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중국 사서들이 말해주는 고구려의 중심 강역은 과연 어디인가? - 최초주장
후한서 고구려전(後漢書 高句麗傳)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1천리에 있다.[필자주 :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북경을 말하는 것이다]
남쪽은 조선과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접했다.
땅이 사방 2천리이다.
큰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으며 사람들은 산골짜기에 산다.
농사지을 밭이 적어 힘들여 농사를 지어도 자급하기에 부족하므로 습속에 음식을 아끼나 궁실은 잘 짓는다.
동이들이 서로 전해오기를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그런 이유로 말하는 법이 같은 데가 많다.
무릎을 꿇고 절을 할 때 한쪽 다리는 펴고, 걷는 것이 달리듯 빠르다.
다섯 부족이 있는데, 소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이다.
본래는 소노부에서 왕이 되었으나 점점 미약해진 뒤에는 계루부에서 왕위를 대신하였다.
그 관리의 계급에는 상·가·대로·패자·고추대가·주부·우태·사자·조의·선인이 있다.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현으로 만들어 현토에 속하게 하였으며, 북과 나팔과 악공을 하사하였다.
그 풍속은 미신을 믿고, 모두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밤에는 남녀가 무리 지어 노래 부르며 즐긴다.
귀신·사직·영성에 제사지내기를 좋아하며, 10월에 제천(하늘에 제사지내는 것)하는 큰 모임이 있는데 동맹(東盟)이라 한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어 그를 수신( 神)이라 하는데, 역시 10월에 제사지낸다.
공공모임에는 수놓은 비단옷을 입고 금과 은으로 스스로 치장한다.
대가와 주부는 모두 책( )을 쓰는데, 중국의 관책과 같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것이 없다. 소가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모양이 고깔과 같다.
감옥이 없고, 죄인이 있으면 여러 가(加)들이 모여 평의하여 곧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잡아들여 노비로 삼는다.
혼인은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살다가 자식을 낳아 장성한 뒤에야 남자의 집으로 돌아온다.
혼인 후 곧 장례에 쓸 물건을 서서히 준비한다.
금·은과 재물을 모두 써서 장례를 후하게 치르며,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주변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그 나라 사람들의 성격은 흉포하고 조급하며, 힘이 세고 전투를 잘하고 노략질하기를 좋아하여 옥저와 동예를 모두 복속시켰다.
구려(句驪)
구려는 일명 맥(貊)이라 한다.
별종으로서 소수(小水:소요수)에 의지하여 살기 때문에 소수맥(小水貊)이라 한다.
좋은 활이 생산되는데 소위 맥궁(貊弓)이라 한다.
왕망 초에 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흉노를 정벌하게 하였으나 그들이 가지 않으려 해 강압적으로 보냈더니 모두 국경너머로 도망한 뒤 중국의 군·현을 노략질하였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전사하자 왕망이 장수 엄우로 하여금 치게 하였다. 엄우는 구려후 추를 유인하여 국경 안으로 들어오게 한 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에 보냈다.
왕망은 매우 기뻐하면서 고구려왕의 칭호를 하구려후라고 부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맥인이 변방을 노략질하는 일이 더욱 심해졌다.
건무 8년(A.D.32) 고구려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므로 광무제가 그 왕호를 회복시켰다.
건무 23년(A.D.47) 겨울 구려의 잠지락 대가 대승 등 1만여 명이 낙랑에 투항하였다.
건무 25년(A.D.49) 봄 구려가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요동태수 채용이 은의와 신의로 대하니 모두 요새 밖으로 철수했다.
후에 구려왕 궁(태조대왕)이 태어나면서 눈을 뜨고 능히 볼 수 있으니 나라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다. 장성하여 용감한 장부가 되어 변경을 자주 침범하였다.
화제 원흥 원년(A.D.105) 봄 다시 요동을 침입하여 여섯 개 현을 노략질하므로 태수 경기가 격파하고 그 거수를 죽였다.
안제 영초 5년(A.D.111) 궁이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치고 현토에 속하기를 원했다.
