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화 - 효녀 심청의 고향과 인당수는 지금의 어디를 말하는가?
눈먼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고 효녀 심청이 뱃상인에게 공양미 삼백석에 몸을 팔아 인당수에 몸을 던져야했으나 심청의 효성에 감동한 용왕이 그녀를 환생시켜 살려보내 왕후가 되어 부녀가 다시 만나고 아버지도 눈을 뜨게 된다는 내용의 효녀 심청 이야기를 모르는 한국인은 없다.
자식이 부모에게 절대효도를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유교를 숭상하던 조선시대에 이르러 이 이야기를 백성들에게 널리 전파해 지금까지도 전해지게 되었을 것인데, 이야기 줄거리가 너무도 사실적이기 때문에 사람들 중에는 이 이야기가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었거나 최소한 비슷한 일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많다.
지금 인천 옹진군과 전남 곡성군, 충남 예산군과 경기도 화성군이 심청설화의 주무대가 서로 자기 고장이라 주장하고 있다고 하는데, 각각의 논리는 모두 근거가 있다.
인천 옹진은 백령도와 장산곶 사이를 예로부터 인당수라 부르고, 그곳이 중국과의 중요 해상 교통로이기 때문이고,
전남 곡성은 조선 영조 5년에 순천 송광사에서 편찬된 관음사 창건기에 심청설화와 유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라 하고,
충남 예산이 주장하는 근거는 관음사 창건기와 홍법사 창건기인데, 그 기록들 속에 충청도 대흥현에 원량이라는 장님이 있었고, 홍장이라는 딸의 이름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라 하고,
경기도 화성은 홍법사 창건설화에 "충청도 대흥현에 한 장님이 있었으니 그의 성은 원가요 이름은 양이다. 일찍이 아내를 잃고 홀아비로서 곤궁하게 살아가는데, 이웃에 의지할 만한 친척도 없었으나 오직 어린 딸 하나가 있었다. 딸아이의 이름은 홍장으로서 자색이 예쁘고, 몸가짐이 비범하며.........." 로 시작되고 있고, 화성군에 홍법사라는 절이 있기 때문이라 한다.
관음사 창건기에 의하면,
옛날 충청도 대흥고을에 살던 장님 원량이 아내를 잃고 원홍장이라는 딸과 함께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원량은 절에 시주를 하면 눈을 뜰 수 있다는 스님의 말을 듣고 외동 딸 홍장을 절에 시주하게 된다.
그리하여 홍장은 스님을 따라 절로 가다가 소량포에서 쉬게 되었는데, 마침 그곳에서 중국 진(晉)나라 사신을 만나게 된다.
중국 황제는 황후가 죽은 뒤 꿈을 꾸었는데, 꿈이 하도 이상하여 꿈 이야기를 사신들에게 들려주고 동국으로 보냈는데, 사신들이 홍장의 이야기를 듣고는 황제의 꿈에 나타난 상황과 일치한다 하여 스님에게 금은보화를 주고 홍장을 데리고 중국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중국 황제는 홍장을 황후로 맞아들였다고 한다.
황후가 된 홍장은 부친을 위해 관음불상을 만들어 보내 절을 짓게 했는데, 그 절이 바로 지금 전남 곡성군 오산면 선세리에 있는 관음사라는 것이고, 그로 인하여 장님 원량이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심청전은 사실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설화가 아니라 아주 먼 옛날부터 전해진- 최소한 고려시대 이전 - 것으로 생각되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심청전의 내용과 비슷한 일이 실제 일어났기 때문에 사적기에도 기록되어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고, 또 한편으로는 절을 창건할 때 영험한 절이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 원홍장 설화를 창건기에 가져다 붙였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볼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는 심청전은 솔직하게 언제부터 전해지는 이야기인지 알 수도 없고, 또 그 내용도 여러 종류가 있어 어느 것이 원본인지도 알 수 없다.
효녀 심청에 관한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자 그 내용을 조금씩 각색하고, 첨삭하기에 이르러 지방 또는 사람에 따라 조금씩 이야기가 달라지게 되었을 것인데, 그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것으로는 중국 명나라 때의 이야기로서
"대명(명나라) 성화(A.D.1465-1487) 연간에 남군 땅에 사는 심씨(심현이라고 한다)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정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늦게 딸 하나를 낳아 심청이라 이름지었는데, 심청이 세 살 되던 해에 정씨 부인이 죽고 심씨 역시 눈먼 봉사가 되고 말았다.
