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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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한반도에 한(韓)이 없었다고라?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2. 18. 04:14

윤여동설 - 한반도(韓半島)에 한(韓)이 없었다고라? - 최초주장

 

 

 

 

 

 

 

 

 

 

 

 

  우리는 지금 역사적으로 한반도의 남부에 "한(韓)"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인식하고 "한반도(韓半島)"라고 부른다.
  그러나 한반도에 한(韓)은 없었다.
  마한(馬韓)도 없었고, 진한(辰韓)도 없었고, 변한(弁韓) 역시 한반도에는 없었다.
  경기, 서울, 충청, 전라도는 마한이 아니었고, 경상북도는 진한이 아니었으며, 경상남도는 변한이 아니었다.
  한은 방 4천리에 이르는 넓은 강역을 가진 나라였고, 마한에는 무려 54국에 이르는 소국이 있었고, 진한은 12소국, 변한도 12소국으로 이루어진 나라였다.
  한왕은 사실 왕이 아니라 78개 제후국을 다스리는 황제였다. 
  아래 글은 중국 사서들이 말하는 한(韓)에 대한 기록이다.
  필자는 방 4천리에 이르는 대국인 한(韓)이 한반도 남쪽 조그마한 땅에 있을 수 없으며, 한(韓)은 반도가 아닌 넓은 대륙에 위치했고, 도읍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풍윤 일원이었던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풍윤이 바로 한의 도읍 월지국(목지국이라고도 한다)이었고, 지금의 북경부근이 고대의 요동이었다.

  낙양 동북 3,600리에 위치했다는 고대의 요동을 말하는 것이다.

  [필자주 : 고대의 10리는 지금의 2.3km에 해당한다고 하는데 낙양에서 북경까지의 고속도로 거리가 약 800km이다]] 

  
  여러분들도 지금까지 자신이 알고 있는 우리 역사에 대한 고정관념을 모두 버리고, 아래 기록을 읽어본 후 지도를 펴서 과연 우리의 삼한이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그 위치를 직접 비정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한을 하북성 당산 부근, 진한을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 변한(변진)을 요녕성 호로도, 흥성, 수중 부근으로 비정하고 읽어보신다면 삼한 주변의 대방, 부여, 말갈, 낙랑, 옥저, 예(동예), 왜의 위치도 쉽게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고, 우리의 역사가 얼마나 잘못 해석되고 있는지를 실감하시게 되어,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를 수십 번은 되뇌이게 될 것입니다.


        후한서 한전(後漢書 韓傳)

 

 

  한은 삼종(三種)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馬韓)이요, 둘째는 진한(辰韓)이며, 셋째는 변진(弁辰)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 있고, 그 북쪽은 낙랑(樂浪), 남쪽은 왜(倭)와 접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 있으며, 그 북쪽은 예(濊)맥(貊)과 접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 있으며, 그 남쪽은 왜(倭)와 접했다.
  모두 78국이며 백제(伯濟 : 百濟)는 그 중의 한 개 나라이다.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가인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한다.
  그 땅을 합하면 사방 4천여 리이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하는데 모두 옛 진국이었다.
  마한이 가장 커서 그 종족들이 공동으로 왕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아 목지국(目支國: 삼국지에는 월지국이라고도 했다)에 도읍하여 모든 삼한 땅의 왕으로 군림하는데, 여러 나라 왕의 선조는 모두 마한 종족이다.
  마한 사람들은 농사와 양잠을 할 줄 알고, 비단과 베를 짤 수 있다.
  크기가 배만큼 큰 밤이 산출되고, 장미계(長尾鷄: 꼬리가 긴 닭)가 있는데, 꼬리의 길이가 5척이다.
  읍락이 섞여 있고, 성곽은 없다.  
  토실은 그 모양이 마치 무덤 같은데, 출입하는 문은 위에 있다.
  어른과 아이, 남녀를 불문하고 궤배(엎드려 절하는 것)할 줄을 모른다.
  금은보화·비단·모직물 등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소와 말을 탈 줄 모른다.
  오직 구슬을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걸기도 한다.
  그들은 대체로 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 놓으며,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힘이 세고 용감하다.
  젊은이들 중 집 짓는데서 일하는 사람은 가죽끈을 몸에 묶고, 큰 나무를 매달고 소리를 치는데 건장하다고 한다.     
  해마다 5월에는 밭에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자리를 베풀고 무리 지어 노래부르고 춤춘다.
  춤을 출 때는 수십 명이 줄을 서서 땅을 밟는데 절도가 있다.
  10월에 추수를 끝내면 다시 이와 같이 한다.
  여러 국읍에는 각각 한 사람이 천신에 대한 제사를 지내는데,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소도를 세워 그곳에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그 남쪽 경계는 왜(倭)에 가까우므로 문신한 사람이 있다. 
  진한은 그 나라의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 나라 사람들이 고역을 피하여 한(韓)으로 도망하여 오자 마한이 그 동쪽 땅을 분할하여 주었다고 한다.
  그들은 나라를 방(邦)이라 하고, 활을 고(孤)라 하며, 도둑을 구(寇)라 하고,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 하며, 서로를 부를 때 도(徒)라 하는데, 진나라 말과 비슷하기 때문에 혹은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성책과 가옥이 있다.
  모든 작은 읍에는 각각 거수가 있으니 강대한 자를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을 검측(儉側), 그 다음을 번지(樊祗), 그 다음을 살해(殺奚), 그 다음을 읍차(邑借)라 한다.
  토질이 비옥하여 오곡이 잘 되며, 양잠을 하여 비단과 베를 짤 줄 안다. 
  소나 말을 타고 다니며, 혼인은 예의에 맞게 하며, 길을 다닐 때는 길을 양보한다.
  그 나라에는 철(鐵)이 생산되는데, 예(濊), 왜(倭), 마한(馬韓)이 모두 와서 사 간다.
  모든 무역에 있어 철을 화폐로 사용한다.
  그들의 풍속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고, 비파 연주하기를 좋아한다.
  아이를 낳으면 머리가 납작하게 되도록 하려고 모두 돌로 눌러 놓는다.
  변진은 진한 사람들과 섞여 사는데, 성곽과 의복은 모두 같으나 언어와 풍속은 다르다.
  변진 사람들의 모습은 모두 신체가 장대하고, 머리칼이 아름다우며, 의복은 깨끗하다.
  형법은 엄하다.
  변진은 왜국과의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문신(文身)한 사람이 상당수 있다.

