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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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삼국시대에는 과연 어떤 언어를 사용했을까?- 최초주장

윤여동 2008. 2. 25. 23:32

윤여동설 - 삼국시대에는 과연 어떤 언어를 사용했을까? - 최초주장

 

 

  우리는 지금 막연하게 옛날에 고구려는 주로 평안도 말을 사용했을 것이고, 백제는 서울· 경기·충청·전라도 말을 사용했을 것이며, 신라는 경상도 말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어느 영화에서는 백제의 계백장군은 전라도 말을 하고, 신라의 김유신장군은 경상도 말을 하는 것으로 각본을 만들어 사람들을 웃기기도 했는데, 삼국이 한반도에 존속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설정이었다.
  그러나 삼국의 건국지가 한반도가 아닌 지금의 중국 북경 부근이었다면 그 멀리 떨어진 곳과 한반도의 언어가 동일했다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당시 삼국 사람들이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국어와 동일한 언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해진다.

 

☆ 고구려의 중심 강역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장가구시, 내몽골 일원이었고, 백제의 중심 강역은 하북성 당산시,진황도시 일원이며, 신라의 중심 강역은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일원이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당시 대륙의 삼국 사람들은 어떠한 언어를 사용했을까?
  후한서 한(韓)전 진한 조를 보면,
  "진한은 그 나라의 노인들이 말하기를, 진(秦)나라 사람들이 고역을 피해 한(韓)으로 도망쳐 오자 마한이 그 동쪽 땅을 분할하여 주었다고 한다.
  나라를 방(邦)이라 하고, 활을 고(孤)라 하며, 도둑을 구(寇)라 하고, 술잔을 돌리는 것을 행상(行觴)이라 하며, 서로를 부를 때 도(徒)라 하는데, 진(秦)나라 말과 비슷하기 때문에 진한(秦韓)이라고도 한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는 진나라 말 비숫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우리는 지금까지 위 후한서의 기록을 진시황의 폭정을 견딜 수 없었던 중국 진나라 사람들이 서해바다를 건너 한반도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던 마한으로 오자 마한왕이 그들을 경상북도 경주 부근에 살게 했다고 역사를 해석하는데, 당시 대륙의 진나라 사람들이 그 위험한 서해바다를 직접 가로질러 건너 한반도로 올 수는 없는 일이다.
  당시 마한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 풍윤부근을 중심으로 방 4천리에 이르는 넓은 강역을 차지하고 있던 나라였기 때문에 진나라 사람들은 진나라에서 도망쳐 바로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마한으로 올 수 있었고, 마한왕은 도망쳐온 진나라 사람들을 마한의 동쪽인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에 살게 했던 것이다.
   