원초 원년(A.D.118) 다시 예맥과 함께 현토를 노략질하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건광 원년(A.D.121) 봄 유주자사 풍환과 현토태수 조광 그리고 요동태수 채풍 등이 군사로서 (고구려의) 요새를 공격하여 예맥의 거수를 붙잡아 죽이고, 병마와 재물을 빼앗았다.
궁은 이에 아들(필자주: 사실은 조카이다) 수성에게 군사 2천을 거느리고 가서 조광 등을 역습하게 하였는데, 수성이 사자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겠다고 하니 조광 등은 이를 믿었다.
수성이 이 틈을 타서 험준한 요충지를 점거하여 대군을 막으면서 몰래 3천명의 군사를 보내어 현토와 요동을 공격하여 성곽을 불태우고 2천여 명을 죽고 다치게 했다.
이에 광양·어양·우북평·탁군과 속국에서 3천여 명의 기병을 출동시켜 함께 구원하게 했으나 맥인이 이미 돌아갔다.
여름에 다시 요동의 선비 8천여 명과 함께 요대(遼隊)를 침공하여 관리를 죽였다.
채풍 등이 추격하다가 신창에서 전사하였다.
공조 경모, 병마연 용단, 병마연 공손포가 몸으로 채풍을 엄호하다가 모두 진중에서 죽었는데, 이때 죽은 사람이 1백여 명이나 되었다.
가을에 궁이 마한·예맥의 기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현토를 포위하였다.
부여왕이 그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군사 2만여 명을 거느리고 주·군과 함께 힘을 합하여 토벌하여 격파하고 5백여 명을 죽였다.
이 해에 궁이 죽고 아들 수성(차대왕)이 왕위에 올랐다.
조광이 글을 올려 그들의 초상 시에 군사를 출동시켜 공격하고자 한다 라고 하니 논의하는 사람들이 모두 좋다고 했으나, 상서 진충이 말하기를 "궁이 생전에 악독하여 조광이 생전에 토벌하지 못하였는데, 그가 죽은 때를 틈타 공격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마땅히 사절을 보내 조문하고 지난날의 죄를 꾸짖은 뒤 그 죄를 용서하여 후일 그들이 착하게 되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니 안제가 그 의견에 따랐다.
다음해 수성이 한나라의 포로를 송환하고 현토에 항복하였다.
조서를 내려,
"수성 등이 포악 무도하여 목을 베어 젓갈을 담아 백성들에게 보여야 하나 다행히도 사면되어 죄를 빌고 항복을 청하였다.
선비·예맥이 해마다 노략질하고 백성을 잡아가 그 수가 수천 명이 되는데, 겨우 수십, 수백 명을 돌려보내니 교화를 받고자 하는 마음이 아니다.
지금 이후로는 현의 관리들과 싸우지 말 것이며, 친히 살아있는 자들을 찾아 송환하면 모두 속전을 지불하겠다.
1인당 40필(비단?)을 주고 어린애는 그 반을 주겠다." 하였다.
수성이 죽고 아들(필자주: 사실은 조카이다) 백고(신대왕)가 왕위에 올랐다.
그 후에 예맥이 복속하니 동쪽 변방에 일이 줄었다.
순제 양가 원년(A.D.132)에 현토군에 둔전 6부를 설치하였다.
질제와 환제 사이에 다시 요동의 서안평을 침범하여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 태수의 처자를 납치하여 갔다.
건령 2년(A.D.169) 현토태수 경림이 (고구려를) 토벌하여 수백 명을 죽이니 백고가 항복하고 현토에 속하기를 청하였다고 한다.
삼국지 고구려전(三國志 高句麗傳)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1천리에 있다.[필자주 :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북경을 말하는 것이다]
남쪽은 조선과 예,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접했다.
도읍은 환도의 아래에 있다.
땅은 사방 2천리이고, 백성은 3만 호이다.
큰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들과 못이 없다.
산골짜기에 의지하여 살며, 계곡의 물을 마신다.
