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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 명림답부(明臨答夫)의 묘 조성지 질산(質山)과 식읍 좌원(坐原)의 위치를 찾았다 - 최초공개

윤여동 2024. 2. 24. 14:06

윤여동설 - 고구려 명림답부(明臨答夫)의 묘 조성지 질산(質山)과 식읍 좌원(坐原)의 위치를 찾았다 - 최초공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2대 유리왕 조를 보면,

  “22(A.D.3) 겨울10월 왕이 국내(國內)로 도읍을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 12월 왕이 질산 북쪽(質山陰)에서 사냥하면서 닷새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았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6대 태조대왕 조를 보면,

  “55(A.D.107) 가을9월 왕이 질산 남쪽(質陽)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자주색 노루를 잡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8대 신대왕(新大王)조를 보면,

  “4(A.D.168) (後漢)나라 현토군 태수 경림(耿臨)이 침입하여 우리 군사 수백 명을 죽였다..........

  8(A.D.172)겨울11월 한(後漢)나라가 대병으로서 우리나라를 향하여 오고 있으므로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공격과 방어 중 어느 편이 이로울 것인가를 물으니,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여 말하기를(後漢)나라 군사들이 수가 많음을 믿고 우리를 얕보고 있을 것인즉,만약 나가서 싸우지 않는다면 적들은 우리를 겁쟁이로 알고 자주 쳐들어올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산이 험하고 길이 좁으니 이것이야말로 한사람이 문을 지켜도 만 명의 사람이 당하지 못하는 격입니다.(後漢)나라 군사가 아무리 수가 많더라도 우리의 방어망을 뚫을 수는 없을 것이니 청컨대 군사를 출동하여 막아버리소서하였다. 답부(명림답부)가 말하기를그렇지 않습니다. (後漢)나라는 나라가 크고,백성이 많아 이제 강병으로서 멀리 쳐들어오니 그 서슬을 당할 수 없습니다.군사가 많으면 싸워야 하고,군사가 적으면 지켜야 하는 것은 병가의 상식입니다.이제 한(後漢)나라 사람들이 천리 먼 길로 군량을 운반하고 있으니 오랫동안 지탱할 수 없을 것이므로,만약 우리가 도랑을 깊이파고 보루를 높이 쌓고,곡식 한 알 없이 들판을 비워놓고 기다리게 되면 적들은 반드시 열흘,한 달이 넘지 않아서 굶주리고 피로하여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이때 우리가 강한 군사로서 쳐 나아가면 우리의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하였다. 왕이 옳게 여기고,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니 한(後漢)나라 사람들이 치다가 이기지 못하고 장수와 병졸들이 굶주려서 퇴각하는데, 이때 답부가 수천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좌원(坐原)에서 교전하니 한(후한)나라 군사가 크게 패하여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왕이 대단히 기뻐하여 답부에게 좌원(坐原)과 질산(質山)을 주어 그의 식읍으로 삼았다.

  15(A.D.179) 가을9월 국상 답부(명림답부)가 죽으니 나이가 113세였다. 왕이 친히 가서 조상하고 7일간 조회를 중지하였으며, 곧 예를 갖추어 질산(質山)에 장사 지내고 20호의 묘직이를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좌원과 질산이 언급되고 있고, 질산에 고구려 신대왕 대의 국상 명림답부(明臨答夫, A.D.67~179)의 묘가 조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 9대 고국천왕(故國川王)조를 보면,

  “6(A.D.184) (, 후한)나라 요동태수(필자주 :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북경을 말한다)가 군사를 일으켜 우리나라를 공격하였다. 왕이 동생 계수를 보내어 치게 하였더니 이기지 못하매 왕이 친히 정예기병을 이끌고 가서 한(후한)군사와 좌원(坐原)에서 싸워 그들을 쳐부수고 적군의 머리를 벤 것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16(A.D.194) 겨울10월 왕이 질산남쪽(質陽)에서 사냥을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국천왕이 질산의 남쪽(質陽)에서 사냥을 했다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왕들은 도읍을 비워두고 아주 멀리 떨어진 곳까지 사냥하러 가지는 않는다.

  나라에 비상사태가 발생했을 때 신속히 도읍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질산(質山)은 당시 고구려의 도읍인 국내(國內)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일 수 없다.

  그리고 또한 10대 산상왕(山上王)조에도,“3(A.D.199) 가을9월 왕이 질산남쪽(質陽)에서 사냥하였다.”라고 다시 질산(質山)이 언급되고 있는데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질산은 당시 고구려의 도읍인 국내에서 가까이 위치하였고, 대대로 고구려왕들의 전용사냥터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시 고구려의 도읍 국내(國內)는 지금의 어디였을까?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고구려의 첫 도읍 졸본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적성현 후성진,

  국내는 북경 북쪽 연경구 연경현 영녕진,

  환도성은 북경 북쪽 회유구 발해진으로 밝혀졌고,

  요동군은 지금의 북경 일원, 현토군은 장가구시 서남쪽 회안현 회안성진이었다.

 

  따라서 좌원이나 질산은 국내(國內)와 현토군(玄菟郡), 요동군(遼東郡)의 중간지역인 지금의 관청수고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인데, 하북성 장가구시 회래현(懷來縣) 부근을 말하는 것임에 틀림없다.

  사실이 이러하다면, 명림답부(明臨答夫)의 묘가 조성되었다는 질산(質山) 역시 지금의 연경현 영녕진(永寧鎭)의 서남쪽에 위치한 회래현(懷來縣)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질산(質山)과 좌원(坐原)은 하북성 장가구시 회래현 부근]

 

[고구려 재상 명림답부묘(明臨答夫墓) 추정지, 좌표 : 동경115도31분41초 북위40도25분41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