  옛날 조선왕 준(準)이 위만에게 패하여 자신의 남은 무리 수천인을 거느리고 바다로 도망하여 마한을 공격하여 쳐부수고 스스로 한왕(韓王)이 되었다.  
  준의 후손이 멸절되자 마한 사람이 다시 자립하여 진왕(辰王)이 되었다.
  건무 20년(A.D.44) 한(韓)의 염사 사람 소마시 등이 낙랑에 와서 공물을 바쳤다.
  광무제는 소마시를 봉하여 한(漢)의 염사읍군으로 삼아 낙랑군에 소속시키고, 철마다 조알하도록 하였다.
  영제 말년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해져 군현에서 통제할 수 없어 난리에 고통스러운 백성들이 한(韓)으로 도망쳐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마한의 서쪽 바다 섬 가운데 주호국(州胡國)이 있다.
  그 나라 사람들은 키가 작고, 머리를 깎으며, 가죽옷을 입는데, 상의만 입고 하의는 입지 않는다.
  소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하며, 배를 타고 왕래하면서 한(韓)에서 물건을 사고 판다.
 

삼국지 한전(三國志 韓傳)

 

  한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했고, 남쪽은 왜(倭)와 접했다. 땅이 방 4천리이다.
  삼종(三種)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이요, 둘째는 진한이며, 셋째는 변한인데, 진한은 옛 진국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고, 그 백성들은 농사를 지어 씨뿌려 가꾸고, 양잠을 하여 비단과 베를 짤 줄 안다.
  각각 장수(長帥: 渠帥)가 있어, 나라가 크면 스스로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을 읍차(邑借)라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사는데, 성곽이 없다.
  원양국(爰襄國), 모수국(牟水國), 상외국(桑外國), 소석색국(小石索國), 대석색국(大石索國), 우휴모탁국(優休牟 國), 신분고국(臣 沽國), 백제국(伯濟國: 百濟國),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일화국(日華國), 고탄자국(古誕者國), 고리국(古離國), 노람국(怒藍國), 월지국(月支國),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소위건국(素謂乾國), 고원국(古爰國), 막로국(莫盧國), 비리국(卑離國), 점리비국(占離卑國), 신흔국(臣 國), 지침국(支侵國), 구로국(狗盧國), 비미국(卑彌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고포국(古蒲國), 치리국국(致利鞠國), 염로국( 路國), 아림국(兒林國), 사로국(駟盧國), 내비리국(內卑離國), 감해국(感奚國), 만로국(萬盧國), 벽비리국( 卑離國),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일리국(一離國), 불미국(不彌國), 지반국(支半國), 구소국(狗素國), 첩로국(捷盧國),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신소도국(新蘇塗國), 점랍국(占臘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신운신국(臣雲新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일난국(一難國), 구해국(狗奚國), 불운국(不雲國), 불사분사국(不斯 邪國), 원지국(爰池國), 건마국(乾馬國), 초리국(楚離國) 등 모두 50여 국이 있다.
  큰 나라는 1만여 가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총 10여만 호이다.
  진왕의 치소는 월지국(月支國)이다.
  신지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호칭인 신운견지보(臣雲遣支報), 안사숙지(安邪 支), 분신리아불예( 臣離兒不例), 구사진지염(狗邪秦支廉)의 호칭을 더하기도 한다.
 그들의 관직에는 위솔선(魏率善)·읍군(邑君)·귀의후(歸義侯)·중랑장(中郞將)·도위(都尉)·백장(伯長)이 있다.
  (조선)후 준이 왕을 참칭하다가 연(燕)나라에서 망명한 위만(衛滿)의 공격을 받아 나라를 빼앗기고, 그의 좌우 근신과 궁인들을 이끌고 도망하여 바다를 건너 한(韓)의 땅에 살면서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칭하였다.
  그 후 그의 후손은 멸절 되었으나 지금 한인 중에는 아직 그의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있다.
  한(漢) 나라 때에는 낙랑군에 소속되어 철마다 조알하였다. 