좋은 밭이 없어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배불리 먹을 수가 없기 때문에, 습속에 음식을 아끼지만 궁실은 잘 치장한다.
거처하는 좌우에 크게 집을 짓고, 귀신에게 제사지내고 또 영성과 사직에도 제사지낸다.
그 나라 사람들의 성격은 흉악하고 조급하며, 노략질을 좋아한다.
그 나라에는 왕이 있고, 관리로는 상·가·대로·패자·고추가·주부·우태·승·사자·조의·선인이 있으며, 신분의 높고 낮음에 따라 각각 등급이 있다.
동이의 옛말에는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언어와 여러 가지 많은 것이 부여와 같지만 성격이나 기질, 복장은 다름이 있다.
본래 다섯 부족이 있는데, 연노부·절노부·순노부·관노부·계루부이다.
원래 연노부에서 왕이 되었으나 점점 미약해져 지금은 계루부에서 대신한다.
한나라 때에는 북·나팔·악공을 하사했으며, 항상 현도군에 와서 조복과 의책을 받아갔는데, 고구려령이 그 장부를 관장하였다.
뒤에 점점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현토)군의 지시에 불복하였다.
그리하여 (현토군의) 동쪽 경계에 조그만 성을 쌓고, 조복과 의책을 그곳에 비치하여 연초에 와서 가져가게 하였다.
지금 호(胡)에서는 이 성을 책구루( 溝 )라 하는데, 구루란 구려 말로 성(城)이란 의미이다.
관원을 임명할 때, 대로가 있으면 패자를 임명하지 않고, 패자가 있으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 왕족으로서 대가(大加)는 모두 고추가(古雛加)라고 부른다.
연노부는 본래 나라의 주인이었으므로 비록 지금은 왕이 되지 못하나 그 적통의 대를 이은 사람은 고추가의 칭호를 얻었으며, 종묘에 나아갈 수 있고, 영성과 사직에게 제사를 지낼 수 있다.
절노부는 세습하여 왕과 혼인을 하였으므로 고추가의 칭호를 더했다.
여러 대가들도 역시 스스로 사자·조의·선인을 두었는데, 그 명단은 모두 왕에게 알려야 한다. 마치 중국의 경이나 대부의 가신과 같은 것인데, 회동 시에는 왕가의 사자·조의·선인과 같은 서열에는 앉지 못한다.
그 나라의 대가들은 농사를 짓지 않으므로 놀고 먹는 인구가 1만여 명이나 되는데, 하호들이 멀리에서 식량·생선·소금을 운반하여 공급한다.
그 백성들은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안의 읍락마다 밤이 되면 남녀가 모여 서로 노래부르며 즐긴다.
큰 창고는 없고, 집집마다 스스로 조그만 창고를 가지고 있는데, 부경( 京)이라 한다.
사람들이 깨끗한 것을 좋아하며 술을 잘 빚는다.
무릎을 꿇고 절할 때에는 한쪽 다리를 펴는데, 부여와는 다름이 있고, 걷는 것이 달리는 것 같다.
10월에 제천하는 국중 대회를 동맹(東盟)이라 한다.
그들은 공식모임에는 모두 수놓은 비단옷을 입고, 금·은으로 스스로 치장한다.
대가와 주부는 머리에 책( )을 쓰는데, 중국의 책과 유사하지만 뒤로 늘어뜨리는 여(餘)가 없다. 소가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弁)과 같다.
그 나라의 동쪽에 큰 굴이 있는데, 수혈(隧穴)이라 한다.
10월 국중 대회 때 수신(隧神)을 나라의 동쪽에서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를 깎아 만든 수신의 상을 신의 자리에 앉힌다.
감옥이 없고, 죄 지은 자는 여러 가(加) 들이 모여 평의하여 사형에 처하고 처자는 잡아들여 노비로 삼는다.
