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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2)대륙 낙랑군, 평양 낙랑국 분리설은 거짓말이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2. 13. 01:45

윤여동설 - 낙랑군은 대륙에 있었고, 낙랑국은 한반도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은 거짓말이다(후편) - 최초주장

 

[전편에서 계속]

 

 

[일제강점기에 발견 되었다는  낙랑 점제현 신사비 -  역사 왜곡을 위해 일제가 갈석산 부근으로부터 옮겨왔다는  주장이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한반도 역사와 대륙역사를 어떻게 연결 지어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가 지금까지 그 관계를 명쾌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낙랑군과 낙랑국 그리고 후한 광무제가 살수이남 땅에 설치했던 후한낙랑군과의 관계는 그리 혼란스러워 할 일이 아니다.
  기원전 194년 위만이 준왕의 왕검성인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갑자기 쳐서 빼앗아 스스로 왕위에 오르자 고조선의 준왕은 그 남쪽으로 도망쳐 지금의 하북성 당산 풍윤부근에 다시 도읍을 정하고 한왕에 올랐다.
  그곳이 바로 지금까지 어디인지 몰랐던 한(韓)의 도읍 월지국(목지국이라고도 한다)이었다. 따라서 이때 위만조선과 한의 국경은 요녕성 조양 부근으로부터 북경 북쪽 부근까지였을 것이고, 위만조선과 한은 철천지 원수사이가 되어, 상호 교류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한(韓)으로서는 어이없게 빼앗긴 왕검성을 언젠가는 탈환하겠다고 벼르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기원전 128년에 이르러 지금의 내몽골 정람기 부근에 위치한 예왕 남려가 위만조선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요동군(현 북경 부근)으로 귀속해오자 한(漢) 무제는 그 예의 땅을 창해군으로 명명하고, 요동군에서 예까지 교통로를 개설하고 있었다.
 

  그러자 위만조선의 우거왕은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인데, 교통로 개설에 과도한 세금이 들어 연나라,제나라 사람들이 괴로워하자 교통로 개설은 중단되고 창해군은 폐지되고 만다.  
  그러다가 기원전 108년에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쳐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하게 되자 그 땅은 고스란히 한(漢)나라의 소유가 되어 버렸고, 낙랑군은 대개 지금의 난하를 중심으로 하는 그 북쪽부근에 설치되고, 진번군은 지금의 내몽골 영성, 능원일원에 설치되고, 임둔군은 내몽골 고륜기 부근에 설치되며, 1년 뒤인 기원전 107년에 옥저 땅으로 현토군을 적봉, 옹우특기 부근에 설치하게 된다.
  그런데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동부여에게 그 땅을 빼앗긴 창해군 예가 동쪽으로 이동하여 임둔군 땅에 동예를 세우게 되고, 진번군은 맥족이 차지하고 맥국을 세우자 한나라 소제는 진번군과 임둔군 두 군을 폐지하고, 현토군의 관할지를 낙랑군에 이관하고 현토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이동시키게 되는데, 새로 옮긴 현토군은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 부근이다.
   

  한편 옛 현토군의 관할지를 이관 받은 낙랑군에서는 그 땅이 단단대령(현 칠로도산)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어 직접 관할하기가 곤란하자 영동 7현으로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고 도위를 임명해 그 지역을 관할하게 하는데, 지금의 내몽골 영성, 객라심기 부근이 그 치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졸본부여 땅에서 고구려가 건국되고, 마한의 동북쪽 진번 남쪽 땅에서 백제가 건국되며, 진한 땅에서 신라가, 변한 땅에서 가야가 건국된다.  
  그런데 전한→왕망의 신나라→후한으로 이어지는 혼란기를 틈타 최리라는 사람이 낙랑군 땅을 차지하고는 스스로 낙랑국이라 하며 칭왕을 하게 되자 고구려의 대무신왕은 서기 30년에 먼저 낙랑동부도위를 쳐 빼앗아버리고, 이어 37년에는 최리의 낙랑국마저 쳐 없애 버리게 되어 우리 땅에서 낙랑은 일시적으로 소멸하게 된다.

 

☆ 이때 낙랑국왕 최리는 자기의 딸인 낙랑공주와 고구려의 호동왕자를 혼인시켜 사돈관계를 맺음으로써 안전을 보장받으려 했다가 고구려 대무신왕이 그를 거부하고 낙랑국을 쳐 없애버리는 통에 멸망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고구려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는 바로 이때 일어난 사건이다.