  (후한)환제와 영제 말기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군·현에서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여 군·현의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흘러 들어가자 건안(A.D.196∼220)중에 공손강(公孫康)이 둔유현 남쪽의 황무지를 나누어 대방군(帶方郡)으로 만들고, 공손모·장창 등을 보내 유민을 불러모으고, 군대를 일으켜 한(韓)과 예(濊)를 정벌하자 옛 백성들이 점점 돌아왔고 그 후 왜(倭)와 한(韓)이 드디어 대방에 속하게 되었다.
  경초(A.D.237∼239) 중에 명제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두 군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여러 한국의 신지에게는 읍군의 인수(印綬)를 더해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을 주었다.
  풍속은 의책을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들도 군에 가서 조알 할 적에는 모두 의책을 빌려 입으며, 자신의 인수를 차고 의책을 착용하는 사람이 1천여 명이나 된다.
  부종사 오림은 낙랑(樂浪)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었다는 이유로 진한의 여덟 나라를 분할하여 낙랑에 편입시키려 하였는데, 그때 통역하는 사람이 말을 잘못 전하여 신지와 한인들이 모두 화가 나서 대방군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
  이때 태수 궁준과 낙랑태수 유무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준은 전사했으나 두 군은 마침내 한(韓)을 멸망시켰다.     
  그 풍속은 기강이 없는데, 비록 여러 나라의 도읍에 주수(主帥)가 있으나 읍락에 섞여 살기 때문에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
  궤배( 拜)하는 예 또한 없다.
  거처는 토실을 만들어 사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 같으며, 출입문은 위로 나 있다. 온 집안 식구가 그 속에 함께 살며 장유와 남녀의 분별이 없다.
  그들의 장례에는 관은 있으나 곽은 사용하지 않는다.
  소나 말을 탈줄 모르기 때문에 소나 말은 모두 장례용으로 사용해 버린다.
  구슬을 귀하게 여겨 꿰매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하는데, 금·은이나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그 사람들의 성질은 굳세고 용감하다.
  머리칼을 틀어 묶고 상투를 들어내는데, 마치 예리한 무기와 같다.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발에는 가죽신을 신고 다닌다.     
  그 나라에서 집을 짓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되면 용감하고 건장한 젊은이들은 모두 가죽끈을 몸에 묶고, 밧줄로 한발쯤 되는 큰 나무를 매달고 하루 종일 소리를 치며 일을 하는데, 아프게 여기지 않는다.
  그렇게 작업하기를 권장하며 또 이를 건장하다고 여긴다.
  해마다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무리 지어 모여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는데, 밤낮을 쉬지 않는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모두 일어나 뒤를 따라가며 땅을 밟고, 구부렸다 일어났다 하면서 손과 발로 서로 장단을 맞추는데, 그 가락과 율동은 탁무(鐸舞)와 비슷하다. 10월에 추수를 한 다음에도 이와 같이 한다.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에 각각 한 사람씩을 세워서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하는데, 이를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여러 나라에는 각각 별읍이 있으니 그것을 소도(蘇塗)라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그 지역으로 들어온 사람은 누구라도 잡아가지 못하므로 도둑질하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들이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와 같다고 할 수 있으나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 점은 다르다고 할 수 있다.
  그 나라 북방의 군과 가까운 여러 나라는 예절과 풍속이 있지만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은 흡사 죄수와 노비가 모여 사는 곳과 같다.
  진기한 보물은 산출되지 않고, 동물과 초목은 대략 중국과 동일하다.