혼인 풍습은 말로서 미리 정하고, 여자의 집에서 안채 뒤편에 조그만 별채를 짓는데, 서옥( 屋)이라 한다. 해가 질 무렵 (신랑이) 신부의 집밖에서 절하며 자기의 이름을 말하고 부디 신부와 잠잘 수 있게 해달라고 애걸하는데, 이렇게 두세 번 거듭한다. 신부의 부모는 그때에야 서옥에 가서 자도록 허락하고 돈과 폐백은 서옥 옆에 쌓아둔다. 아들을 낳아 성장하면 부인을 데리고 (남자의) 집으로 돌아간다.
풍속은 미신을 믿고, 남녀가 혼인을 하면 죽어서 입고 갈 수의를 미리 조금씩 준비해둔다.
장례를 후하게 지내 금·은의 재물을 모두 죽은 자를 보내는데 소비하며, 돌을 쌓아 봉분을 만들고 (주위에)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말(馬)은 모두 작아 산에 오를 때 편리하다.
사람들은 담력이 있고, 힘이 세다.
전투에 능하여 옥저와 동예를 모두 복속시켰다.
또 소수맥이 있는데, 구려가 대수(대요수)유역에 나라를 세우고 살았고, 서안평현(西安平縣)의 북쪽에 소수(小水: 소요수)가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구려의 별종이 이 소수유역에 나라를 세웠으므로 그 이름을 따라 소수맥이라 하한다. 좋은 활이 생산되는데 소위 맥궁(貊弓)이라 하는 것이다.
왕망 초에 고구려의 군사를 징발하여 호(흉노)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가지 않으려 하므로 강제로 보냈더니, 모두 도망하여 국경을 넘어 노략질하고 도둑질하였다.
요서대윤 전담이 그들을 추격하다가 죽었는데, 주와 군·현에서 그 책임을 구려후 추에게 돌렸다.
엄우가 아뢰기를 "맥인이 법을 어긴 것은 그 죄가 추에게 있는 것이 아니므로 그를 안심시키고 위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금 그에게 큰 죄를 씌우게 되면 반란을 일으킬까 걱정됩니다." 하였으나 왕망이 듣지 않고, 엄우에게 치도록 명했다.
엄우는 구려후 추를 만나자고 유인하여 그가 도착하자 목을 베어 그 머리를 장안으로 보냈다.
왕망은 매우 기뻐하며 천하에 포고하여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麗)라고 부르게 하였다.
이리하여 고구려가 후국(侯國)이 되었는데, 후한의 광무제 8년(A.D.32)에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므로 왕을 칭할 수 있게 하여주었다.
상제와 안제 때에 이르러 구려왕 궁(宮L 태조대왕)이 수차 요동을 노략질하므로 바꾸어 현토에 소속시켰다.
요동태수 채풍과 현토태수 조광은 궁이 두 군에 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군사를 일으켜 정벌하였다.
궁이 거짓으로 화친하기를 청하자 두 군은 진격하지 않았는데, 궁이 몰래 군사를 보내 현토군을 공격해 후성을 불태우고, 요수(遼隧 :요대[遼隊]의 오기이다)에 침입하여 관리와 백성들을 죽였다. 뒤에 다시 궁이 요동을 침범하자 채풍이 경병을 거느리고 추격하여 토벌하다가 패하여 죽었다.
궁이 죽고 그 아들 백고(신대왕)가 왕위에 올랐다.
순제와 환제 때 다시 요동을 침범하여 신안과 거향을 노략질하고 또 서안평을 공격하여 도중에 대방령을 죽이고 낙랑을 쳐 낙랑태수의 처자를 잡아갔다.
영제 건녕 2년(A.D.169) 현토태수 경림이 토벌하여 수백 명을 죽이고 사로잡으니 백고가 항복하여 요동에 소속시켰다.
희평(A.D.172∼177) 중에 백고는 현토에 속하기를 원하였다.
공손도가 해동에 웅거하자 백고는 대가 우거와 주부 연인 등을 파견하여 공손도를 도와 부산(富山)의 도적을 격파하였다.
백고가 죽고 두 아들이 있었는데, 큰아들은 발기, 작은아들은 이이모였다.
발기가 불초하다하여 나라 사람들이 함께 이이모(고국천왕)를 옹립하여 왕으로 삼았다.
