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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신라가 숯때문에 멸망했다고?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2. 11. 01:03

윤여동설 - 신라가 숯 때문에 멸망했다고? - 최초주장

 

 

   천년 왕국 신라가 숯 때문에 멸망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면 많은 사람들은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하고 있는 것인가 하고 매우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삼국유사에는 "49대 헌강대왕 때에는 서울로부터 지방에 이르기까지 집과 담이 이어져 있고, 초가는 하나도 없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왕 6년(A.D.880) 조에는,
  "9월 9일에 왕이 좌우 신하들과 함께 월상루에 올라 사방을 바라보았는데, 경도(서라벌, 금성)의 민가들이 서로 이어져 있고, 노래와 풍악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왕이 시중 민공에게 말하기를, '내가 듣자니 지금 민간에서는 지붕을 기와로 덮고, 짚으로 해일지 않는다 하고, 밥을 숯으로 짓고 땔감을 때지 않는다 하니 그것이 어찌된 일인가?' 하니 민공이 대답하기를, '신 역시 그렇게 듣고 있습니다. 왕께서 즉위하신 이후 음양이 화합하고 비바람은 순조로워 풍년이 드니 백성들은 식량이 풍족하고 변경이 조용하고 도시는 환희를 즐기니 이는 성덕의 소치입니다.' 하니 왕이 기쁜 얼굴로 말하기를, '이는 경들이 보좌한 힘이지 어찌 짐의 덕이겠는가?'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는 이 기록을 읽고 이때 신라가 매우 평화로웠고, 살기가 좋아 태평성대를 구가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문화적으로 앞섰기 때문에 지붕을 기와로 덮고, 땔감을 아궁이에 때서 밥을 해먹지 않고 연기가 나지 않는 숯으로 밥을 해 먹었다고 이해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신라의 도읍 서라벌(금성)은 연기가 없는 깨끗한 도시였을 것이며, 문화적으로 앞섰을 것이라고 그 시절을 높게 평가하는 듯하다.
 

  그렇지만 이를 한번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이는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서 이때부터 신라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온 백성이 지붕을 기와로 덮으려면 그 기와를 굽기 위하여 산에 있는 나무를 베어 장작을 만들어야 하고, 온 백성들이 숯으로 밥을 해먹기 위해서는  온 산의 나무를 베어 숯을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나라안 모든 산의 나무는 베어지게 되어 조그만 비에도 산사태가 나게 될 것이고, 짧은 기간의 가뭄에도 강물은 말라버릴 것이다.
  농부들은 다만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 의존하여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어 농사는 흉년이 들고 수확량은 줄어들어 식량이 부족하게 될 것이다.
  식량이 부족하면 값은 천정부지로 올라가게 될 것이고, 가난한 백성들은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어 도둑이 되거나 산적이 될 수밖에 없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유리걸식하게 될 것이다.   
  민심은 왕실로부터 떠나게 될 것이고, 각처에서 난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의식이 족해야 예절을 알고,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양반이라 했던가?
  백성들에게는 당장 배고픔을 면하게 해줄 쌀 한 되빡이 필요하지,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있는 판에 왕이고 나발이고 무엇이 필요하랴.
  백성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지 못하고, 잘살게 해주지 못하는 정권이 국민들로부터 지지 받지 못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데 실제 신라는 그 몇 년 후인 50대 정강왕 때 한주에서 김요가 반역을 도모하다가 잡혀 죽는 것을 시작으로 51대 진성여왕 때는 국내 여러 주와 군에서 세금을 내지 않아 국고가 텅 비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왕이 사람을 각지에 보내 세금을 독촉하자 각처에서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났다고 한다.

  당장 굶어죽어가고 있는 판에 어찌 나라에 세금을 낼 수 있었을까?
  그런데도 관리들은 세금을 독촉했을 것이고, 세금을 내지 못하면 잡아다가 곤장을 치거나 재물을 빼앗아 갔을 것이다.
  백성들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을 것이고,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이는 온 백성이 지붕을 기와로 덮고, 숯으로 밥을 해먹기 위해 산의 나무를 모두 베어낸 결과였다.
  그렇게 신라는 점점 멸망의 길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 삼국유사 기이제2 처용랑 망해사 조를 보면, 49대 헌강왕 때 처용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어 이때 신라의 성문화가 혼란스러운 시기였음을 알 수 있고, 또 산신과 지신이 나타나 춤을 추며 노래부르기를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라고 했는데, 그 의미가 도읍이 장차 파괴될 것이므로 지혜로운 자는 그를 알고 미리 도망쳐야 한다는 것으로서 나라가 장차 멸망할 것을 경계한 것이었으나 나라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상서로움이 나타났다고 하고 술과 여색을 더욱 즐기다가 나라가 마침내 망했다고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부터 신라가 기울어져 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되어 민심이 신라의 왕실로부터 떠나자, 궁예는 불만에 쌓인 백성들을 모아 태봉을 세우게 되고, 견훤 역시 신라왕실에 등을 돌린 백성들을 모아 후백제를 세우게 되어 신라는 점점 힘을 잃게 된다.


  따라서 헌강왕 때 온 나라 사람들이 지붕을 기와로 덮고 숯으로 밥을 해 먹는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헌강왕은 기뻐하기에 앞서 그를 철저하게 금하는 조치를 취했어야 했고, 아부를 일삼는 민공이라는 사람을 참수해버렸어야 했다.
  그러나 헌강왕은 태평성대라는 말에 속아 불과 몇 년 앞도 내다보지 못한 것이다.    
  우리가 지금 별것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는 숯이 천년왕국 신라를 멸망시킨 주범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수입 목재와 대리석으로 호화 주택을 짓고 값비싼 수입가구로 장식하고, 고급 술집에서 밴드를 울리며 질펀하게 놀며 수입양주를 마시고, 나이트클럽에서는 남녀가 어울려 밤새도록 술 마시고 춤춘다.
  기름, 가스 한 방울 나지 않는 나라에서 집집마다 연기가 나지 않는 가스로 밥을 해 먹고, 기름으로 방을 덥히고, 경상도, 전라도로 나뉘어져 서로를 비난하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신라 멸망의 전례를 보아 경계해야 할 때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