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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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우리의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은 무엇을 가지고 논쟁하는가?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2. 17. 00:32

윤여동설 - 우리의 강단사학과 재야사학은 왜 우리 고대사에 대해 끝없는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일까? - 최초주장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

 

 

                                                           승덕시 봉추산

 

  

  지금 우리 역사의 상고사와 고대사에 대한 정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재야사학은 우리 고대사의 중심이 대륙이라 하고, 강단사학은 한반도라 한다.  

  그리하여 강단사학에서 우리 고대사에 대한 연구발표를 하면 재야사학은 그를 인정하지 않고 거침없이 반도식민사관이라 매도하고, 재야사학에서 우리 고대사에 대해 기존 역사 인식과 다른 새로운 주장을 하게 되면 강단사학은 노인네들이 역사소설을 쓰고 있다고 치부해 버린다.
  이들은 왜 같은 우리 역사를 연구하면서도 역사의 중심점을 보는 시각이 대륙과 한반도로 확연히 다르게 되었을까?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강단사학은 현재로부터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구방법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고,

  재야사학은 고대로부터 현재로 내려오는 연구방법을 채택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라 생각된다.
  즉 강단사학은 현재 우리가 한반도에 살고 있고, 조선 500년 간 한반도에서 살았음이 확실하므로 그 앞 왕조인 고려 역시 한반도에 존속했을 것이고, 그 앞 왕조인 삼국도 한반도에 존속했을 것이며, 그 앞 삼한, 고조선도 당연히 한반도를 중심으로 왕조가 이어졌을 것으로 보는 것인데, 비록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시대별 유물, 유적도 한반도에서 출토되고 있고,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고조선으로부터 삼국, 고려, 조선시대에 이르는 역사와 지리를 총 정리한 신증동국여지승람 등과 같은 확실한 기록도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재야사학은 현재 우리가 한반도에 살고 있다고 하여 우리 역사 모두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이어져 왔을 것으로 해석하는 그 자체가 잘못 되었다고 하며, 우리의 선조들은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매우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는 중국의 수많은 역사서들이 그를 확인시켜 주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선조들은 오랜 세월동안 중국과 국경을 접하고 대등한 관계, 또는 오히려 우월한 입장에 서서 때로는 강역을 빼앗기도 하고, 때로는 빼앗기기도 하며 역사를 이어왔으나 후대에 이르러 나라가 약해져 대륙의 땅을 잃어버리게 되어 우리의 강역이 한반도로 쪼그라들게 되었으나 지금이라도 잃어버린 옛 땅을 밝혀 언젠가는 그 땅을 수복해야하고 후세들에게도 그러한 사실을 잊지 않도록 교육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재야사학 중 일부는 중국의 현 지명과 옛 우리 역사 기록 속에 나타나는 지명이 같은 곳을 찾아 그곳에 우리의 역사기록을 대입시켜 지나치게 확대 해석함으로써 우리의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중국 대륙 거의 전부를 차지했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장안성이 나타나자 이를 보고는 중국의 장안(현 서안)이 곧 고구려의 장안성이었다고 역사를 해석하기도 하고, 백제가 중국의 동중국해 연안 거의 모두를 차지했다고 하기도 하며, 신라가 양자강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는 등 터무니없는 주장들을 계속하고 있다. 이는 신빙성이 전혀 없는 억지 주장으로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러면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는 어디 있었는데?" 라는 조롱을 받고 있다. 
  지금 중국의 지명들은 너무도 많은 변화를 겪어 중국의 역사학자들 조차도 그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렸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옛날에는 강단사학의 논리가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주장을 펼칠 수 있는 장(場)과 학생들을 교육시키는 기회가 마련되어 있었던 반면 재야사학이 자신의 주장을 펼칠 곳은 마땅치 않아 강단사학의 주장이 월등한 우세를 점했으나, 요즈음에는 국민들의 교육 수준이 향상되고 전파속도가 빠른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존재함으로써 재야사학의 주장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늘어나게 되어 의견교환이 활발해지고 또 서적 출판도 옛날에 비해 비교적 쉬워 두 주장이 팽팽하게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서로 한치도 물러날 기미는 없다.
  평생 역사연구라는 외길 인생을 살아온 이들이고, 자신의 연구성과 만이 우리 역사의 진실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이들이 부러질지언정 구부러질 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자 이 두 주장을 동시에 충족시켜보려고 대두된 설이 바로 낙랑군, 낙랑국 분리설이었다.
  낙랑군은 대륙에 있었고, 낙랑국은 한반도에 위치했다고 역사를 해석함으로써 아리송하기만 한 낙랑의 비밀을 풀어보려 시도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설은 그럴 듯 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강단사학이나 재야사학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는 이도 저도 아닌 어설픈 주장으로서 오히려 양측의 주장을 모두 충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는 말이다.
  
  앞서 원나라가 멸망하고 명나라가 건국된 후인 서기 1388년에 이르러 명나라가 철령 이북 땅이 원래 원나라 땅이었으므로 요동군에 예속시키겠다고 통고해 오고 철령위를 설치하자 고려의 우왕은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요동정벌을 명하게 되고, 당시 욱일승천하는 명나라와의 전쟁에 부담을 느낀 이성계는 위화도회군으로 고려의 정권을 잡은 후 결국 고려를 멸망시키고 1392년 7월에 이르러 왕위에 오르게 되고 국호를 조선이라 정하게 된다.

 

☆ 요동의 위치도 강단사학은 지금의 요하 동쪽이라 하고, 재야사학은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 한다.