백고 때부터 고구려가 수차 요동을 노략질하고 또 멸망한 호(胡) 5백여 호를 받아들였다.
건안(A.D.196∼219) 중에 공손강이 군사를 출동시켜 고구려를 격파하고 읍락을 불태웠다. 발기는 형이면서도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여 연노가의 장수들과 함께 하호 3만여 명을 거느리고 공손강에게 가서 투항한 후 비류수(沸流水)로 돌아와서 살았다.
항복했던 호(胡)도 이이모를 배반하므로 이이모는 나라를 새롭게 만들었는데, 오늘날 있는 곳이 그곳이다. 발기는 곧 요동으로 가고 그 아들이 구려국에 머물렀는데, 지금의 고추가 박위거( 位居)이다.
그 후 다시 현토를 공격하므로 현토군과 요동군이 힘을 합쳐 반격하여 크게 격파하였다.
이이모가 아들이 없어 관노부의 여자와 사통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위궁이다.
이이모가 죽자 위궁이 왕위에 오르니 지금의 구려왕 궁(위궁 즉 동천왕의 오기이다)이 바로 그 사람이다.
※필자주: 이이모는 고국천왕을 말하는 것이고, 위궁은 동천왕을 말하는 것으로서 동천왕은 고국천왕의 아들이 아니라 고국천왕의 동생인 산상왕의 아들이다.
증조의 이름이 궁이었는데, 태어나면서부터 눈을 뜨고 능히 사물을 볼 수 있었으므로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장성하자 과연 흉악하여 (후한을) 자주 침략하다가 나라가 잔파 되기에 이르렀다. 지금의 왕도 태어나면서 눈을 뜨고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구려에서는 서로 닮은 것을 위(位)라고 하는데, 그의 증조부와 닮았기 때문에 위궁(동천왕)이라고 이름지었다고 한다.
위궁은 용감하고 힘이 세고 말을 잘 타고 사냥할 때 활을 잘 쏘았다.
경초 2년(A.D.238) 태위 사마선왕이 군사를 이끌고 공손연을 토벌하니 위궁이 주부와 대가를 파견하여 군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사마선왕의 군대를 도왔다.
정시 3년(A.D.242) 위궁이 서안평을 노략질하였다.
정시 5년(A.D.244)에는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격파되었는데, 그때의 사실은 관구검열전에 실려 있다.
위서 고구려전(魏書 高句麗傳)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는데,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이라 한다.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河伯)의 딸인데, 부여왕이 방안에 가두어 두었더니 햇빛이 비추었고, (몸을) 피하면 햇빛이 또 따라와서 비추었다.
곧 잉태되어 알 한 개를 낳았는데, 크기가 다섯되들이 만하였다.
부여왕이 (그 알을) 버려 개에게 주었으나 개가 먹지 않았고, 돼지에게 주었으나 돼지 또한 먹지 않았다.
길에다 버렸으나 소와 말이 피해갔다. 후에 들에 버렸더니 새들이 깃털로 감싸주었다.
부여왕이 쪼개려고 하였으나 깨뜨릴 수가 없어, 곧 그 어머니에게 돌려주었다.
그 어머니가 싸서 따뜻한 곳에 두었더니 한 사내아이가 (알을) 깨고 나왔다.
장성하여 이름을 주몽이라 하였는데, 속언으로 주몽이란 활을 잘 쏜다는 의미이다.
부여 사람들이 주몽은 사람의 소생이 아니기 때문에 장래 역심을 품을 것(원문은 異志)이라고 하면서 제거할 것을 청했으나 왕이 듣지 않고 말을 기르도록 명했다.
주몽이 매일 몰래 시험하여 좋은 말과 나쁜 말을 알아내어 좋은 말은 먹이를 조금 주어 마르게 하고, 나쁜 말은 먹이를 많이 주어 살찌게 하였다.
부여왕이 살찐 말은 자기가 타고 마른 말은 주몽에게 주었다.
