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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 31대 신문왕의 아들들 32대 효소왕(孝昭王)과 33대 성덕왕(聖德王)의 왕릉 조성지 찾기 - 최초주장

윤여동 2024. 8. 24. 08:58

윤여동설 - 신라 31대 신문왕의 아들들 32대 효소왕(孝昭王)33대 성덕왕(聖德王)의 왕릉 조성지 찾기 - 최초주장

 

 

  신라 32대 효소왕과 33대 성덕왕은 모두 신라 31대 신문왕의 아들들로서 효소왕이 장자였고, 성덕왕이 차자였다.

장자인 효소왕은 687년생이고, 차자인 성덕왕은 그보다 2-3년 후에 태어났을 것이다.

  효소왕이 7027월에 16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을 때 왕비인 성정왕후(成貞王后)가 첫 임신 중에 있었고 후손이 아직 태어나지 않았으므로 다음 왕위는 효소왕의 바로 아래 동생인 성덕왕이 올랐다.

  아마 이때 성덕왕과 형수였던 죽은 효소왕의 왕비 성정왕후 사이에 아직 태어나지 않은 효소왕의 유복자를 놓고 어떤 밀약 같은 것이 있었던듯 하지만, 오늘은 그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효소왕과 성덕왕이 죽어 지금의 어디에 묻혔는지를 찾아보려 한다.

 

효소왕의 유복자 아들은 바로 삼국사기 기록에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신라 왕자 김수충(金守忠)이었다. 아버지인 효소왕이 죽은 후에야 태어났기 때문에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어머니는 삼국사기 성덕왕 조에 나타나는 성정왕후(成貞王后)이다. 그런데 김수충이 당나라에 숙위로 갔다가 돌아온 그 이후 김수충에 관한 기록은 더 이상 역사서에 나타나지 않는다. 이때 아마 김수충은 서라벌에서 떠나 서쪽 끝 무진주(武珍州)로 가서 신분을 숨기고 살았던 듯 한데, 필자는 이름이 전해지지 않은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시조 왕자공이 바로 이 신라 효소왕의 유복자였던 신라왕자 김수충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32대 효소왕 11(A.D.702) 조를 보면, “가을7월에 왕이 죽었다. 시호를 효소(孝昭)라 하고, 망덕사(望德寺) 동쪽에 장사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효소왕릉(孝昭王陵)은 경주부 동쪽 분남리에 있다(孝昭王陵在府東芬南里)”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망덕사(望德寺)는 사천왕사(四天王寺) 가까이에 위치했던 절로 전해오는데, 사천왕사가 낭산남쪽(狼山南 또는 狼山南嶺)에 조성했던 선덕여왕릉(善德女王陵)의 아래인 낭산남록(狼山南麓)에 위치한 절이었으니 그렇다면 결국 망덕사(望德寺)는 낭산(狼山)의 남쪽 방향 분남리(芬南里)에 위치했던 절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분남리의 망덕사를 찾으면 그 동쪽에서 효소왕릉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33대 성덕왕 36(A.D.737) 조를 보면, “왕이 죽었다. 시호를 성덕(聖德)이라 하고 이거사(移車寺) 남쪽에 장사지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를 보면, 성덕왕릉 조성지에 대하여, “동촌(東村, 필자주 : 서라벌의 동쪽 방향에 위치하고 있던 동네를 말하는 것으로서 대표적으로 알천양산촌을 말한다) 남쪽 양장곡(楊長谷)에 장사지냈다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성덕왕릉은 경주부의 동쪽 도지곡리에 있다(聖德王陵在府東都只谷里)”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기록에 나타나는 이거사 남쪽, 동촌 남쪽 양장곡, 경주부 동쪽 도지곡리가 모두 한 장소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성덕왕릉은 서라벌의 동촌인 알천양산촌의 남쪽 방향에 조성되었다는 말과 같다.

  따라서 지금까지 그 위치를 잘 알 수 없었던 이거사(移車寺)는 옛 담엄사(담암사라고도 한다)의 바뀐 이름이거나 그 가까이에 위치했던 절의 이름이라 할 수 있고, 그 이거사의 남쪽 도지곡리(都只谷里)의 양장곡(楊長谷, 필자주 : 버드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는 긴 계곡을 이루고 있는 곳이라 여겨진다)에 성덕왕(聖德王)의 능을 조성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필자의 연구에 의하면, 신라(新羅)의 천년 도읍지 서라벌(徐羅伐)은 지금의 발해 북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로 밝혀졌고, 동촌인 알천양산촌(閼川楊山村)은 지금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태화구(太和區) 대제촌(大齊村) 일원을 말하는 것으로 비정되며, 그 남쪽에는 신라 초기 박씨왕들의 능원인 사릉원(蛇陵園)이 위치하고 있었고, 사릉원의 남쪽 지금의 소제촌(小齊村)에는 담엄사(담암사라고도 한다)가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담엄사(담암사)의 바뀐 이름이거나 또는 그 가까이에 위치했던 사찰로 여겨지는 이거사(移車寺)의 남쪽 도지곡리(都只谷里)의 양장곡(楊長谷)에 성덕왕릉을 조성했다면, 이는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능해시 백관촌(百官村) 일원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신라 33대 성덕왕(聖德王)의 능은 한반도 경주(慶州)가 아니라 지금 발해 북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동쪽 능해시(凌海市) 백관촌(百官村)의 북쪽 능선에 조성했을 것인데, 이곳은 신라 서라벌 낭산(狼山)의 서쪽 능선에 해당되는 곳이고, 혁거세거서간 탄생지인 양산나정(楊山蘿井)과도 가까운 곳이다.

 

  결론적으로 신라 31대 신문왕(神文王)은 낭산(狼山) 동쪽에 묻혔고,

  32대 효소왕(孝昭王)은 낭산(狼山) 남쪽 분남리(芬南里)에 있던 망덕사(望德寺)의 동쪽에 묻혔으며,

  33대 성덕왕은 낭산(狼山) 서쪽 도지곡리(都只谷里)의 양장곡(楊長谷)에 묻혔다.

  또한 성덕왕의 아들인 35대 경덕왕의 능도 삼국사기에는 모지사서잠(毛祗寺西岑)에 조성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유사에는 처음에 경지사(頃只寺) 서쪽 봉우리에 장사지내고 돌을 다듬어 능을 만들었으나 후에 양장곡(楊長谷)으로 이장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31대 신문왕과 그 후손왕들은 서라벌(徐羅伐) 동쪽에 위치한 낭산(狼山) 주변에 묻혔다는 말이고, 특히 성덕왕과 경덕왕 부자는 함께 양장곡(楊長谷)에 능이 조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신문왕의 후손 왕 중 34대 효성왕은 법류사(法流寺) 남쪽에서 태워 뼈를 동해에 뿌렸다(散骨東海)고 하였고, 36대 혜공왕은 능에 관한 기록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