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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는 해(解)씨와 고(高)씨 두 성씨로 왕위가 이어졌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2. 27. 01:22

윤여동설 - 고구려는 해(解)씨와 고(高)씨 두 성씨로 왕위가 이어졌다 - 최초주장

 

 

  재사(再思)는 유리왕 말기에 유리왕의 막내아들이었던 여진이 물에 빠져 죽은 후 유리왕의 양자가 되었던 사람이다.
  삼국사기를 보면, 그는 원래 구려 사람으로서 원래 고씨였을 것이다.
  재사는 성장하여 부여여인과 혼인을 하였고, 슬하에 궁을 낳았는데, 후일 궁이 고구려의 왕위에 오르게 된다.

 [삼국사기 기록상으로는 궁, 수성, 백고를 형제로 기록하고 있으나 실제로 궁과 수성, 백고가 친형제였을지는 의문스러운 점이 많다. 혹시 궁의 조카가 수성이었고, 또 수성의 조카가 백고는 아니었을까?]
  따라서 6대 태조대왕으로부터 28대 보장왕까지 고구려의 왕통은 모두 이 재사의 후손으로 이어졌으므로, 고구려의 왕실은 해씨[시조 주몽왕(추모왕)으로부터 5대 모본왕까지 주몽왕의 친손]와 고씨[6대 태조대왕으로부터 28대 보장왕까지 주몽왕(추모왕)의 외손] 두 성씨로서 왕위가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부여부인은  유리왕의 양자였던 재사에게 시집와 궁을 낳았다.

  그녀를 부여부인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그녀의 고향은 원래 북부여의 도읍 적성 부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궁은 후일 고구려의 6대 태조대왕이 되었다.
  고구려 5대 모본왕이 정신이상으로 날이 갈수록 포악하여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으며, 누울 때는 사람을 베고 눕고, 만일 사람이 조금만 움직이면 용서 없이 죽이며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로 쏘아 죽였다.
  그리하여 시종인 두로가 자기도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 왕을 죽여 버렸다.
  이때 모본왕의 아들 익이 태자로 봉해져 있었으나 고구려의 대신들은 후환을 두려워하여 모본왕의 아들인 태자 익을 왕위에 올리지 않고, 유리왕의 양아들 고추가 재사에게 왕위에 오르기를 권유한다.

 

  고추가(古鄒加)란 왕의 형제들을 부르는 존호로써 조선시대의 대군(大君) 또는 종묘사직에 제사지낼 때 제주가 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종손에 해당한다.

 

  그러나 재사는 자기가 유리왕의 혈통을 이어받은 왕손이 아니라 양자였기 때문인지, 

  대신들이 왕위에 오르기를 권유하자

  "내 나이 이미 불혹을 넘어 내일 모레면 50이요, 나는 이미 늙었으니 젊고 유능한 사람을 찾아 보시요"라고 하면서 왕위에 오르기를 거부하였다.      

  대신들이 몇 번을 찾아와,
  "지금 왕가에 당신말고는 왕위에 오를 마땅한 사람이 없으니 왕위에 오르셔야 합니다"
했으나 재사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오지도 않았다.
  그러기를 며칠..........................
  그러자 대신들은 할 수 없이 재사의 아내인 부여부인을 설득했다.
  "지금 왕위에 오를 수 있는 분은 재사 고추가 뿐이신데 고추가께서 저렇게 고집을 버리지 않으시니 난처합니다. 왕위란 한 시도 비워두어서는 아니 되는 것인데, 벌써 여러 날 비어 있습니다. 어찌해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글세 나도 무어라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워낙 원칙을 고수하는 고집스런 분이시라................."
  