후에 사냥을 하는데, 주몽은 활을 잘 쏜다하여 화살을 조금 주었는데, 비록 주몽이 화살은 적었으나 잡은 짐승이 아주 많았다.
부여의 신하들이 또 죽이려고 모의하였는데, 주몽의 어머니가 은밀히 알아내고는 주몽에게 말하기를 "나라에서 장차 너를 해하려고 한다. 너의 재주와 지략을 가지고 멀리 어디론가 도망가는 것이 옳다." 하였으므로 주몽은 오인(烏引)·오위(烏違) 등 두 사람과 함께 부여를 떠나 동남쪽으로 도망하였다.
도중에 우연히 큰 강을 하나 만났는데, 건너려고 하여도 다리가 없었고, 부여 사람들이 아주 가까이 추격했다.
주몽이 물에 대고 말하기를 "나는 태양의 아들이요, 하백의 외손이다. 오늘 도망을 하고 있는데 군사들이 바짝 뒤쫓고 있으니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하였더니, 이때 물고기와 자라가 함께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어 주몽이 강을 건너자 물고기와 자라가 곧 흩어졌으므로 추격병들은 건널 수 없었다.
주몽이 보술수(普述水)에 이르러 우연히 세 사람을 만났는데, 한 사람은 삼베로 지은 옷을 입고 있었고, 한 사람은 납의를 입고 있었으며, 한사람은 수조의를 입고 있었다.
주몽과 함께 흘승골성(紇升骨城)으로 와서 살면서 나라 이름을 고구려라고 하고, 이로써 성을 삼았다.
옛날에 주몽이 부여에 있을 때 부인이 임신을 하였다.
주몽이 도망간 후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을 여해(閭諧)라 하였다.
장성하자 주몽이 왕이 된 것을 알고 곧 어머니와 함께 도망하여 왔는데 이름을 여달(閭達)이라 고치고 국사를 위임하였다.
주몽이 죽자 여달이 왕위에 올랐다.
여달이 죽자 아들 여율(如栗)이 왕위에 올랐다.
여율이 죽고 아들 막래(莫來)가 왕위에 올라 부여를 정벌하니 부여가 대패하고 마침내 고구려에 통합되었다.
막래의 자손으로 이어져 후예 궁(宮: 태조대왕)에 이르렀는데, 태어나면서 눈을 뜨고 능히 볼 수가 있어 사람들이 증오하였다.
※ 필자주: 위 기록을 보고 김부식이 고구려의 왕대를 누락시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논란이 많은 기록이다.
그러나 이들을 주몽왕의 공주(딸)가 구려 호족인 고씨에게 시집가 낳은 후손들의 이름이고, 후세에 고씨인 태조대왕 궁이 고구려의 6대 왕위에 오름으로써 고구려는 주몽의 친손인 해씨와 외손인 고씨로 왕위가 이어졌다고 보면 고구려전의 기록들이 이해된다.
장성하자 흉포하고 사나워 나라가 쇠약해졌다.
궁의 증손에 위궁(동천왕)이 있었는데, 역시 태어나면서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그것이 증조 궁과 비슷하므로 이름을 위궁이라고 했다.
고구려에서는 서로 비슷한 것을 위라고 한다.
위궁 역시 용기와 힘이 있었고, 활을 잘 쏘고 말을 잘 탔다.
위나라 정시(A.D.240∼248) 중에 요(遼)의 서안평(西安平)을 노략질했고, 유주자사 관구검에게 격파 당했다.
그 현손은 을불리(미천왕)이고, 을불리의 아들은 쇠(釗: 고국원왕)인데 열제 때에 모용씨와 서로 공격했다.
건국 4년(A,D.342)에 모용원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정벌했는데, 남쪽의 좁은 길로 들어가 목저에서 전투를 벌여 쇠의 군대를 대파하고 승승장구 마침내 환도(丸都)에 진입하니 쇠는 혼자 도망쳤다.
모용원진은 쇠의 아버지 묘를 파서 시신을 싣고 아울러 그 어머니와 처, 값진 보물과 남녀 5백여 명(양서와 북사에는 5만 명이라고 했다)을 납치하고는, 궁실을 불태우고 환도성을 파괴한 후 귀환하였다.
