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고조선(古朝鮮) 단군왕검(檀君王儉)의 탄생지는 지금의 발해 북쪽 요녕성 능원(凌源) 부근일 가능성 - 최초주장
[고조선의 첫 도읍 아사달성(阿斯達城) 추정지(적봉시 영성현 대명진토성, 중국에서는 요(거란) 중경대정부터라 하고 있다. 좌표 : 동경119도08분49초 북위41도34분01초)]
고조선(왕검조선)의 첫 도읍 아사달성(阿斯達城)은 지금의 내몽골 적봉시 영성현 서쪽에 위치한 대명진토성(大明鎭土城)이었고,
두 번째 도읍 평양왕검성(平壤王儉城)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承德市) 피서산장터였으며,
세 번째 도읍 백악산아사달(白岳山阿斯達)은 북경 동북쪽 무령산(霧靈山) 부근이었다.
그랬다가 고조선 47대 마지막 단군 고열가(高列加)때 권력이 약화되어 첫 도읍 아사달(阿斯達)로 돌아오게 되고, 이후 결국 열국으로 쪼개짐으로서 대제국 고조선의 문을 닫고 말았다.
[우하량에서 출토된 여신두상, 설화 속 웅녀의 모습일 가능성이 많다]
[곰족(熊族) 표시인 옥웅(玉熊) 조각품, 우하량 출토품]
앞서 단국(檀國, 환웅국) 말기 곰을 숭상하는 웅족(맥족) 처녀와 호랑이를 숭상하는 호족(예족) 처녀를 놓고 환웅천왕[필자주 : 단국 18대 거불단환웅(居弗檀桓雄, 단웅이라고도 한다)의 왕비간택일 가능성이 많다]의 왕비를 간택하는 과정이 우리에게 전해진 것이 곧 삼국유사에 기록된 웅녀설화인데, 이때 웅족(맥족) 처녀가 최종 왕비로 간택되었고, 혼인을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곧 고조선(古朝鮮)의 건국시조 단군왕검(檀君王儉)이었다는 것이다.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이때 호랑이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같은 굴속에서 살고 있었는데, 그들은 항상 신웅(환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기도했다. 이때 신웅(환웅)이 신령한 쑥 한 줌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들이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곧 사람이 될 것이다’ 했다. 이에 곰과 호랑이가 그것을 먹고 삼칠일 동안 조심했더니 곰은 여자의 몸으로 변했으나 호랑이는 조심하지 않아 사람의 몸으로 변하지 못하였다. 웅녀는 혼인할 사람이 없으므로 매일 신단수 아래에서 잉태되기를 축원하였다. 환웅이 잠시 사람으로 변하여 그녀와 혼인했더니 곧 잉태되어 아들을 낳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기록 속에서 호랑이와 곰이 같은 굴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은 이웃한 지역에 예족과 맥족이 살고 있었다는 말이고, 신웅에게 사람이 되기를 기도했다는 말은 환웅천왕의 왕비가 되고 싶어했다는 말로서 예족과 맥족의 두 처녀가 왕비후보로 선발되었다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 후한서나 삼국지 예전을 보면, 예족들은 호랑이를 신으로 섬겨 제사지낸다고 기록하고 있음을 볼 때 환웅설화에서 말하는 호랑이는 예족을 말한다고 할 수 있고, 곰이 상징하는 것은 맥(貊)족을 말하는 것이므로 결국 예족 처녀와 맥족 처녀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러 과정을 거쳐 결국 이 맥족 처녀와 예족 처녀가 환웅천왕의 왕비 후보로 최종 선발되었고, 왕실에서는 마지막 과정으로서 극한 상황에서의 인내심을 시험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만약 왕비가 극한 상황에서 참고 견디는 인내심이 부족하면 국모로서의 역할을 원만히 수행하기가 어렵다고 보았다는 말이 된다. 그리하여 왕실에서는 이 두 처녀에게 똑같이 최소한의 식량을 주고(상징적으로 쑥 한줌과 마늘 20개라고 한 듯하다) 백 일간을 견딜 수 있는지를 시험하게 되었을 것인데, 그 결과는 싱겁게도 삼칠일 즉 21일 만에 예족 처녀가 경합에서 탈락하게 되어 맥족 처녀가 왕비로서 최종 간택되기에 이르렀고, 결국 최종경합에서 승리한 맥족 처녀는 환웅천왕의 왕비가 되어 왕자를 낳아 왕위를 이어갔다는 이야기가 설화로 전해지게 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데 수많은 왕비간택이 있었을 것인데도, 하필 이 웅녀 이야기가 후세까지 전해지게 된 것은 그때의 왕비 간택이 온 국민이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정도로 유명한 사건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그 때의 왕비 간택 과정 과정이 너무도 흥미진진하였기 때문에 설화형식을 빌어 전해졌고, 고려 때 일연이 그 이야기를 삼국유사에 기록했다고 생각된다.]