심청이 자라 봉사가 된 아버지를 부양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일을 나갔다가 돌아오는 딸을 마중 나가던 심봉사가 발을 헛디뎌 물에 빠져 죽을 지경에 이르렀는데, 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시주승이 그를 구해주게 된다.
시주승은 절을 새로 짓기 위해 시주를 받으러 다니던 중이었다.
그러자 심봉사는 생명을 구해준 것을 고마워 하며 자신의 처지를 생각지 않고 공양미 삼백석을 절에 시주하겠노라 약속하게 된다.
집에 돌아온 심봉사는 그 공양미를 준비할 처지가 되지 못함을 깨닫고 혼자 고민을 하다가 결국 그 사실을 딸인 심청에게 말해 주게 된다.
이때 마침 남경 상인이 배를 타고 건너 다니는 인단소(인당수라고도 한다)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용왕에게 바칠 처녀를 구한다는 말을 들은 심청은 자신의 몸을 공양미 삼백석에 팔게 되었고, 제물이 되어 인단소에 몸을 던지게 된다.
심청이 물에 뛰어들자 선녀가 심청을 용궁으로 데려갔는데, 그곳에서 심청의 효성에 감복한 용왕으로부터 전생의 일과 미래의 운명에 대해 듣게 되고, 그곳에서 죽은 어머니를 만나본 뒤 다시 인단소에 연꽃을 타고 떠오르게 되어 환생하게 된다.
그런데 남경 상인들이 돌아오다가 인단소에 떠 있는 큰 연꽃을 발견하게 되었고, 상인들은 그 연꽃을 왕에게 바친다.
그런데 연꽃이 왕 앞에 이르자 활짝 열리면서 그 속에서 심청이 나타났고, 왕은 심청을 왕비로 맞아들이게 된다.
왕후가 된 심청이 왕에게 권하여 전국의 맹인들을 위해 위로잔치를 베풀도록 권하게 된다.
그리하여 전국에 있는 맹인들에게 궁중에서 열리는 잔치에 한 사람도 빠지지 말고 참석하라는 왕명이 내려지게 되었고, 심청이 인단소에 몸을 던진 이후 이웃 노부부의 도움을 받아 겨우 겨우 살아가던 심봉사도 궁중에서 열리는 잔치에 참석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딸 심청과 만나 심봉사는 눈을 뜨게 된다.
그러자 왕은 심봉사에게 벼슬(호부상서 겸 대사마 초국공이라고 한다)을 내려주게 되었고, 명문가의 딸인 임씨 부인(좌승상 임한의 딸이라고 한다)과 재혼하게 된다.
그리고 고향으로 가서 자신을 돌보아 주었던 노부부와 이웃 사람들에게 보은의 상을 내린다.
그 뒤 심청은 3남 2녀를 두었고, 친정아버지 심씨는 2남 1녀를 두어 행복하게 살았는데, 심씨가 75세의 나이에 병을 얻어 죽자 재혼했던 임씨부인 역시 통곡하다가 따라 죽었다.
그리하여 왕비 심청은 아버지와 계모인 임씨의 시신을 고향 땅으로 운구하여 자신의 생모인 정씨부인과 나란히 장사지냈고, 세월이 흘러 심청도 죽고 왕도 죽게 되었으며, 심청의 아들이 왕위를 이었으며, 심대감의 두 아들 역시 과거에 급제하게 된다"는 내용인데, 이야기 속에서 호부상서 겸 대사마 초국공이라는 벼슬이름이 언급되는 것으로 보면 이 이야기가 원래 중국 설화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효녀 심청 설화를 한반도에 적용하여 해석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렇게 고착되었을 것이다.
지금 백령도에 가면 심청이 바닷물 속에 몸을 던졌다는 인당수와 심청이 떠올랐다고 하는 연봉바위 등의 전설이 있어 옹진군에서는 백령도에서 황해도 장산곶이 바라다 보이는 북쪽 산마루에 심청각과 심청상을 세우기도 했다.
따라서 사람들은 심청의 원래 고향이 황해도 황주 부근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하고, 충청도 예산일 것이라고 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판소리 심청가라는 것은 원래 고려 때부터 전해온 것이라 하고, 내용 자체도 불교와 관련지어져 있기 때문에 실제 심청설화의 주인공은 고려 때(또는 그 이전 삼국시대) 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많고, 고려의 개경과 중국의 남경을 오가며 장사하던 뱃상인들 사이에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게 되어, 지금까지도 전해지게 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 것이다.