후에 쇠가 사신을 보내어 조공하였으나 도둑들로 길이 막혀 스스로 도달할 수가 없었다. 쇠는 후에 백제에게 죽임을 당했다.
세조 때 쇠의 증손 연(장수왕)이 사신 안동을 보내어 표문과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며, 북위 황제들의 이름을 청하였다.
세조가 그 정성을 아름답게 여겨 칙명으로 대를 이은 황제들의 이름을 적어 그 나라에 보내고 원외산기시랑 이오를 보내 연을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의 작위를 주었다.
이오가 그들이 사는 평양성에 이르러 여러 곳을 방문해보고는 말하기를,
"고구려는 요(遼)의 동남쪽 1천여 리에 있는데, 동쪽은 책성(柵城)까지요, 남쪽은 소해(小海)까지, 북쪽은 옛 부여까지이며, 백성은 옛날의 3배이다.
위나라 때 그 땅이 동서 2천리요, 남북이 1천여 리였다.
백성들은 대개 농사를 짓고, 골짜기에 의지해 살며, 삼베·비단·가죽으로 옷을 입는다. 밭은 척박한데 양잠으로는 자급하기에 부족하여 그 나라 사람들은 음식을 아낀다.
풍속은 미신을 믿고, 춤추고 노래하는 것을 좋아한다.
밤에는 남녀가 무리 지어 논다.
귀천을 불문하고 정결한 것을 좋아하고, 그 왕은 궁실을 치장하기를 좋아한다.
알사·태사·대형·소형이라 부르는 관직의 이름이 있고, 머리에는 절풍(折風)을 쓰는데, 그 모양이 고깔과 같고, 옆에 새의 깃을 꽂는데 귀천의 차이가 있다.
섰을 때는 반공하고, 엎드려 절할 때는 다리 하나를 펴며, 걷는 것이 달리는 것 같다.
공식적인 모임 때는 모두 수놓은 비단 옷을 입고, 금·은으로 치장한다.
쪼그려 앉기를 좋아하고, 먹을 때는 조궤를 사용한다.
키가 세자 짜리 말이 산출되는데, 본래 주몽이 탔던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의 종자가 곧 과하마(果下馬)이다.
후에 조공사신이 서로 자주 왕래하여 해마다 황금 2백 근, 백은 4백 근을 바쳤다.
이 시기에 풍문통(풍홍)이 무리를 거느리고 고구려로 도망하였다.
세조가 산기상시 봉발에게 조서를 주어 연에게 풍문통을 보내라고 명했으나, 연은 글을 올려 문통과 함께 왕화를 받겠다고 하면서도 끝내 보내지 않았다.
세조가 노하여 토벌하려 하였으나 낙평왕 비 등이 기다렸다가 후일에 거병하자고 하여 세조가 중지하였다. 문통 역시 결국 연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뒤에 문명태후가 현조의 6궁이 채워지지 못했다하여 조칙으로 연에게 그의 딸을 천거토록 하였는데, 연이 표를 올려 "딸이 이미 출가하였으므로 동생의 딸로서 뜻에 응하겠다" 라고 하여 조정에서 허락하였다. 이에 안락왕 진과 상서 이부 등을 보내 국경까지 가서 폐백을 보내게 하였다.
그러나 연은 "위나라는 지난 날 풍씨와 혼인을 맺었으나 얼마 안되어 그 나라를 멸망시켰으므로, 핑계를 대고 거절해야 합니다"라는 조정의 뜻에 따라 연이 글을 올려 조카딸이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조정에서는 속이는 것이라 의심하고 또 가산기상시 정준을 보내 엄중히 꾸짖고 만약 조카딸이 죽었으면 종실의 인척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하였다.
연은 "만약 천자께서 전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신다면 삼가 조칙을 받들겠습니다." 하였는데, 그 무렵 현조가 죽어 중지하였다.