  사실 재사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극구 사양하고 유리왕을 고맙게 생각하는 데에는 그만한 사연이 있었는데, 재사는 어릴 적에 유리왕의 양자가 되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유리왕 말년에 왕의 막내아들이었던 여진이 물에 빠져 죽는 사건이 있었다. 
  이 때 여진의 나이는 열 살쯤이었다. 칠십이 다 되어 얻은 늦둥이였던 만큼 유리왕은 여진을 몹시 귀여워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여진이 졸본에 있는 할아버지인 주몽의 사당에 가보고 싶다고 하였다. 유리왕은 기특하다 싶어 다녀오라고 허락을 했었는데, 그만 비류수 강물에 빠져 죽고 말았던 것이다.

  유리왕은 상심했다. 

  그런데 유리왕의 배다른 여동생의 증손자인 재사가 죽은 여진 또래였다.

  그리하여 유리왕은 여동생에게 그 아이를 양자로 삼게 달라고 하였고, 여동생도 유리왕의 허전함을 이해하고 그 아이를 유리왕의 양자로 삼도록 하였다.

  재사는 아주 똑똑하고 귀여운 아이였다.

  그리하여 유리왕은 죽은 여진 대신 재사를 양아들로 삼고 재사를 친아들 같이 사랑하다가 얼마후 죽었다.

  이렇게 유리왕의 양아들이 된 재사였던 만큼 유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대무신왕도 재사를 친동생같이 여겼고, 재사가 혼인할 나이가 되자 부여여인과 혼인을 시켜 주었다.      

   대신들은 회의를 하였다.
  "재사 고추가가 왕위에 오르기를 저토록 사양하니 어쩔 수 없소.
  아직 나이는 어리지만 그의 큰아들인 궁을 왕위에 올리고 그 어머니로 하여금 수렴청정을 하게 해야겠소." 
  그리하여 대신들은 부여부인을 찾아와 큰아들인 궁을 왕위에 올리자고 제의했다.
  부여부인은 "궁은 이제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애입니다. 어찌 왕위에 오를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대신들은 "나이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성장할 때까지 부인께서 태후가 되셔서 수렴청정을 해주시면 될 것이 아닙니까?" 
  이제 겨우 일곱 살인 큰아들 궁을 왕위에 올리고 부여부인 자신이 태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해달라는 말이었다.
  부여부인은  남편인 재사의 생각이 어떨지 걱정이 되었지만 지금 왕위에 오를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여 승낙하였다.
  당초에 대신들이 재사에게 왕위에 오르기를 권했을 때 부여부인이 그것을 원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녀 입장에서는 재사가 왕위에 오르면 자기는 왕후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반대할 이유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남편인 재사가 극구 왕위에 오르지 않겠다고 하여 아쉽게도 왕후가 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지금 대신들이 자기의 큰아들인 궁을 왕위에 올리고 자기에게는 왕태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해달라고 하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행운이 또 있을까?
  그녀의 입장에서는 유리왕을 직접 만나본 적도 없고, 남편인 재사와 같이 그 은혜에 대하여 굳이 부담을 느낄 필요도 없었으므로 남편인 재사보다는 행동이 자유로운 상태였다.     
  그리하여 그녀는 서기 53년에 일곱 살짜리 자기의 큰아들 궁을 왕위에 올리고 자기 자신은 왕태후가 되어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아들인 궁이 성년이 될 때까지 약 10년쯤 수렴청정을 했다.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 태후 부여부인은  요서에 10개성을 쌓아 한나라의 침공을 방비하고, 그 다음해에는 동옥저를 쳐서 그 땅을 빼앗아 성읍으로 만들고, 동쪽의 대해에 이르기까지 국경을 넓혔다.
  부여부인 아니 왕태후는 정치에도 능력이 있는 유능한 여인이었다.
 

 

  이렇게 태조대왕 궁이 고구려의 왕위에 오름으로 해서 고구려는 추모왕(주몽왕)의 아들의 후손(친손)으로부터 딸의 후손(외손)으로  은연중에 역성 혁명이 일어나게 되는데,

   고구려의 왕위는 주몽의 성씨인 해씨와 추모왕의 딸의 증손자인 재사의 성씨인 고씨 두 성씨로서 705년 왕위를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