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 대륙문명과 반도문명의 조화를 이루다
고려와 조선역사의 특급비밀(윤여동 지음, 이엘씨미디어) 참조
세종대왕은 서기 1397년(태조 6년) 4월 한양 준수방 잠저에서 정안대군 이방원의
장자인 제(양녕대군), 차자인 보(효령대군)에 이어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도이고, 자는 원정(元正)이다.
어머니는 민제의 딸 민씨로서 정안대군(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원경왕후로 봉해졌다.
도는 1408년(태종 8년) 충녕군에 봉해졌다가 1412년 충녕대군으로 진봉되었고, 1418년 6월 세자로 책봉되었다가 같은 해 8월 아버지인 태종(이방원)으로부터 선위 받아 조선 4대 왕위에 올랐고, 재위 32년인 1450년에 죽었다.
앞서 그의 할아버지인 이성계(조선 태조)가 1388년에 위화도회군을 감행하여 고려의 우왕, 창왕을 제거하고 고려를 멸망시킨 후 1392년 7월에 조선을 개국하고 왕위에 올라 둘째 부인이었던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게 된다.
그리고는 1394년 10월에 이르러 개경으로부터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는데, 이때 정안대군 이방원의 장자인 제는 1394년에, 차자인 보는 1396년에, 셋째인 도는 1397년에 태어나게 된다.
세월이 흘러 태조비인 신덕왕후 강씨가 1396년에 죽고 1398년 8월에 이르러 태조가 병상에 누워 있는 틈을 이용해 정안대군 방원을 비롯한 이성계의 첫 부인이었던 신의왕후(추증) 한씨 소생의 형제들이 힘을 합쳐 이복형제로서 세자에 책봉되어 있던 방석과 그의 동복형인 방번 그리고 정도전, 남은 등을 제거해 버리는데, 이를 제1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병석에 누워 있던 이성계는 이러한 사실을 뒤늦게 알고 상심하여 다음 달인 1398년 9월에 둘째 아들인 방과에게 왕위를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게 되는데 이때 왕위를 물려받은 방과가 조선 제2대 왕인 정종이다.
정종은 왕위에 오르자 한양의 지세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는 1399년 도읍을 개성으로 옮기게 되고, 1400년 정월에 다시 방간이 난을 일으켰다가 방원에게 제압 당하게 되는데 이를 제2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제2차 왕자의 난이 방원의 승리로 마무리되자 정종 방과는 다음 달인 2월에 동생인 방원을 세제로 봉했다가 11월에 이르러 왕위를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고, 태조 이성계는 태상왕이 된다.
[조선 태조 이성계 가계도]
태조 이성계
신의왕후 한씨(추증) 신덕왕후 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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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안대군 정종 익안대군 회안대군 태종 덕안대군 무안대군 의안대군
(방우) (방과) (방의) (방간) (방원) (방연) (방번) (방석)
방원은 형인 방과로부터 1400년 11월 왕위를 선위받아 개성에서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 방원의 나이 34세였고, 이가 곧 조선 3대 임금인 태종이다.
태종은 왕위에 오르자 1404년 9월에 도읍을 개성에서 다시 한양(현 서울)으로 되옮기게 되고, 당시 11세였던 장자 제(양녕대군)를 세자로 봉하게 된다.
그런데 세자인 제가 궁중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하자 태종은 장자인 제가 세자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하고는 1418년에 이르러 그를 폐세자 시키고, 셋째 아들인 충녕대군 도를 세자로 책봉하게 되고, 그 두 달 뒤 왕위를 선위하고 상왕으로 물러앉게 되는데, 이때 왕위에 오른 도가 곧 조선 4대 임금 세종대왕이고, 당시 22세였다.
[세종 가계도]
세종 = 소헌왕후 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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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세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향) (유) (용) (구) (여) (유) (임) (염)
☆ 이외에도 영빈강씨, 신빈김씨, 혜빈양씨, 숙원이씨 등이 있다.
세종이 1418년에 왕위에 오르기는 했으나 이때는 아버지인 상왕 태종이 살아 있던 관계로 세종이 스스로 능력을 발휘할 수 없었으나 태종이 1422년 56세의 나이로 죽자 세종의 진가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할아버지 태조 이성계가 조선왕조의 터를 닦았고, 그 아버지 태종 이방원이 주춧돌을 놓았다면 세종은 그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웠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그는 대마도 정벌, 4군6진 개척, 한글 창제, 천문관측기구인 혼천의 제작, 해시계와 물시계 제작, 음악의 정리, 농사서 편찬 등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업적을 이루었다.
그런데 아주 먼 옛날부터 백성들은 농사를 짓고 살았으니 당연히 농사서가 있었을 것이고, 삼국시대에도 천문을 관측했으니 천문관측기구가 있었을 것인데, 왜 이때에 이르러 세종은 새로운 농사서를 만들고 새로운 천문관측 기구를 만드는지 의아하다.
세종대왕의 가장 탁월한 업적은 한글창제라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세종대왕은 왜 하필 이때에 이르러 한글을 새로 만들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
훈민정음 서문에서 말하고 있듯이 조선초기에 백성들이 말과 글이 달라 제 뜻을 글로 나타내기 어려웠다면 옛 고조선 때도 그랬을 것이고, 삼한 때도 그랬을 것이며, 신라, 백제, 고구려의 삼국시대 때도 마찬가지로 불편했을 것이고, 고려시대 때도 마찬가지였을 것인데, 그때는 불편한 것을 모르다가 왜 하필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서야 불편을 느끼게 되었을까?
☆ 고조선 때도 녹도문자라는 것이 있었다 하고, 신라 시대에도 이두를 만들어 사용했었다고는 한다.
