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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포석정은 나라의 운명을 점치던 곳이었다?

윤여동 2007. 12. 9. 20:45

윤여동설 - 포석정은 나라의 운명을 점치던 곳이었다?

 

 

   삼국유사 기이 제2 처용랑과 망해사 조를 보면,
  신라 49대 헌강왕 때 "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신이 왕 앞에 나타나 춤을 추어 보였는데, 좌우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왕에게만 보였다.
  (남산신이) 춤을 추어 보였고, 왕이 손수 사람들 앞에서 춤을 따라 추었다. 신의 이름을 혹은 상심이라 했으므로 지금까지 나라 사람들에게 이 춤이 어무상심 또는 어무산신이라 전해지게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애왕 4년(A.D.927)조를 보면,
  "가을 9월 견훤이 고울부로 신라군을 공격해와 왕이 고려 태조에게 구원을 청하니 태조가 장수에게 명하여 강한 군사 1만을 출동시켜 구원하게 하였으나 이 구원병이 아직 오지 않았으므로 견훤이 겨울 11월에 신라의 도읍 금성을 습격해 왔다.
  이때 왕(경애왕)이 비빈과 종척들을 데리고 포석정(鮑石亭)에서 연회를 베풀어 즐겁게 놀고 있어 적병이 오는 것을 알지 못했다......중략......................    왕은 비첩 몇 명과 함께 후궁에 있다가 (후백제군의) 군영으로 잡혀갔는데, (견훤이) 왕을 협박하여 자살하게 하고 왕비를 강제로 강간하고 그의 부하들로 하여금 비첩들을 난행하게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는 이 기록들을 읽고 포석정이 춤이나 추고 잔치나 베풀며 노는 장소로 인식하고 있고, 신라의 멸망을 재촉한 대표적인 장소라고 알고 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는 포석정이라 하면 그러한 상황을 떠올리며 외침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는 때 왕이라는 사람이 적군을 물리칠 대책은 강구하지 않고 비빈들을 데리고 잔치나 베풀고 놀던 곳이고, 그랬으니 신라가 멸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는 식으로 역사를 해석한다.
  지금 경주의 포석정에 가면 돌을 다듬어 전복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용도를 알 수 없는 석조물이 있는데, 학자들은 그 석조물이 왕이 잔치를 베풀고 놀 때 물을 흘려 보내고 그 주변에 둘러앉아 술잔을 띄우고 시를 읊으며 놀던 곳으로서 유상곡수연의 흔적이라 한다.
 
