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김헌창이 세운 한달 왕국 장안국의 위치 - 최초주장
우리는 고려 인종 때인 1135년에 일어났던 묘청의 난에 대해서 잘 알고 있고, 그때 묘청이 서경을 중심으로 세운 나라 이름이 대위국(大爲國)이었으며,
또한 신라 헌덕왕 때인 822년에 일어났던 김헌창의 난을 알고 있고 그때 김헌창이 웅천주를 중심으로 꽤나 넓은 강역을 차지하고 장안국(長安國)이라는 나라를 세웠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 서경을 한반도 평양이라 하고,
웅천주는 충남 공주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함으로써,
묘청은 한반도의 북한 평양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었고,
김헌창은 한반도의 충남 공주를 중심으로 충청, 전라, 경상남도 지역을 차지하고 나라를 세웠었던 것이라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데, 과연 이것이 역사적 사실인 것일까?
우리는 지금 한나라 때의 낙랑군이 한반도 북한 평양 부근에 위치했었다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지만 중국 사서들에는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 낙랑군 수성현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필자주 : 지금 갈석산이라는 이름의 산은 발해 북쪽 진황도 창려현에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지명이 옮겨진 것으로서 고대의 원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있는 지금의 낭아산이다]
수서나 북사, 신·구당서 등에는 우리가 한반도 경주를 중심으로 존재했을 것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는 곧 우리의 신라가 지금의 중국 북경 동쪽 부근에 위치했었다는 말이고, 신라가 통합했던 백제 역시 발해 북쪽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가야 역시 북경 동쪽 부근에 위치했다가 신라에게 병합된 것이고, 고구려의 평양성은 그 북경 북쪽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니 결국 우리 삼국의 중심 강역은 한반도가 아니라 바로 발해 북쪽 곧 북경, 하북성, 요녕성 부근이었던 것이다.
이는 결국 묘청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일원을 차지하고 난을 일으켰던 것이고,
김헌창은 북경 동쪽 진황도 노룡(필자주 : 이곳이 백제의 웅진이었다) 부근을 차지하고 난을 일으켰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신라 38대 원성왕의 이름은 경신이고, 왕비는 각간 김신술의 딸이다.
아들이 없던 37대 선덕왕이 785년 1월 13일에 후사를 정하지 못하고 죽자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왕의 조카인 주원을 왕으로 옹립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때 주원은 금성 북쪽 2십리 되는 곳에 살고 있었는데, 한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폭우가 내려 알천의 불이 불어나 주원이 건너올 수가 없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왕위란 사람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인데, 오늘 폭우가 내리는 것은 혹시 하늘이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지금의 상대등 경신은 전 임금의 아우로써 본래 덕망이 높아 임금의 체통을 지녔으니 그를 왕으로 추대하는 것이 어떻겠소?" 하니 사람들의 의견이 순식간에 그렇게 모아져 경신을 추대하여 왕위에 올리자 억수같이 퍼붓던 비가 그쳐 사람들이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경신이 주원을 배제하고 왕위에 오른 것을 후세에 이르러 합리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하늘이 주원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방해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 신라 하대인 39대 소성왕부터 52대 효공왕까지 그리고 56대 경순왕은 모두 38대 원성왕의 혈손들이다. 이때부터 신라는 서서히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어찌되었든 경신은 왕위에 올라 나름대로 열심히 해보려고 한 것으로 보이는데, 하늘은 더 이상 그를 도와주지 않은 것 같다.
하늘이 그를 왕위에 올려 주었으면 계속 좀 도와 주실 일이지 왕위에 올려놓고 다시 시련을 주는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왕비 김씨 역시 왕비에 오를 그때는 좋았을지 모르지만 왕비의 자리에 올라 있던 내내 마음 고생이 매우 심했다.
큰아들 인겸을 태자로 봉했더니 얼마 후에 죽어버리고, 다시 작은아들 의영를 태자로 봉했더니 또 죽어버렸다.
그리하여 다시 죽은 큰아들 인겸의 아들인 큰손자 준옹을 태손으로 봉하여 간신히 왕위를 전했는데, 그가 바로 신라 39대 소성왕이었고, 왕위가 그 아들 애장왕으로 이어졌으나 숙부인 언승(41대 헌덕왕)이 그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아 가게 되어 후손들끼리 피비린내를 풍기기도 한다.