고조 때에 이르러 연이 바치는 공물이 전보다 배로 늘었고, 그 보답으로 내려주는 물품도 역시 점점 증가되었다.
이때 광주의 해상에서 연이 파견하여 소도성에게 가던 사신 여노 등을 잡아 대궐로 보내왔다.
고조가 조서로서 연을 문책하기를 "소도성은 친히 자기의 군주를 죽이고 강좌에서 천자를 참칭하여 짐이 그 옛 땅에 멸망한 나라를 일으켜 끊어진 유씨를 이어주려고 하는데, 경은 국경을 넘어 외교함으로써 멀리 역적과 통하려 하니 이것이 어찌 번신으로서의 절조를 지키는 의리라 할 수 있겠는가?
지금 한가지 허물로서 옛 우호를 저버릴 수 없어 이에 즉시 송환하는 바이니 감사히 여기라. 삼가 가르침을 받들어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동정을 알 수 있게 하라." 하였다.
태화 15년(A.D.491) 연이 죽으니 나이가 100세였다.
고조는 동쪽 교외에서 애도의 의식을 거행하고 알자 복야 이안상을 보내 거기대장군 태부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추증하고 시호를 강이라 하였다.
또 대홍려를 보내 연의 손자 운(문자왕)을 사지절 도독요해제군사 정동장군 영호동이중랑장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에 봉하고 의관과 복장, 수레에 장식물을 하사하였다.
또 조서로서 운에게 세자를 보내 입조하여 교외에서 지내는 제천행사에 참석케 하라고 하였다.
운이 글을 올려 세자가 병들었다고 핑계하고 그의 종숙 승간을 보내 사신을 따라 위나라 대궐에 나아가게 하여 엄하게 질책하였다.
이로부터 해마다 항상 공물을 바쳤다.
정시(A.D.504∼507) 중에 세종이 동당에서 고구려의 사신 예실불을 인견하니 예실불이 나아가 말하기를 "고구려가 누대에 걸쳐 온 정성을 다하여 토산물을 바치는 조공을 빠뜨리지 않았습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나오고, 마노(珂:옥의 일종)는 섭라에서 산출되는데, 지금 부여는 물길에게 축출 당했고, 섭라는 백제에게 병탄 당했습니다. 국왕인 신 운은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그 유민을) 경내로 옮겨 살게 하였습니다. 지금 두 가지 물건을 왕부에 올리지 못하는 것은 실로 두 도적 때문입니다" 하였는데, 세종이 말하기를 "고구려가 대대로 상국의 지원에 힘입어 바다 밖 구이를 모조리 제압하여 정복할 수 있었다.
술병이 비는 것은 술동이의 허물이니 그것이 누구의 탓이리요. 방물이 옛 같지 않은 것은 책임이 연솔에게 있는 것이다. 경은 짐의 뜻을 경의 군주에게 전하여 위엄과 회유로써 해를 끼치는 무리를 제압하고 동방의 후예들을 모아 평안케 하고 두 읍의 옛 터를 돌려 받아 토산물의 공납을 빠뜨리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신구(A.D.518∼519) 중에 운이 죽어 영태후가 동당에서 애도식을 거행하였다.
사신을 보내 거기대장군 영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추증하였다.
또 그의 세자 안(안장왕)을 책봉하여 안동장군 영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으로 하였다.
정광(A.D.520∼524)초에 광주 해상에서 소연이 안에게 주는 영동장군의 의관과 칼, 패물 그리고 사신으로 가던 강법성 등을 잡아 경사로 보냈다.
안이 죽고 아들 연(안원왕)이 즉위하였다. 출제 초에 조서를 보내 연에게 사지절 산기상시 거기대장군 영호동이교위 요동군개국공 고구려왕을 더해 주고, 의관과 복물, 수레와 장식물을 하사하였다.
천평(A.D.534∼537) 중에 조서를 보내 연에게 시중 표기대장군을 더하고 나머지는 종전과 같이 하였다. 연이 죽고 아들 성이 왕위에 올랐다.
무정(A.D.543∼549)말기까지 공물과 사신이 오지 않은 해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