 
  또한 같은 책 변진 조를 보면,
  "변진(변한)은 진한 사람들과 섞여 사는데, 성곽과 의복은 모두 같으나 언어와 풍속은 다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가까이 위치하고 있었던 진한과 변한의 언어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삼국지 한전 마한 조를 보면,
  "경초(A.D.237-239) 중에 명제가 몰래 대방태수 유흔과 낙랑태수 선우사를 파견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두 군(한과 예를 말함)을 평정하고는 여러 한국의 신지를 읍군으로 임명하고, 그 다음 사람은 읍장으로 임명했다.
  풍속은 의책을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들도 군에 가서 조알할 적에는 모두 의책을 빌려 입으며, 자신의 인수를 차고 의책을 착용하는 사람이 1천여 명이나 된다.
  부종사 오림은 낙랑이 본래 한국을 통치했었다는 이유로 진한의 여덟 나라를 분할하여 낙랑에 편입시키려 하였는데, 그때 통역하는 사람이 말을 잘못 전하여 신지와 한인들이 모두 화가 나서 대방군의 기리영을 공격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마한 역시 중국말과는 다른 말을 사용하고 있어 중간에 통역이 있어야만 의사소통이 가능할 정도였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같은 책 진한 조를 보면, 진한의 말이 "진나라 사람들과 비슷하나 연나라, 제나라의 말은 아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연나라는 지금의 북경 서남쪽 보정, 역현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제나라는 산동반도 부근을 말하는 것인데, 삼국지는 왜 진한의 말이 하필 연나라, 제나라의 말과 같지 않다고 기록했던 것일까?
  이는 중국 사람들이 생각하기에 진한이 제나라나 연나라와 가까이 위치하고 있는 데도 제나라 말도 아니고, 연나라 말도 아닌 오히려 진나라 말과 비슷한 말을 사용하고 있어 이상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마한이나 변한은 중국말과는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후대의 백제, 가야 역시 중국말과는 다른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고, 백제, 신라, 가야 상호간에도 어느 정도 의사소통은 되었겠지만 약간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는 지금 한반도가 좁은 지역임에도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 서울 등의 언어가 많이 다르다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대륙에서도 지역에 따라 약간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은 틀림없을 것인데, 문제는 그 언어가 지금 우리가 한반도에서 사용하는 한국어와는 전혀 다른 언어였을 것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또 어떠한 언어를 사용했을까?
  후한서 고구려 전에는,
  "동이들에 서로 전해오기를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그런 이유로 말하는 법이 같은 데가 많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지 고구려 전에도,
  "동이의 옛말에는 고구려가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언어와 여러 가지 많은 것이 부여와 같지만 성격이나 기질, 복장은 다름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부여와 고구려는 거의 비슷한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고구려는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적성현 후성진(后城鎭) 부근에서 건국되었고, 고구려의 평양성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이었다.  따라서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는 또 다른 언어를 사용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삼국을 지나 고려가 한반도 황해도 개성에 도읍했다고 역사를 이해하고 있으나 신라가 한반도 경주가 아닌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일원을 중심으로 천년간을 존속했다면 고려의 중심 강역이 한반도 일리는 없고, 당연히 지금의 난하를 중심으로 한 대륙이었을 것이므로 고려 때의 언어 역시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한국어는 아닐 것이다.

 

☆ 고려의 도읍 개경은 한반도의 황해도 개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관성현으로 비정된다.

 

  그런데 조선이 건국되어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어 그때부터 한반도 서울은 조선의 중심이 되는데, 이는 결국 조선 태조 이성계가 대륙을 떠나 한반도의 한양(현 서울)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말이 되고, 조선 세종은 한반도의 백성들이 말과 글이 달라 의사를 자유롭게 전달할 수 없다하여 한글을 창제하게 된다.
  고조선 때로부터 고려 때까지 수천 년 간 아무 불편을 모르고 쓰던 말과 글이 유독 조선 세종 때에 이르러 갑자기 불편해졌을 리가 없음을 감안하고, 필자의 주장을 결부시켜 본다면 곧 우리의 선조들이 대륙에서 쓰던 말과 한반도의 토착민들이 쓰는 말이 전혀 달랐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최만리 같은 사람은 옛부터 쓰던 한문이 있는데, 굳이 한글을 새로 만들 필요가 있느냐고 한글 창제에 반대했던 것이고, 실제 최만리는 대륙에서 건너온 도래인이었을 것이므로 한국어는 말할 줄도 몰랐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래인이었던 조선 왕실 및 사대부들이 사용하던 말과 한반도의 토착민들이 사용하는 언어는 확연히 달랐을 것이다.
  조선 왕실에서 대륙에서 쓰던 말을 언제까지 사용했는지는 지금 알 수 없고, 조선 초기에 대륙으로부터 한반도로 건너와 살았을 우리의 선조들도 처음에는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한국어와는 확연히 다른 언어를 사용하다가 언젠가부터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한국어를 사용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조선 시대 사대부들이 한글을 언문이라 업신여기며 왜 그렇게 한문에 집착했으며, 조선시대 과거시험을 왜 한글이 아닌 한문으로 보아야만 했는지, 조선말까지 왜 한문이 공식문자였는지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사대부들의 입장에서는 한문이 곧 대륙에서부터 사용하던 고유의 문자였을 것이기 때문에 쓰고 말하는데 아무런 불편이 없었을 것이고, 한글은 상민인 한반도의 토착민들이나 배우는 글자라고 업신여겼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조선 멸망과 함께 사대부들 역시 몰락하게 되었고, 한문은 주인의 자리를 한글에게 내 주어야 했던 것인데, 이렇듯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는데 한 500년쯤 걸린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