  그러나 포석정이 정말로 신라왕들이 잔치나 베풀고 놀던 그러한 장소였을까? 
   왕들이 야외에서 잔치를 베풀고 논다면 꽃피는 봄이나 단풍드는 가을에 앞에는 굽이쳐 흐르는 강물도 좀 내려다보이고, 뒤에는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절벽도 좀 있어 폭포수도 흘러내리며, 넓직하고 평평한 바위가 있는 그러한 경치 좋은 장소를 찾아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당연할 것인데, 지금 포석정의 위치는 남산이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경치 좋은 곳이 아니다.
  한마디로 왕이 잔치를 베풀고 놀 만한 그런 장소가 아닌 것이다. 
  앞서 헌강왕이 포석정에 갔을 때 남산신이 나타나 춤을 추어 보여 주었다는 것을 보면 포석정은 남산신과 관련 있는 장소가 아니었나 생각해 볼 수 있고, 또 경애왕의 경우에도 왕위에 올라 행한 기록을 보면 그가 국정을 살피지 않고 방탕했다고 볼 수가 없고, 가령 경애왕이 실제 형편없는 왕이었다 하더라도 외적이 침공해 와 나라가 스스로 막을 힘이 없어 고려에 구원군을 보내 달라고 요청해 놓았으나 아직 그 고려군이 도착하지 않아 나라의 사직이 풍전등화와 같은 이때 잔치를 베풀고 술판을 벌이고 춤추고 노래하며 논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때가 음력 11월이었다고 하는데, 어름 얼고 눈 내리며 바람 부는 그 추운 겨울철에 실내도 아닌 야외에서 유상곡수연을 베풀며 논다는 것이 과연 말이 되는 해석일까? 
  그리고 화랑세기 18세 풍월주 춘추공 조를 보면, 김춘추가 김유신의 여동생인 문희와 "포사(鮑祠)"에서 길례(결혼식)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어 이 포사가 곧 "포석정(鮑石亭)"을 말한다고 본다면 포사가 단순하게 연회나 베풀고 노는 유희적인 장소였다면 왕족인 김춘추가 엄숙하고 신성해야할 결혼식을 그곳에서 올릴 리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포석정은 남산신의 사당이 있던 장소였을 것이고, 남산신에게 제사를 올리던 신성한 장소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전복 모양으로 만들어진 그 석조물은 과연 무슨 용도로 쓰였을까?
  신라의 경애왕은 후백제군이 쳐들어와 서라벌(금성) 가까이 진군해 오고 있는 난리 통에 신성한 남산신의 사당에서 정말로 시를 읊으며 술 마시고 노는 유상곡수연을 하고 있었을까?
  그랬을 리는 없다고 보여지고, 필자는 포석정의 석조물은 남산신에게 나라의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리고 난 후 그 감응을 확인하는 장소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즉 점을 치는 도구였을 것이라는 말이다.
  예를 들어 남산신에게 바치는 술잔을 물에 띄워 한바퀴를 완전하게 돌면 남산신이 도와주어 나라가 무사태평할 점괘라든지, 끝까지 나아가지 않고 중간에 머물거나 술잔이 물에 빠지면 점괘를 달리 해석하게 되는 그러한 장소가 아니었나 싶은 것이다.

 

☆ 부여에서는 나라에 군사들을 동원해 전쟁을 할 때 소를 잡아 제사를 지내고, 소의 발굽으로 점을 쳤는데, 이때 소의 발굽이 붙으면 길하고, 떨어지면 흉하다고 했다고 한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후백제군이 침공해 와 나라가 위기에 빠지자 경애왕은 고려에 사신을 보내 군사로서 신라를 구원해 주기를 요청했으나 고려군은 한 달이 넘도록 오지 않고 있었고, 후백제군은 금성 가까이 까지 접근했다는 소식이 왕에게 보고되었다.
  어찌할 방법이 없던 신라의 경애왕은 애가 타서 궁궐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경애왕은 제물을 준비해 포석정으로 가서 남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과연 신라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신에게 물었을 것이다.
  즉 고려가 과연 군사를 파견하여 신라를 구원해 줄 것인지, 이번 전쟁에서 승리해 사직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인지 등등...........
  그런데 다행히도 점괘는 좋게 나왔고, 경애왕과 비빈 종척들은 불안했던 마음을 잠깐 접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로 제주로 썼던 술도 한잔씩 나누어 마시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후백제군이 포석정에 들이 닥쳤고, 후백제군이 볼 때는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경애왕이 비빈들과 함께 술잔치나 베풀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을 것이고,  그리하여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술잔치를 베풀고 놀다가 후백제의 견훤에게 잡혀 죽었다고 전해지게 되었을 것이다.
  포석정은 춤추고 노래하고 노는 그러한 곳이 아니라 남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신라의 운명을 점치는 신성한 장소였고, 경애왕은 나라의 운명이 걱정되어 포석정에 가서 남산신에게 나라가 무사하게 해 달라고 빌다가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는 방탕한 임금이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걱정하던 왕이었으나 견훤에게 잡혀 죽고 말았던 것이다.       
  경애왕은 견훤에게 잡혀 죽은 것만도 억울했을 텐데 거기에 더하여 나라는 어찌 되든 말든 비빈들과 어울려 잔치나 베풀며 놀던 방탕한 왕으로 전해지게 되었으니 지금까지 그는 지하에서 매우 억울해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가 죽은 지 1000년도 더 지나서야 진실이 밝혀져 경애왕의 누명이 벗겨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