  큰 밤이 나는데 그 크기가 배만큼 크다.
  또 세미계(細尾鷄)가 있는데, 꼬리의 길이가 5자 남짓 된다.
  그 지방 남자들은 간혹 문신을 한 사람도 있다.
  또 주호(州胡)가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의 큰 섬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대체로 키가 작고 말도 한(韓)과 같지 않다. 
  모두 선비족처럼 머리를 삭발하였으며 옷은 오직 가죽으로 해 입고, 소나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옷을 상의만 입고, 하의는 없기 때문에 거의 나체와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에서 물건을 사고 판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다.
  노인들이 대대로 전해오는 말이라고 하면서 말하기를 "옛날 진(秦)나라 사람들이 고역을 피하여 한국으로 도망하여 오자 마한이 그 동쪽 땅을 분할하여 주었다" 고 하였다.
  그곳에는 성책이 있다.
  그들의 말은 마한과 달라서 나라를 방(邦)이라 하고, 활을 호(弧)라 하며, 도둑을 구(寇)라 하고,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 한다. 서로를 부를 때는 도(徒)라 하는 것이 진나라 사람들과 비슷하나 연나라·제나라의 말은 아니다.
  낙랑 사람들을 아잔(阿殘)이라고도 한다.
  이는 동방 사람들이 자기를 아(阿)라고 하는데, 낙랑 사람들 중에 본래 그 곳에 남아 있던 사람이라는 뜻일 것이다.             
  지금도 진한(秦韓)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처음에 여섯 나라였으나, 점점 열 두 나라로 나뉘어졌다.
  변진도 열두 나라이다.
  또 여러 작은 별읍이 있어서 각각 거수가 있다.
  세력이 큰 사람을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을 험측(險側)이라 하며, 그 다음을 번예(樊濊), 다음을 살해(殺奚), 다음을 읍차(邑借)라 한다.
  이저국(已 國), 불사국(不斯國), 변진미리미동국(弁辰彌離彌凍國), 변진접도국(弁辰接塗國), 근기국(勤耆國), 난미리미동국(難彌離彌凍國), 변진고자미동국(弁辰古資彌凍國), 변진고순시국(弁辰古淳是國), 염해국( 奚國), 변진반로국(弁辰半路國), 변진낙노국(弁辰樂奴國), 군미국(軍彌國), 변진미오사마국(弁辰彌烏邪馬國), 여담국(如湛國), 변진감로국(弁辰甘路國), 호로국(戶路國), 주선국(州鮮國), 마연국(馬延國), 변진구사국(弁辰狗邪國),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 변진안사국(弁辰安邪國), 변진독로국(弁辰瀆盧國), 사로국(斯盧國), 우유국(優由國)이 있는데, 변한과 진한을 합하여 24국이다. 
  큰 나라는 4∼5천가이고, 작은 나라는 6∼7백가로서 총 4∼5만 호이다.
  열두 나라가 진왕(辰王)에게 신속(臣屬)되어 있다.
  진한의 왕은 항상 마한 사람이 세워주어 대대로 세습하였으며, 진한이 자립하여 스스로 왕이 되지는 못하였다.
  토지는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적합하다.
  양잠을 하여 비단과 베를 짤 줄 알고, 소와 말을 탈 줄 알았다.
  혼인하는 예법은 남녀의 분별이 있었다.
  장사를 지낼 때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새처럼 날아다니라는 뜻이다.
  그 나라에서는 철(鐵)이 생산되는데, 한(韓)·예(濊)·왜인(倭人)들이 모두 와서 사 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쇠)로 이루어지는데, 마치 중국에서 돈을 사용하는 것과 같으며, 또 두 군(낙랑과 대방)에도 공급하였다.
  풍습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 마시기를 좋아한다.
  비파가 있는데, 그 모양이 축과 비슷하고 연주하는 음곡도 있다.
  어린애를 낳으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서 납작하게 만들기 때문에 지금 진한 사람들의 머리는 납작하다.
  왜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문신을 한 남녀가 있기도 한다.
  보병전을 잘하며, 병장기는 마한과 같다.
  그들의 풍속에는 길에서 사람을 만나면 서로가 길을 양보한다.
  변진은 진한 사람들과 섞여 살며 성곽도 있다.
  의복과 주택은 진한과 같다.
  언어와 습속이 서로 비슷하지만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방식은 달라서 문의 서쪽에 모두 귀신을 모신다.
  그 중 독로국(瀆盧國)은 왜(倭)와 국경을 접하고 있다.
  열두 나라에 왕이 있으며, 체구는 모두 장대하다.
  의복은 청결하며, 장발로 다닌다.
  또 광폭의 가는 베를 짜기도 한다.
  법규와 풍속은 특히 준엄하다.