단군세기(檀君世紀)를 보면,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왕검(王儉)의 아버지는 단웅(檀雄)이고, 어머니는 웅씨왕의 딸(熊氏王女)로서 신묘년(B.C.2370) 5월 2일 인시에 단목 아래에서 탄생하였다. 신인의 덕이 있어 원근에서 경외하였다.[필자주 : 단목은 태백산 꼭대기의 제단에 있었다는 박달나무를 말하는 것으로서, 기록 속에서 단군왕검이 단목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표현은 실제 단군왕검이 단목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말이 아니라, 태백산이 바라보이는 산 아래 땅에서 탄생했다는 표현일 것이다]
14세 되던 갑진년(B.C.2357)에 웅씨왕은 (왕검이) 신령스럽고 성스러운 덕이 있음을 듣고 비왕(裨王)으로 천거하고 대읍의 국사를 섭정하도록 하였다.
무진년(B.C.2333, 왕검의 나이 38세 때) 제요도당 때에 단국(檀國)으로부터 아사달(阿斯達)의 단목지허(檀木之墟)에 이르니 나라 사람들이 추대하여 천제의 아들로 삼게 되었다.
이에 구환(九桓)이 하나로 통합하게 되었고, 신과 같은 교화가 멀리까지 미치게 되었다. 이를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 하니 비왕의 자리에 있기를 24년, 제위에 있기를 93년이었으며, 130세까지 살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단군왕검의 혈통과 탄생에서부터 붕어(崩御)할 때까지를 개략적으로 알 수 있게 한다.
그런데 기록 속에서 단군왕검의 어머니를 웅씨왕의 딸(熊氏王女)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곰을 신성시하는 곰족(맥족)의 나라 공주라는 의미로서 환웅설화(삼국유사 속 웅녀설화)와 내용이 일치한다고 할 수 있는데, 14세 되던 해에 외할아버지인 웅씨왕이 외손자인 왕검이 비범하다는 말을 듣고 비왕으로 삼아 정치를 보좌하도록 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왕검은 단국의 제후국인 외할아버지 웅씨왕의 비왕으로서 24년간이나 정치를 잘 보좌하였고, 38세 되던 해에 이르러서는 나라 전체 사람들의 추대를 받아 새로운 나라 고조선(古朝鮮)을 세우고 단군(檀君)의 자리에 올라 건국시조가 되었다는 말이 된다.
내용이 신화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고, 사실적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는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단군왕검(檀君王儉)의 실제 탄생지(誕生地)는 지금의 어디였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단군왕검은 지금의 발해 북쪽 요녕성 능원시(凌源市) 부근에서 탄생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옛날에도 대개의 경우 여인들이 출산이 가까워지면 마음이 편안한 친정집으로 가서 아이를 낳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가까운 조선시대 유명한 학자이며 정치가인 율곡 이이 선생이 본가가 아닌 외가인 강원도 강릉오죽헌에서 출생했다고 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일 것이고, 지금도 많은 여성들이 친정 또는 친정 가까운 산부인과 병원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산후조리를 하는 경우와 유사하다고 하겠다.
당시 곰족 즉 맥족(貊族)의 중심지는 후일 진번국(眞番國), 맥국(貊國)으로 거듭난 우수주(牛首州, 우두주라고도 한다)였는데, 지금의 요녕성 능원(凌源) 일원이었다.
따라서 당시 웅씨왕의 공주였던 웅녀의 친정 역시 지금의 능원 부근이었을 것이므로, 웅녀도 친정집에 가서 왕검을 낳았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 웅녀의 이름이 교웅(蟜熊)이었다는 말도 있다.