    
  

  그런데 서기 44년에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가 빼앗아 차지하고 있던 낙랑국 땅을 침공해 고구려로부터 살수(현 조하)이남 땅을 다시 탈환하여 낙랑군을 재 설치하게 되는데, 이것이 서기 313년까지 존속하게 되는 후한낙랑군으로서 치소는 하북성 승덕시 흥륭현 일원이다.
  그런데 얼마 후 백제에서 12대 계왕이 죽고 13대 근초고왕과 계왕의 아들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게 되고, 패한 계왕의 아들이 대륙을 떠나 한반도로 건너와 익산 금마에 자리잡고 다시 백제(반도백제)를 세우게 되는데, 한반도에서 4세기 중반 이후의 백제 유물부터 출토되는 것을 설명할 수 있다. 
 

  그리고 경주 부근과 김해 등지에서 출토되는 유물들은 사실은 신라 유물이 아니라 흉노족인 투후 김일제의 후손들이 후한 광무제에게 쫓겨 한반도 남부로 도망쳐 와서 세웠던 흉노족 왕국의 흔적들이다.   
  따라서 한반도는 우리 고대 역사의 중심이 아니었고, 낙랑군은 하북성 승덕시를 중심으로 설치되었으며, 최리의 낙랑국 역시 한반도 평양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말이 된다.
  전한낙랑군과 낙랑동부도위, 그리고 최리의 낙랑국은 모두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내몽골 적봉, 영성 일원에 넓게 위치하고 있다가 그 땅을 고구려에게 빼앗겼고, 후한낙랑군은 승덕시 흥륭현 일원에 작게 위치하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데 한반도 평양 부근이 낙랑국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북한에서 일제강점기에 발견되었다는 점제현신사비, 낙랑봉니 그리고 요즈음에 북한 평양의 옛 무덤에서 출토되었다는 낙랑목간을 낙랑이 한반도 평양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라고 하고 있는데, 점제현신사비는 일제 강점기에 평양지역을 낙랑이라 하기 위해 중국 진황도의 갈석산 부근에 있던 비석을 떼어 한반도로 옮겨왔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고, 봉니라는 것은 문서를 보낼 때 발송지에서 봉해 보내는 것이므로 평양에서 낙랑봉니가 발견되었다면 평양이 문서를 받은 곳이 되므로 오히려 평양이 낙랑이 아니라는 증거라 하기도 하며, 또 일제 강점기에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만들어진 모조품이라고도 한다.
  또 낙랑목간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확실히 볼 수 없지만, 그것이 평양 부근의 옛 무덤에서 출토된 것이 확실하다 해도 만약 옛날 어느 사람이 있어 낙랑에 관심이 많아 낙랑 25개 현의 인구를 조사 기록한 목간을 어찌 어찌 하여 구하여 가지고 있다가 그가 죽자 무덤 속에 함께 넣어 주었고, 지금에 이르러 그 목간이 발굴되었다고 하여 어떻게 평양이 낙랑이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옛날 어느 사람이 낙랑목간을 가지고 바다를 건너다가 표류하여 1만리쯤 떨어진 곳에 도착하게 되었고,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그곳에서 살다가 죽자 목간을 함께 묻어 주었는데 세월이 2천년쯤 흐른 후 그 무덤을 발굴하여 낙랑목간이 그곳에서 발견되었다고 하여 그곳이 낙랑이었다고 주장한다면 소가 웃을 일 아닌가?
  한반도 평양에 낙랑이 설치되었던 적은 없으며, 춘천에도 낙랑이 설치된 적이 없다.

  그리고 한반도 황해도 역시 대방군이 아니고, 서울의 풍납토성은 백제의 위례성이 아니며, 경주는 신라의 서라벌(금성)이 아니다.

 

☆ 혹시 낙랑에서 죄를 짓고 한반도 평양까지 도망쳐 와 산 사람이 있었거나 또는 무슨 사정이 있어 일부 사람이 한반도에 와서 살았을 수는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낙랑군·낙랑국 분리설은 잘못된 주장이다.
  조선이 건국되어 대륙의 개경(하북성 승덕시 관성현)에서 한반도의 한양(현 서울)으로 도읍을 옮겨오기 전에 한반도는 우리 고대사의 중심지가 아니었다.[필자주 : 다만 대륙백제 계왕의 아들 무광왕이 대륙백제에서 근초고왕과의 왕위다툼에서 패하고 한반도로 도망쳐 와서 건국했던 반도백제가 4세기 중반부터 한반도 서부에 별도로 위치하고 있었던 것은 논외로 한다]
  우리 고대사의 중심은 지금 중국 하북성 난하를 중심으로 한 그 부근으로서 강성할 때는 서쪽으로 태행산맥 부근까지가 우리의 강역이었다.
  따라서 북경, 하북성, 내몽골 일원은 우리의 옛 땅인 것이다.
  언젠가 잃어버린 대륙의 그 땅을 도로 찾는 날 우리는 대제국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고, 대륙의 초원도 마음껏 말달려 볼 수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기분 좋은 일 아닌가?