그런데 이때 주원이 왕위에 오르지 못했던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있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주원의 아들 김헌창이었다.
김헌창에 대한 기록은 40대 애장왕 8년(A.D.807) 조에, "봄 정월 이찬 김헌창이 시중이 되었다"는 기록과 함께 등장하는데, 애장왕이 809년에 숙부인 헌덕왕에게 시해 당한 후에도 김헌창이 그대로 관직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아 김헌창 역시 반정에 적극 가담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헌덕왕 5년(A.D.813)에 무진주도독으로 부임했다가, 다음해인 814년에 다시 서라벌(금성)로 올라와 시중이 되었다가, 816년에는 다시 청주도독으로 부임하고, 821년에는 또 다시 웅천주도독으로 부임하는 등 주로 외직으로 나가 있게 된다. 어찌보면 헌덕왕이 그를 경계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외직에 나와 근무하고 있는 김헌창의 마음 속에는 36년 전인 785년에 자기 아버지 김주원이 비 때문에 알천을 건너지 못함으로써 왕위에 오르지 못한 것이 그렇게 한스러울 수가 없었고, 그때 만약 자기 아버지 주원이 왕위에 올랐더라면 지금 자신이 웅천주도독이 아니라 신라의 왕위에 올라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듯 하다.
그리하여 그는 그 한을 풀기 위하여 스스로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오르기로 마음먹고, 822년 3월에 이르러 자신이 도독으로 있는 웅천주를 거점으로 난을 일으켜, 나라를 세워 국호를 장안(長安)이라 하고, 연호를 경운(慶雲)이라 하고 왕위에 오른다. 그리고는 무진주, 완산주, 청주, 사벌주[필자주 : 비사벌의 오기로 보인다]와 국원경, 서원경, 금관경의 일부를 소속시켜 자기 영역으로 삼게 된다.
대개 지금의 중국 북경 동쪽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러자 신라에서는 김헌창의 난을 토벌하기 위하여 군사들을 출동시키게 되는데, 일길찬 장웅이 선발대로 출발하고, 잡찬 위공과 파진찬 제릉이 뒤를 이어 출발하고, 이찬 균정은 좌군, 잡찬 웅원은 우군, 대아찬 우징은 중군을 맡아 출정한다.
김헌창 군이 요로를 막고 저항했으나 패하여 결국 웅진성으로 들어가게 되었고, 토벌군이 웅진성을 포위하고 열흘 동안 공격하자 성이 함락될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그러자 헌창은 화를 면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자살해버린다.
그렇게 되자 그를 따르던 사람들은 그의 머리를 베어 몸뚱이와 머리를 각각 따로 묻어 두었는데, 성이 함락된 후 그의 몸뚱이는 고총(옛 무덤)에서 찾았고, 그의 친족과 무리 239인을 잡아죽임으로써 김헌창의 난은 약 1개월만에 평정된다.
한달 천하로 김헌창의 장안국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도망쳐 죽음을 면했던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은 3년 뒤인 825년 봄 정월에 이르러 고달산적 수신 등 1백여 명과 함께 또 다시 모반을 일으킨다.
그들은 평양에 도읍을 세울 목적으로 북한산주를 쳤으나 도독 총명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붙잡아 죽임으로써 범문의 난 역시 평정되어 이들 부자가 일으킨 난은 한낱 일장춘몽으로 막을 내리게 되고 만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웅천주를 거점으로 일어났던 이 김헌창의 난이 한반도의 충남 공주를 거점으로 일어났던 것이라고 해석함으로써 김헌창이 바로 지금 충남 공주의 도독으로 있었고, 난이 끝난 후 죽은 김헌창의 몸뚱이가 발견된 고총이 바로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릉을 말하는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이는 무령왕릉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능 입구에 있던 석수의 다리가 부러져 있었고, 부장품들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둔 추측이었는데, 앞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고려로부터 그 이전 우리 고대 역사의 중심 강역은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의 발해 북쪽 대륙이었다.
그리고 웅천주(웅진)란 지금 한반도의 충남 공주 부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북성 진황도 노룡을 말하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삼국사기 기록 속의 웅천주이고, 웅진이다.
따라서 김헌창의 난은 발해 북쪽 지금 중국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 부근에서 발생했던 사건이었지 한반도의 충남 공주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었으므로, 김헌창의 몸뚱이가 충남 공주의 무령왕릉 속에서 발견되었을 리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