 

진서 동이전(晉書 東夷傳)

 
 
  마한(馬韓)
  한의 종류에는 셋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한계로 하였다. 
  마한은 산과 바다 사이에 있는데, 성곽이 없다.
  모두 56개의 작은 나라가 있는데, 큰 나라는 1만 호,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각각 거수가 있다.
  마한의 풍습은 기강이 낮아 궤배하는 예가 없다.
  땅을 파고 움집을 만들어 거처하는데, 그 모양은 마치 무덤 같으며, 출입문은 위쪽으로 나 있다.
  온 가족이 그 속에 함께 살기 때문에 어른과 아이, 남자와 여자의 분별이 없다.
  소나 말을 탈줄 모르기 때문에 가축을 기르는 것은 다만 장사지내는데 쓰기 위함이다.
  풍속에는 금·은·비단·모직물 따위를 귀중하게 여기지 않고, 구슬을 귀중하게 여겨 꿰어 매달기도 하고, 또는 머리를 장식하거나 귀에 달기도 한다.
  남자들은 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 놓으며,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성격은 용감하고 굳세다.
  나라에 부역이 있거나 성이나 성황당을 수축할 적에 용감하고 건강한 젊은이는 모두 가죽끈을 몸에 묶고, 큰 나무를 매달고 하루 종일 소리를 치며 일을 하는데, 힘들게 여기지 않는다.
  활·방패·창·큰 방패를 잘 쓰며, 비록 남과 다투거나 전쟁을 할 때라도 굴복한 상대를 서로 귀하게 여긴다.
  풍습은 귀신을 섬겨 해마다 5월에 씨뿌리는 작업을 마친 뒤에 무리 지어 노래하고 춤추는 것으로써 신에게 제사 지낸다. 10월에 이르러 추수를 마친 뒤에도 역시 그렇게 한다.
  국읍에는 각각 한사람을 세워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재하게 하는데, 그를 천군(天君)이라 부른다.
  또 별읍을 설치하여 그 이름을 소도(蘇塗)라 하는데,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는다.
  소도의 의미는 서역의 부도(浮屠)와 비슷한데, 그 행하는 바의 좋고 나쁜 점은 차이가 있다.
  (서진의) 무제 태강 원년(A.D.280)과 2년(A.D.281)에 그들의 임금이 자주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조공하였고,
  태강 7년(A.D.286), 8년(A.D.287), 10년(A.D.289)에도 자주 왔다.
  태희 원년(A.D.290)에는 동이교위 하감에게 와서 조공을 바쳤다.
  함녕 3년(A.D.277)에 다시 왔는데 그 다음해에는 다시 내부하기를 청하였다.
    
  진한(辰韓)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 때 고역을 피하여 사람들이 도망하여 한(韓)으로 오자 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분할하여 주어 그들을 살게 해주었다고 한다.
  성책을 세웠고, 언어는 진(秦)나라 말과 비슷한데, 이로 인하여 혹은 진한(秦韓)이라고도 했다.
  처음에는 여섯 나라였는데, 후에 점점 나뉘어 열두 나라가 되었다. 

 

  또 변진(弁辰)이 있는데, 역시 열두 나라로서 합하여 4∼5만 호이며, 각각 거수가 있고, 모두 진한에 속했다.

  진한의 왕은 항상 마한 사람이 세워 주어 대대로 계승하지만 스스로 왕이 될 수는 없었다.
  그들이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온 사람이 분명하기 때문에 마한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토질은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당하며, 양잠이 성행하고 비단을 잘 짜며 소도 부리고 말도 탄다.
  그 풍속은 마한과 유사하며 병기 역시 마한과 같다.
  어린애가 태어나면 곧 돌로 그 머리를 눌러 납작하게 만든다.
  춤추기를 좋아하고, 비파 연주를 잘하는데, 비파의 모양은 축과 비슷하다.
  서진(西晉) 무제 태강 원년(A.D.280)에 왕이 사신을 보내 지방특산물을 바쳤다.
  태강 2년(A.D.281)에 다시 와서 조공하였으며,
  태강 7년(A.D.286)에도 또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