 

[참고]

<발해만 북쪽 연안 고대도시의 정체>
 
(후루다오시<중국 랴오닝성>=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서쪽으로는 허베이성(河北省) 산해관(山海關)과 인접한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후루다오시(葫蘆島市) 쑤이중현(綏中縣)에서 연이어 발견되고 있는 고대 왕궁은 실체가 무엇일까?
발해만 북쪽 연안을 따라 그 존재가 속속 보고되고 있는 이들 유적지를 중국 학계에서는 진시황제 혹은 한무제의 행궁지(行宮址), 아니면 '진한유지'(秦漢遺址. 진-한나라 시대 유적지)라고 규정한다.행궁지란 제왕이 지방 출장 때와 같은 한정된 시기에만 거주하는 이동식 왕궁이자 황제의 별장으로 '행재소'(行在所)라 하기도 한다.한데 쑤이중현 일대에 대한 발굴에서 나타난 진한시대에 속하는 유적들을 단순히 그렇게 간주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대목이 한두 군데가 아니다.무엇보다 행궁지 숫자가 너무 많다. 나아가 그 규모가 행궁지 수준을 뛰어넘는다. 이에 더해 이들 소위 '행궁지'끼리 유적 밀집도가 높다.이런 점에서 쑤이중현 만가진(萬家鎭)이란 구역이 주목을 요한다.이곳에서는 갈석궁지(碣石宮址)라고도 하는 석비지(石碑址) 유적을 중심으로 그 서쪽 2㎞ 지점에 흑산두(黑山頭) 유적이라는 또 다른 대규모 왕궁터가 발견됐다. 나아가 갈석궁지 동쪽 1㎞ 지점에서도 또다른 진한시대에 활용된 건물터가 나타났다.뿐만 아니다. 갈석궁지 북쪽 500m 가량 떨어진 양가둔(楊家屯)이란 곳에서는 같은 시대 건물지와 함께 기와 가마터가 확인됐고, 여기에서 서북쪽 3㎞ 지점 주가둔(周家屯)과 그 서쪽 2㎞ 지점 대금사둔(大金絲屯)에서도 진한시대 유적이 발견됐다.만가진 지역 뿐만 아니다. 여기에서 해변을 따라 서쪽으로 40㎞ 가량을 간 지점인 허베이성 베이다이허(北戴河) 금산취(金山嘴)란 곳에서도 단순히 행궁터라고 보기는 힘든 규모와 출토유물을 자랑하는 진한시대 대형 건물지가 확인됐다.이들 모두를 진시황이나 한무제가 잠시 활용한 행궁지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사마천의 사기(史記)에 의하면, 진시황은 재위 37년 동안 단 한 번만 이 지역을 찾았을 뿐이며, 황제 자리에 무려 53년 동안이나 있었던 한무제 또한 고작 1번 정도만 이 일대를 방문했던 것으로 나와 있다.나아가 사기에 기록된 시황제와 한무제의 발해만 북쪽 해안 일대 방문 장소가 지금의 베이다이허(북대하)나 만가진이라는 확실한 증거도 없다. 다만, 여기에서 가까운 그 어딘가에 그들이 한번씩 찾았다는 사실만을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설혹 두 황제가 방문한 곳이 지금의 북대하 일대라고 해도, 지금까지 확인된 유적지들을 행궁지로 볼 수 있는가는 커다란 의혹을 낳는다.황제의 단 한 번 방문을 위해 발굴조사 결과 드러난 것과 같은 화려하고 광대한 규모의 건축물을, 그것도 밀집한 지역에다 6곳 이상이나 지었다고는 볼 수 없다.그렇다면 만가진 일대 소위 '진한시대 행궁지' 유적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고고학에 대한 조예가 어느 정도 있다면, 좁은 지역에 밀집해서 출현하는 대형 건물지가 무엇을 말하는지 쉽사리 짐작할 수 있다. 단순한 행궁지가 아니라 고대도시로서 한 왕국의 수도인 왕경(王京)인 것이다.진한시대에 해당하는 기간에 발해만 북부 연안 일대에 왕경을 조성할 수 있던 주체는 누구일까?

중국의 각종 기록에서 고조선 혹은 위만조선 도읍지라는 왕험성(王險城. 혹은 왕검성<王儉城>), 나아가 이곳을 중심으로 한 무제가 설치했다는 이른바 한사군(漢四郡) 중 낙랑군의 중심지가 있던 장소로 언급되고 있는 곳이 바로 이 지역 일대라는 것이 우연이기만 할까? 나아가 최근 이 만가진 북쪽 100㎞ 지점에서 한사군 중 하나인 '임둔(臨屯)'이란 글자를 새긴 봉니(封泥. 문서를 봉하던 진흙 도장)가 출토된 것도 우연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