이곳 맥족의 중심지였던 우수주(우두주) 즉 후일의 춘주, 춘천이었던 지금의 발해 북쪽 요녕성 능원(凌源) 일원은 수준 높은 우하량선사문화유적이 발견된 곳으로서, 필자의 판단으로는 우하량선사문화유적은 우리 맥족(貊族)의 문화유적으로서 옛 웅씨국, 진번국, 맥국의 문화유적일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되는데, 결국 이는 중국의 문화가 아니라 우리 선조들 즉 환국, 단국, 고조선의 문화유적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고조선(古朝鮮)의 건국시조 단군왕검(檀君王儉)은 당시 외가집이었던 지금의 능원(凌源)부근에서 탄생했을 가능성이 많다고 하겠다.
☆ 호랑이를 숭상하던 호족 즉 원래 예(濊)의 거주지는 지금의 난하(옛 패수) 최상류인 내몽골 정람기 일원이었는데, 후일 한(漢) 무제 때에 이르러 창해군이 되었고, 또 예가 그 땅을 동부여 해부루에게 빼앗기게 되자 태백산과 개마산을 넘어 동쪽의 임둔(臨屯) 땅으로 옮겨가서 그곳에 다시 예를 부활시켰는데, 역사에서는 이를 동예(東濊)라 한다. 진한의 북쪽에 위치한 동예를 말한다.
그리고 참고로 지금 역사학자들이 그 위치를 잃어버렸다고 하는 고조선의 장당경(당장경이라고도 한다)은 능원(凌源)에서 북쪽으로 가까이 위치한 지금의 노합하 상류 내몽골 적봉시 영성현(寧城縣)을 말하는 것으로서, 이곳에 살았던 백성들은 원래 평양왕검성(平壤王劍城)에서 큰 장마로 인하여 수재를 당하여 오갈데 없던 이재민들을 단군왕검(檀君王儉)께서 첫 도읍 아사달성(阿斯達城) 아래로 이주시켜 재기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사람들로서 몇 년이 지나지 않아 지상낙원처럼 되었다는 곳이다.
그곳은 지금도 들이 아주 넓고 비옥하며, 강의 상류에 위치해 있어 수재를 당할 염려가 없고, 외침에 안전한 곳이며, 농사짓고 살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다. 가히 십승지지라 할 만한 곳이다.
그러한 인연 때문인지 장당경(藏唐京, 당장경이라고도 한다)은 고조선 내내 왕실의 직할지로 관리되었던 듯하고, 장당경(당장경) 백성들은 첫 도읍성이었던 아사달성(阿斯達城) 관리와 고조선 왕실의 식량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판단된다.
옛날 고조선 왕실에서는 주로 지금의 내몽골 노합하(老哈河) 상류에 위치한 적봉시 영성현 지역에서 정성껏 재배하여 진상한 식량을 먹고 살았을 것이다.
☆ 고려 때의 교주도(交州道, 필자주 : 모든 주와 접했다는 의미이다)가 바로 옛 환인환국의 중심강역으로 보이고, 환웅단국 때의 웅씨국, 진번국, 한사군 때의 진번군, 그 후의 맥국 강역에 해당하는 곳으로서, 고조선 때의 왕실 직할지에 해당하는 곳이다.
지금의 요녕성 능원과 내몽골 영성 일원은 우리 상고사의 핵심지역으로서 매우 중요한 곳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능원의 우하량 선사유적지는 반드시 가보셔야 할 곳이고, 지금 중국 학자들이 요 중경대정부터라고 하고 있는 영성의 대명진토성도 꼭 들러 보시기 바랍니다. 대명진토성이 바로 고조선의 첫 도읍성인 아사달성(阿斯達城)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장에 가보시면 역사는 왜곡되고, 유적, 유물은 무너지고 흩어져 있어 많이 실망하실 수도 있겠지만, 지금으로부터 수천년전 옛 역사의 현장을 보는 것이니 어찌 옛 모습 그대로이겠습니까?
옛 역사의 현장은 역사를 알고 보는 것과 모르고 보는 것은 그 감회가 하늘과 땅 만큼이나 차이가 있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