또한 천문관측 기구인 혼천의 제작도 그렇다.
삼국사기를 보면 삼국은 아주 먼 옛날부터 일식을 관측할 수 있었고, 별자리의 움직임도 정확히 관측하고 있었으며, 고려 때는 훨씬 발전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조선시대 이전에도 천문관측기구가 있었을 것이고, 고려시대에는 이미 일식이 발생할 시간까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면 조선 세종 이전에도 이미 정확한 천체관측기구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농사서 편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민족이 농사를 짓고 살았던 것은 이미 수천 년 전의 일이므로 백성들은 농사에 관한 한 박사나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농사서도 이미 편찬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종은 농사직설이라는 농사서를 편찬하게 하는데 저자인 정초는 왜 서문에 "풍토가 다르면 농사법도 달라야 한다" 고 썼을까?
이에는 지금까지 우리가 알지 못했던 비밀이 있었다.
우리는 지금 누구나 고려가 한반도의 황해도 개성을 도읍으로 하고 오백년 왕조를 존속했다고 알고 있으나,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역사적 사실일 수 있는 것일까?
개성에 있다는 고려 태조 왕건의 능이라는 것이 진짜 그의 능이고, 다른 고려 왕릉들도 진짜이고, 개성에 있다는 선죽교에서 정말로 고려 충신 정몽주가 죽었을까?
송나라의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절강성 영파에서 출발해 고려에 사신 일행으로 갈 때 황하구를 지나 고려 예성항에 도착했다고 하고, 고려가 등주, 내주, 빈주, 체주와 정확히 마주보는 곳에 위치했다고 기록했고, 수서나 당서에는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백제는 신라의 서쪽에 위치했던 나라였고, 고구려는 신라, 백제의 북쪽에 위치했던 나라였으며, 고려는 바로 그 신라, 백제, 고구려 땅을 차지하고 건국된 나라였다.
그런데 사기에는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는데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 기록하고 있고, 진서에는 "낙랑군 수성현은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시작된 곳" 이라 기록하고 있으며, 통전에는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만리장성은 한반도 평양 부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 산해관 노룡두에서 시작되었고, 갈석산 역시 진황도 창려에 있는 산이다.
이는 곧 한나라 때의 낙랑군이 지금 북한의 평양 부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된 지금의 진황도 부근에 위치했었다는 말로써, 우리의 신라가 바로 그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고, 고려 태조 왕건 역시 자신의 딸을 낙랑공주라고 불렀다.
이는 고려 역시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했다는 의미로서 고려가 한반도 개성에 도읍했던 것이 아니라 대륙의 진황도 부근에 위치했었다는 말이 된다.
☆ 지금 중국 하북성 난하 중류 반가구수고 동북쪽 승덕시 관성현이 고려의 도읍 개경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그런데 조선 태조 이성계는 1392년 7월 조선을 건국한 후 1394년 10월에 개경으로부터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지금 한반도 서울에는 조선시대의 성곽, 궁궐이 있고, 서울 부근에는 태조 이성계의 능으로부터 조선왕릉들이 즐비하다.
이 말은 곧 이때 조선은 한반도 황해도의 개성에서 서울로 도읍을 옮겼던 것이 아니라 대륙의 개경에서 한반도의 한양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시대에 이르러서야 세종대왕이 말과 글이 다르다고 말하는 이유를 알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때 조선은 대륙에서 한반도로 도읍을 옮긴 상태였고, 한반도의 백성들은 대륙에서 건너온 통치세력들이 대륙에서 쓰던 말과 다른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리하여 고조선으로부터 고려 때까지는 불편한 것을 모르고 살았는데, 한반도로 도읍을 이전하고 보니 한반도의 백성들이 말과 글이 달라 매우 불편해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종대왕은 한반도 백성들이 쓰는 말을 그대로 표현할 문자를 만들려고 했던 것인데, 최만리가 한글 창제를 반대했던 것은 그가 대륙에서 건너 온 통치세력이었기 때문에 한글 창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세종대왕은 한반도 백성들이 말하고 쓸 수 있는 글자가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집현전 학자들과 함께 결국 새로운 글자를 만들어 내었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이었다.
세종대왕은 자신이 불편해 한글을 만들었던 것이 아니라 한반도 백성들을 위해 글자를 만들고,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라는 의미로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명명했던 것이다.
☆ 세종대왕은 대륙에서 태어나 자란 그 아버지 태종과 그 할아버지 태조와 달리 한반도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궁중에서 쓰는 말과 한반도의 일반백성들이 쓰는 토착어를 함께 익혔을 것이다.
그리고 농사서 역시 대륙에서 가져온 농사서는 한반도 실정에는 맞지 않았을 것이다. 재배할 수 있는 종류와 재배법 등이 대륙과는 달랐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새로운 농사서를 편찬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천체관측 기구를 새로 만들고, 해시계, 물시계를 새로 만들어야 했던 것도 조선이 대륙에서 한반도로 도읍을 옮겨왔기 때문에 대륙에서 쓰던 천체관측 자료와 오차가 생겨 정확히 일치하지 않자 새로운 천체관측 기구를 만들어 새롭게 관측하기 시작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세종은 박연으로 하여금 음악도 정리하게 했는데, 이 역시 대륙의 음악과 한반도 백성들이 부르고 즐기는 음악이 달랐기 때문에 한반도 음악과 대륙의 음악을 접목시킬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할아버지 태조는 새로운 나라 조선을 개국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세세한 곳까지 신경 쓸 수 없었고, 그 아버지 태종 역시 왕권의 안정을 기하기 위해 다른 곳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런데 세종 때에 이르러 왕권이 안정되자 대륙의 문명과 한반도의 문명을 접목시키는 작업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