만약 이 심청전이 고려 때에 일어났던 비슷한 실화를 바탕으로 각색된 이야기라면 심청의 고향은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중국 하북성 부근일 것이고, 심청이 용왕에게 제물로 바쳐진 곳은 지금 난하의 반가구수고 부근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고려의 도읍 개경은 지금의 한반도 황해도 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寬城)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 판소리는 고려시대 때의 노래형식이고, 타령은 조선시대 노래형식이라 한다.
따라서 중국 상인들은 양자강 부근에 위치해 있는 중국 송나라의 남경과 고려의 개경을 오가며 장사를 했을 것이다.
넓고 심하게 파도치는 바다도 물론 위험하지만 고려의 개경을 가려면 발해에서 지금의 난하를 타고 올라가 아주 험난한 대흑정수고와 반가구수고를 통과하여 고려의 예성항에 도착해야 하는데, 대흑정수고와 반가구수고는 내륙의 커다란 호수로서 매우 구불구불한 형태를 하고 있다.
따라서 조금만 잘못하면 배가 좌초되고 파손되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서긍의 고려도경을 보면, 고려의 예성항에 도착하기 전에 급수문과 합굴이라는 곳을 통과해야만 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급수문과 합굴에 대한 기록은 그곳이 매우 위험한 곳이라는 것을 알게 한다.
기록을 보면,
"이날 미시(오후 1-3시)에 급수문에 도달했다. 그 관문은 섬과 다른 것이 흡사 무협의 강 흐름과 같다. 산으로 둘러 싸여 굴곡을 이루면서 앞뒤로 맞물려 있는데, 그 양쪽 사이가 물길이다. 물의 형세가 산골짜기에 묶여 놀란 파도가 해안을 치고 구르는 돌이 벼랑을 뚫는데, 천둥처럼 요란하고 커다란 노가 바람을 쫓아가는 소리와 같으니 어찌 달리 설명할 말이 없다.
신시(오후 5-7시)가 다되어 합굴에 정박했다. 그 산은 그리 높거나 크지 않으므로 주민도 많았다. 산등성이에 용을 모시는 사당이 있는데, 뱃사람들이 오고갈 때마다 제사를 지낸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심청전의 내용대로 뱃상인들이 용왕에게 제물을 바쳐야 했다면 바로 이 합굴 부근에서 그러한 행위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뱃상인들은 인신공양을 함으로써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쌀 삼백석이라는 거금을 주고 심청을 사서 용왕에게 제물로 바쳤을 것이다.
그렇다면 인단소(인당수)라고 하는 곳은 지금의 반가구수고를 말한다고 할 수 있고, 심청전의 주무대는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인 것이다.
☆ 그런데 지금 산동반도 봉래 북쪽에 묘도해협이 있고, 묘도군도에 묘도, 장도, 북장산도, 대흑산도, 대죽산도, 소죽산도 등이 있는데, 그곳에도 심청전과 유사한 설화가 전하고 있다고 한다.
옛날 뱃상인들이 실제 북경과 남경을 오가면서 묘도해협을 안전하게 통과하기 위해 용왕에게 제사를 지냈고, 아주 먼 옛날에는 실제로 처녀를 용왕에게 제물로 바쳤다는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고 하고,
또 판소리 심청가 가사가 모두 중국 양자강 부근의 지명을 노래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심청설화의 실제 배경은 바로 중국 양자강 부근이라는 주장도 있는데, 중국에서는 지금 양자강이 동중국해로 들어가는 주산군도에 심청원을 복원하고 있다고 한다.
가히 심청이 쟁탈전이 벌어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조선이 대륙의 개경에서 건국되어 한반도의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면서 한반도가 역사의 중심지가 되었고, 심청설화도 한반도로 전래되어 지금의 황해도 장산곶 앞바다에 심청설화를 대입시켜 그 앞 바다를 인당수라고 하게 되었을 것이고, 심청설화와 유사한 일이 전남 곡성에서도 일어나자 그곳에서도 불교의 이적이라 하여 사적기에 기록해 전해지게 되었을 것이며, 경기도 화성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따라서 심청설화는 꼭 어느 나라 어느 지역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고 단정할 수 있는 설화가 아니라 동양에 널리 퍼진 일반적인 효도이야기였다고 생각된다.
다만 그 내용 중에,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을 권장하는 것이야 좋은 일이지만 그 아버지 되는 사람은 장래가 구만리 같은 어린 딸의 목숨을 팔아서라도 그렇게 눈을 뜨고 싶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