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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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이병도가 정말 우리 역사를 왜곡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2. 29. 02:11

윤여동설 - 이병도가 정말 우리 역사를 왜곡했을까? - 최초주장

 

 

 거란지도(아주 잘 그려진 지도는 아니지만 우측에 고려, 백제, 신라계라고 표시되어 있고, 우측 상단에는 장백산, 말갈, 발해, 여진 등의 명칭이 보이는 것으로보아 장백산은 지금의 대흥안령산맥을 말하는 듯 하다.  이 지도는 발해 주변에 대한 지도로서 북해란 곧 발해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중국 고지도(가라국과 유구국이 중국 남쪽에 위치했다고 잘못 그려져 있고, 황하가 발해가 아닌 동중국해로 흐른다고 그려져 있다[동중국해로 흐르는 것은 폐황하이다].

 북경이 표시되어 있고, 조선의 위치가 지금의 한반도로 그려져 있으며 백두산이 표기되어 있고, 장백산은 장성 북쪽에 그려져 있어 장백산과 백두산을 별개의 산으로 그려 놓았다. 조선이 대륙에서 한반도로 도읍을 옮긴 후인 명, 청대에 그려진 지도일 것이다)  

 

  지금 많은 사람들은 우리의 역사가 일제 강점기에 반도사관으로 왜곡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필자는 그와는 전혀 의견을 달리한다.
  왜냐하면 사서의 기록들을 보면 우리 역사는 일제강점기 이전에 이미 반도사관으로 왜곡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다산 정약용은 1762년 영조 38년에 태어나 1836년 헌종 2년에 75세의 나이로 죽은 조선 후기 사람으로서 일제강점기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인물인데, 그가 지은 아방강역고라는 역사지리서를 보면 사서에 언급되고 있는 지명 모두를 한반도 내로 비정하고 있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있다.
  대표적으로 아방강역고의 낙랑고 조를 보면,
  "낙랑군은 본래 조선현에 있었으니 현은 지금의 평양이다.
  패수는 지금의 대동강 유역 땅이고, 점제는 지금의 연안·배천(白川) 땅이며, 수성(遂城)은 수성(隧城)이니 지금의 의주·창성 북쪽이 그 터가 아닌가 한다...............
  열구는 지금의 강화로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강화를 혈구현이라 했는데 혈과 열은 음이 비슷하다................대방·함자·열구·탄열·둔유·동이 등은 모두 지금의 경기 서북쪽에 있으니 본래 임둔의 속현으로 낙랑에 합한 것이요....................한지(한서지리지)의 주에 소명은 남부도위의 치소라 했는데, 이는 곧 지금의 춘천이다. 백제사에서 나라 동쪽에 낙랑이 있다는 말과 우두산성을 치려한다는 말을 참고하면 낙랑(남부)도위의 치소가 춘천에 있었음이 의심의 여지가 없어 한지의 말과 부합된다. 지금 춘천에 소양강이 있는데 소양이란 소명의 북쪽에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 아닐 수 없다.
  함자는 지금의 이천·안협·삭녕·연천 등 임진강이 커지기 시작한 땅인 까닭에 그 주에 대수가 서쪽으로 대방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모든 지명을 한반도 내로 비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우리가 학창시절 학교에서 배웠던 국사지식이 바로 이 정약용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고대사가 일제 강점기에 반도사관으로의 역사왜곡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는 그때의 조선사편수회를 역사왜곡의 원흉이라 신랄하게 비난한다.
  그러나 정약용은 일제 강점기 훨씬 이전인 조선 후기 사람인데도 그의 주장이 후세 이병도의 주장과 거의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병도가 직접 우리 역사를 왜곡한 것이 아니라 정약용의 주장과 거의 같은 주장을 했을 뿐이라는 말이 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병도의 반도사관 만을 신랄하게 비판할 뿐 정약용의 반도사관에 대해서 비판하는 사람은 별로 보지 못했으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따지고 보면 이병도보다 정약용이 훨씬 먼저 그러한 주장을 했으니 이병도를 비난한다면 그에 앞서 정약용을 먼저 비난해야 마땅한 것 아닌가?
  사마천의 사기 하본기의 주에는 진 태강지리지를 인용하여 "樂浪 遂城縣 有碣石山 長城所起(낙랑 수성현은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 기록하고 있고, 진서지리지에는 "樂浪郡 遂城縣 秦築長城之所起(낙랑군 수성현은 진나라 때 쌓은 장성이 시작된 곳)" 이라 했으며, 통전 권186 변방2 동이 하 대당 무덕4년 조에는 "碣石山在 漢樂浪郡 遂成縣 長城起於此山(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정약용은 이러한 기록들이 있음을 뻔히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러한 기록들 모두를 한반도로 끌어들여 해석함으로써 반도사관을 부채질한 사람이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정약용은 낙랑을 한반도 평양으로 비정했고, 패수를 대동강이라 해버리고 말았다.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 옛 왕검성이고, 전한낙랑군의 치소였으며,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비정되는 곳이고, 후한낙랑군의 치소는 북경 동북쪽 하북성 흥륭현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렇다면 정약용은 왜 그 수많은 중국 사서들의 기록을 무시해버리고 우리 역사에 나타나는 지명들을 한반도에 비정해 해석하려 했던 것일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이는 정약용이 한반도에서 살고 있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정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은 1481년에 조선 9대 성종의 명을 받아 노사신 등이 동국여지승람을 편찬했는데, 오류가 있다하여 수 차례의 수정을 거쳐 11대 중종 25년인 1530년에 이행 등에 의해 증수된 후 신증동국여지승람이란 이름으로 거듭난 책으로서 무려 50여년 동안 수정에 수정을 거친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 역사지리서인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편을 보면, 평안도 지도가 붙여져 있고, 평양부의 건치연혁에는 평양을 본래 삼조선의 도읍 왕검성이라 했고, 왕검성이 곧 한사군의 낙랑군이라 했으며, 고구려의 평양성, 고려의 서경이라 기록해 놓고 있기 때문에 이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따라 우리 역사를 해석한다면 지금의 북한 평양이 곧 왕검성이요, 낙랑군의 치소요, 평양성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중국 사서들은 신증동국여지승람과는 전혀 다른 기록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중국 사서들과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 확연히 다르다는 말이 되는데, 사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목적이 있어 국가 차원에서 의도적으로 역사를 왜곡한 책이다.

 

☆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이 대륙의 개경으로부터 한반도의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조선이 고조선, 삼한, 삼국, 고려의 정통성을 이은 나라라고 하기위해 고려로부터 그 이전의 대륙역사 모두를 한반도로 끌어들여 편찬한 왜곡된 관찬역사지리서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그를 눈치채지 못하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을  정확한 역사기록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중국 사서들의 기록을 부정할 수 밖에  없었고,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의 고대사를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석하려 했던 것이나, 중국 고대의 그 수 많은 역사가들이 모두 바보가 아닌 이상 자신들이 통치하던 낙랑군의 위치도 몰라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그 부근이 진(晉) 낙랑군 수성현이라고 잘못 기록했을 리는 없지 않은가?

   

  사실이 그러하다면 결국 정약용이 의도적으로 우리의 모든 역사적 지명들을 한반도로 끌어들인 것이 아니라 결국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먼저 한반도로 끌어들였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따라서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바로 최초로 우리 역사를 왜곡한 주범이라 할 수 있는 것이고, 정약용이나 이병도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 목적이 있어 왜곡 편찬된 역사지리서라는 것을 모른 채 그 기록에 따라 우리 역사를 한반도에 적용해 해석하려 했던 것뿐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