, 그 지방을 거북구()자를 붙여 구주(龜州, 또는 귀주라고도 읽는다)라 하게 된다.

 

고구려 살수대첩(薩水大捷)과 고려 귀주대첩(龜州大捷)의 전투 장소는 모두 지금의 북경 동북쪽 고북구(古北口) 부근이다. 열하일기를 쓴 연암 박지원 선생도 북경에서 승덕 열하행궁으로 가기 위하여 고북구를 지났으나 그곳이 살수대첩과 귀주대첩의 현장이라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북경 동북쪽 고북구(古北口) 조하(潮河) 강변 도로가에 명나라 때의 장수였다는 척계광(戚繼光)의 석상이 세워져 있는데, 바로 이 고북구가 고구려 을지문덕(乙支文德)의 석상이 세워져 있었다는 안주 청천강변 위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곳 고북구(古北口)는 조하(潮河)를 따라 남북을 오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로서, 그곳을 통과하지 않고는 다른 길이 없다.

  그리하여 수양제 때 수나라군이 고구려를 침공하여 요동(현 북경)을 출발하여 평양성(하북성 승덕시)으로 진격할 때에도 살수(현 조하)가 흐르는 이곳을 통과하여야만 했고, 퇴각하여 요동(遼東)으로 돌아올 때도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만 했는데,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군을 뒤쫓아 와서 바로 이 살수(薩水)에 이르러 강을 건너는 수나라군의 후미를 공격하여 대승을 거둔 장소가 바로 지금의 조하(潮河)가 흐르는 고북구(古北口) 부근이었다.

  고구려의 입장에서는 살수(薩水)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자랑스런 장소인 것이다.

  그리하여 고구려에서는 그곳 살수(薩水, 필자주 : 후일의 청천강) 강변에 살수대첩의 영웅인 을지문덕 장군의 석상을 세움으로써 그 공을 널리 알려 백성들의 자부심을 높이고, 호국 의지를 고취시키려 했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고북구(살수, 청천강)에 을지문덕 장군의 석상은 없고, 한 참 후대인 명나라 때 장수 척계광의 석상이 서 있는 것이다.

  필자가 추정해 보자면,

  아마 그곳에는 풍화에 의해 마모되고 이끼낀 장군 모습의 오래된 석상이 서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석상의 유래에 대하여 아는 사람이 없었고(필자주 : 설령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석상이 지금 중국 땅이 되어버린 그곳에 서 있다는 것이 역사왜곡에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여 일부러 없앴을 수도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그 오래되고 마모된 석상을 치우고 그 대신 사마대장성(司馬臺長城), 고북구(古北口), 모전욕장성(慕田峪長城) 등을 개축했다는 명나라 때의 유명한 장수인 척계광(戚繼光)의 석상을 새로 만들어 세우자고 제안했을 것이다.

  그러자 그 말이 그럴듯하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옛날 석상을 어디론가로 치워버리고는, 바로 그 자리에 척계광의 모습을 돌로 깎아 새로 세웠던 것은 아닐런지.....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고북구를 다 뒤져서라도 옛날 그곳에 서 있었던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의 석상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들께서도 북경 동북쪽 고북구를 지나실 기회가 있으시면, 혹시 모르니 을지문덕 장군 석상의 행방에 관하여 수소문해 보시면 좋겠네요.

  만약 지금에 이르러 그곳에 서 있었던, 어쩌면 지금 서 있는 척계광의 석상과 비슷한 형태였을 을지문덕 장군의 석상을 찾는다면, 장군의 모습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고, 국보 중의 국보가 될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