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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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1) 대륙 낙랑군, 평양 낙랑국 분리설은 거짓말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2. 12. 01:30

윤여동설 - 낙랑군은 대륙에 있었고, 낙랑국은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다(전편) - 최초주장

 

[하북성 승덕시 경추산]

 

 [하북성 승덕시 쌍탑산]

 

 

 

[갈석산 입구에 있는 글- 천년의 수수께끼를 어찌 풀 수 있을 것인가?라고 쓰여 있는데, 이 산은 아홉명의 황제들이 올랐다는 원래의 우공갈석이 아니라 후대인 명나라때  붙여진 이름이다]  

 

 

  옛날 위만은 오갈 데 없던 자신의 망명을 받아들여주고 박사로 임명해 나라의 서쪽 변경에 영지까지 내려주었던 고조선 준왕의 은혜를 배반하고, 한나라 군이 열 군데 길로 침공해 오니 왕검성으로 가서 왕을 보호하겠다고 거짓말로 보고하고, 군사들을 이끌고 왕검성으로 온 뒤 갑자기 돌변하여 준왕이 있는 왕검성을 공격해 빼앗아 스스로 왕위에 오른 후 사방 수천리에 이르는 땅을 차지했다고 하고, 아무 방어 준비도 하지 않고 마음놓고 있다가 어이없게도 왕검성을 빼앗긴 고조선의 준왕이 좌우궁인 수천 명을 이끌고 남쪽으로 급히 도망쳐 마한, 진한, 변한을 합하여 한(韓)이라 하고 다시 한왕에 올랐으므로 북쪽에는 위만조선, 남쪽에는 한이 위치하게 된다.

 

☆ 우리는 지금 이러한 상황을 북한 평양이 왕검성이었고, 위만조선이 북한지역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왕검성을 위만에게 빼앗긴 준왕이 남쪽으로 도망쳐 전북 익산 금마의 월지국에 도읍하고 남한지역을 다스렸을 것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기원전 108년에 한(漢) 무제가 위만조선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토군이라 하는 소위 한사군을 설치하게 된다.
  이때 수군의 양복은 지금의 산동반도에서 발해에 배를 띄워 바다를 건너 패수를 타고 올라가 왕검성을 공격했다고 하고, 위만에게 왕검성을 빼앗긴 후 남쪽으로 도망쳐 준왕이 다시 세웠다는 한(韓)의 강역이 사방 4천리에 이르는 넓은 강역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위만조선이 지금 북한의 평양을 도읍으로 하고 있었다면 양복은 산동반도에서 왜 서해(황해)가 아닌 발해에 배를 띄워야 했으며, 준왕이 세운 한(韓)이 한반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어떻게 사방 1천리에 지나지 않는 한반도 남쪽에 사방 4천리에 이를 정도로 큰 나라인 한이 위치할 수 있었을까?

 

  또한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설치했다는 소위 한사군에 대한 기록들을 보면 더욱 혼란스러워진다.  
  삼국사기에는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으며,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있고, 남쪽에 가야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수서나 당서에는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마한에서 건국되었고, 신라의 서쪽에 위치했다는 백제와 진한에서 건국되었다는 신라 그리고 변한에서 건국되었다는 가야는 과연 어디에 위치했다는 말이며, 삼국 땅을 차지하고 건국된 고려는 또 어디에 위치했었다고 이해해야 되는 것일까?

 