 

 
  그런 다음 1394년 10월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기게 되는데, 지금 서울에는 조선 태조 이성계의 능으로부터 조선 마지막 왕인 순종의 능까지 현존하고 있고, 궁궐도 있고, 도읍을 둘러 싼 석성도 있어 조선이 지금의 서울에 도읍했던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것이다.

 

☆ 일부 사람들 중에는 조선마저도 대륙에서 500년 왕조를 이었다고 주장하며, 임진왜란이 중국 남쪽에서 일어났던 일이라 하기도 하니 그렇다면 명나라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런데 고려의 도읍 개경이 지금의 황해도 개성인가 하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일반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나 우리 역사를 조금이라도 깊이 연구해 본 사람이라면 "글쎄.............."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역사기록을 검토하다보면 고려의 도읍 개경이 꼭 한반도 황해도 개성을 말하는 것이라 단언할 수 없는 상황 속으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이 말은 고려로부터 그 이전의 옛 기록들이 너무도 이상해 고조선의 왕검성, 위만조선의 조선현 왕검성이 정말로 북한의 평양을 말하는지, 삼한, 삼국이 정말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존속했었는지, 고려까지도 정말로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확신할 수 없는 역사의 미궁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역사 상식대로 한반도를 중심으로 적당히 역사를 해석할 수도 있으나, 엄밀하게 따져 들어가게 되면 경주의 고총들이 정말로 삼국사기 기록 속 신라왕들의 능인지 확인되지 않고 있고, 백제의 500년 도읍이었다는 서울부근에서 백제왕릉이 한 곳도 발견되지 않고 오직 공주의 무령왕릉만이 확인되었고, 고조선으로부터 고구려 시대까지 각 왕조들이 도읍했다고 하는 북한 평양에도 단군들의 능이 확인되지 않고, 수많은 고구려왕릉들이 있어야 함에도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 북한 평양의 단군릉, 기자묘라고 하는 것들은 사실은 조선시대에 이르러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아마 옛 기록을 그 지역에 대입시켜 해석함으로써 옛 이름 모를 고총을 단군릉, 기자묘라 하게 되어 해마다 제사를 지내주었고, 개성 부근에 있다는 고려의 왕릉들이라고 하는 곳에서도 그곳이 실제 고려 어느 왕의 왕릉이라는 증거품이 발견된 적은 한번도 없었고, 왕릉이라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기만 하다.

     

 
  한반도 경주에 북방 유목문화의 흔적들이 너무도 많고, 백제 무령왕릉이 충남 공주에서 발견되었으며, 평양에 가짜 단군릉 한 기가 있는 것을 우리의 모든 역사와 연결시켜 고조선으로부터 삼한, 삼국, 고려, 조선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존재했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우리 강단사학의 역사해석 방법이었다.
  그런데 서긍의 고려도경은 고려가 등주, 내주, 빈주, 체주와 정확히 마주보는 곳에 위치했고, 한나라 낙랑군 땅에 위치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중국 사서들은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에 대해 한결같이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기존의 역사 해석에 따르자면 한반도 평양부근에 갈석산이 있어야 하고, 또 장성(만리장성)도 시작되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를 않자, 우리 역사가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는데 이들이 바로 재야사학인 것이다.
  이들은 옛 기록에 따라 지명을 비정해 역사를 해석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우리 역사 비밀의 열쇠와도 같은 한나라 때의 낙랑군의 위치가 한반도 평양이 아닌 북경 부근이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지금 진황도 창려에 갈석산이라는 산이 있고 진황도 산해관 노룡두에서 만리장성이 시작되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강단사학에서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라 한반도의 북한 평양 부근이 낙랑이었다고 하는 것이고, 재야사학에서는 중국 사서들의 기록에 따라 낙랑이 한반도가 아닌 만리장성이 시작되었고, 갈석산이 있는 북경 부근이라고 하니 일반 사람들로서는 어느 주장이 옳은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역사의 진실은 오직 하나 뿐일텐데 한쪽은 낙랑이 한반도에 있었다 하고, 다른 한쪽은 낙랑이 지금의 중국 땅에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재야사학과 강단사학 논쟁의 중심에는 바로 이 "낙랑"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고대사의 중심점을 보는 시각이 확연히 다르다보니 우리 역사 해석과 관련된 모든 사항이 대륙과 한반도로 다를 수밖에 없어 사사건건 주장이 충돌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역사의 화두는 결국 이 "낙랑"을 바로 찾는 것이라는 말이고, 그들은 지금 낙랑의 위치를 놓고 "대륙이다" "아니다 한반도다" 하면서 논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낙랑군의 위치를 중국 사서들의 기록에 따라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된 북경 부근으로 비정하게 되면 우리의 고조선, 위만조선, 삼한, 삼국, 고려까지의 중심 강역이 한반도가 아닌 대륙이어야 마땅하므로 재야사학은 우리 역사의 중심 강역이 한반도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고,
  강단사학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한반도 평양을 낙랑이라 했으므로 당연히 북한 평양 부근에 낙랑군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며, 고조선으로부터 삼한, 삼국을 지나 고려, 조선까지의 역사가 한반도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어느 주장이 우리 역사의 진실인 것일까?
  필자가 보기에는 강단사학이 아무리 발버둥 쳐도 결국 우리 역사 진실찾기의 최종 승자는 재야사학일 수밖에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 역사의 중심은 대륙이었고, 조선이 도읍을 한양으로 옮긴 때부터 한반도가 역사의 중심이 되었을테니까..........
  그것이 우리 역사의 진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