   우리는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고, 고조선으로부터 한반도를 중심으로 우리의 반만년 역사가 이어져 왔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기록들이 말해주고 있는 우리의 역사 강역과 우리가 지금 상식으로 알고 있는 역사강역은 대륙과 한반도로 확연히 다른 것이다.   
  그러자 이러한 사서의 기록들과 현 한반도의 상황 즉 한반도에서 발견되는 삼국의 흔적들을 결부시켜 우리 역사를 설명해 보려고 궁여지책으로 등장한 주장이 소위 낙랑군·낙랑국 분리설이다.
  즉 낙랑군은 대륙의 진황도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삼국사기에 언급되고 있는 최리의 낙랑국은 한반도 평양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따로 떼어 해석하는 주장이다.
  따라서 위만조선은 한반도 평양에 위치했던 것이 아니라 장성이 시작된 진황도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우리 한반도 역사와 별 상관이 없고,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쳐 없애고 설치한 한사군은 바로 지금의 진황도 부근에 설치한 것이며, 최리의 낙랑국은 낙랑군의 일부세력이 한반도로 이동해 북한 평양을 중심으로 한 그 부근에 새로이 낙랑국을 세웠는데, 후한의 광무제가 서기 44년에 북한 평양에 있었던 최리의 낙랑국을 쳐 살수이남 땅에 대륙과는 다른 낙랑군을 또 설치했다는 것이고, 삼한은 한반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럴듯하게 포장되어 있어 많은 사람들은 이 설이 우리의 한반도 역사와 대륙 역사를 한꺼번에 포함해 설명할 수 있는 합리적인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듯 하다.

 

☆ 이 설은 한반도 삼국의 흔적들을 설명하기 위해 낙랑국을 한반도 평양으로 끌어들여 설정함으로서 결국 삼한, 삼국도 원래부터 한반도에 위치했던 것같이 만들려는 것으로서 정말 바보같은 주장이다. 
  연나라 사람이라는 위만에게 고조선의 왕검성을 빼앗겼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위만조선을 우리 역사의 변방으로 밀어내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친 것은 우리 역사와는 상관없는 것으로 보려고 하고, 전한의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도 우리의 역사와는 직접 관계가 없다고 보려는 것인데, 이러한 사고방식으로 우리 역사를 해석하기 때문에 사방 수천 리에 이르렀다는 위만조선의 강역이 우리의 역사 강역에서 떨어져 나가게 되어 광활했던 우리의 옛 대륙 땅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지금까지도 반도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고조선의 준왕이 졸지에 왕검성을 위만에게 빼앗기고 도망쳐 그 남쪽에 다시 한을 세웠던 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그러한 원한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준왕은 한왕이 된 후에도 위만조선과는 교류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위만이 도읍했던 왕검성(중국 사람들은 왕험성이라 했다)은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한사군의 한 군이었던 낙랑군의 치소로 사용되었고, 후일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최리의 낙랑국을 쳐 빼앗아 후일 그곳이 평양성이 되어 고구려의 도읍으로 사용하게 되는데, 삼국사기에는 이곳이 곧 옛 선인왕검이 도읍했던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고려의 서경이 된다. 그리하여 사서들에는 고려 역시 한나라 때의 낙랑군 땅에 위치했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고, 고려 태조 왕건은 자신의 딸을 낙랑공주라고 부르기도 한다. 
  낙랑군이나 낙랑국이 위치가 이동된 적이 없이 동일한 곳으로 나타난다.
  즉 처음에 낙랑이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면 계속 한반도에 있는 것이고, 대륙에 있었다면 계속 대륙에 있는 것이지, 낙랑이 현토군과 같이 위치를 옮긴 것으로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낙랑군은 대륙에 있었고, 낙랑국은 북한 평양에 있었다고 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것은 한반도 남쪽에서 삼한 즉 마한, 진한, 변한이 존재했었다는 것을 밝혀 줄 직접적인 증거품이 발견된 적이 없고, 삼국시대 중엽부터의 유물, 유적들이 발견된다는 점이다.

 

 
☆ 학자들은 지금 한반도의 전라도 지역에서 발견되는 삼국시대 이전의 유물, 유적을 마한의 유물이라 하고, 경상남도 지역에서 발견되는 유물, 유적들은 변한 유물이라 하며, 경상북도 지역이 진한이었을 것으로 규정하지만 사실 그 유물, 유적들이 삼한의 유물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나타난 적은 없이 거꾸로 사서의 기록을 그 지역에 먼저 대입시켜 놓은 후 전라도 지역이 마한이었을 테니까 그곳에서 출토되는 것은 마한유물이고, 경상남도 지역이 변한이었을 테니까 변한유물이고, 경상북도 지역이 진한이었을 테니까 그곳에서 발견되는 유물, 유적은 진한유물이다 하는 식으로 규정해 버린다.

 

 

                                                                                      

  [후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