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내몽골 오르도스형 동복(청동솥)이 왜 한반도 김해에서 발굴되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3. 9. 19:34

윤여동설 - 내몽골 오르도스형 동복(청동솥)이 왜 한반도 김해에서 발굴되었을까? - 최초주장

 

                                                                       

 

                                                        

 

 

 

  오르도스란 지금의 내몽골 악이다사(鄂爾多斯)를 말하는 것으로서 섬서성 북쪽에 바로 위치하는데, 그 부근에서 출토된 동복과 동일한 형태의 동복(청동솥)이 한반도 김해에서도 출토되었고, 경주에서는 기마인물형토기가 발굴되어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따라서 오르도스 지역과 한반도 남쪽 지역 사이에 문화적 교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떻게 한반도 김해에서부터 무려 만리쯤이나 멀리 떨어져 있고, 대륙의 내륙 깊숙한 곳에 위치한 그곳의 유물과 거의 똑같은 동복(청동솥)이 한반도 남쪽에서 출토될 수 있었던 것일까?

 

☆ 형태가 같으므로 거의 동일 시기의 유물이라 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어느 사람은 신라의 왕들이 흉노의 후예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가야의 시조인 수로왕이 그곳 오르도스 지역에서 이주해온 사람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한반도 남쪽에서  출토된 유물이 오르도스 출토 유물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주장했을 것이다.
  그런데 경주 부근의 고분들을 발굴해봐도 왕릉에 견줄만한 수준 높은 부장품들이 출토되기는 하였으나 그 고분의 주인공이 신라 어느 왕이라는 것을 밝혀줄 수 있는 금석문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은 왕릉급 무덤이라는 의미로 "총(塚)"이라고 부른다. 황남대총, 천마총, 금관총 등이 그 예이고, 김해 부근의 옛 무덤들은 그냥 고분이라 부른다. 

   또한 학자들 중에는 4-5세기 경 한 때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고 홀연히 사라진 훈족이 한민족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는 한반도 남쪽에서 출토된 동복과 금관 등의 유물이 훈족의 유물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고, 기마인물형토기가 바로 훈족의 모습 기록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그렇게 추정했을 것이지만, 사실 훈족은 오르도스 부근 사람들이 한 때 서쪽의 유럽으로 진출했던 흔적일 뿐 한반도가 훈족의 고향은 아니다. 

  한반도 남쪽에서 출토되는 오르도스식 유물은 지금의 내몽골 오르도스 지역 사람들이 그곳에서 한반도로 이주해와 남긴 흔적이기 때문에 이를 가지고 훈족의 발원지를 한반도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것은 그렇다치고 그렇다면 내몽골 오르도스 지역에 살던 사람들은 어떠한 연유로 만리나 떨어진 한반도 남쪽에 그 문화의 흔적을 남기게 되었을까? 
 

  필자는 그 원인 중 하나는 옛날 왕망의 신나라가 멸망하고 후한이 건국되자 신나라에 적극 협조했던 흉노족인 투후 김일제의 후손들이 한반도로 도망쳐 온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서기 365년경에 대륙에서 백제 13대 근초고왕과의 왕위다툼에서 패한 무광왕(12대 계왕의 아들)이 한반도로 도망쳐 와서 건설했던 반도백제도 있었기 때문에 한(韓)의 문화 역시 한반도로 유입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한반도에는 원래 주인이었을  원주민들도 살고 있었을 것이다. 

  고인돌 문화를 가지고 있던 한반도의 원주민 부족 그리고 옹관묘문화를 가지고 있던 한반도 원주민 부족 등도 존재했겠으나 대륙에서 온 강한 세력들에게 밀려 소멸되어 갔을 것이다. 

   그렇게 다민족이 섞여 살면서 역사가 이어졌을 것인데, 한반도 동남쪽은 경주와 김해 부근의 흉노문화 가능성이 많고, 한반도 서쪽은 반도백제가 고인돌문화 부족과 옹관묘문화 부족을 병합하게 되어 그 문화가 이어지지 못하고 단절된 것이 아닌가 싶은데, 우리는 지금 이러한 현상들을 고조선, 삼한, 삼국역사에 대입시켜 풀려고 하다보니 얽히고 설켜 버린 것이다. 

  한반도에 고조선은 없었고, 삼한도 없었으며, 삼국과 고려도 사실은 없었기 때문이다.

  한반도의 역사는 새로운 시각으로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   

 
 ☆ 신·구 당서는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고,

또 중국 사서들은 고구려와 백제는 함께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했고,

백제는 신라의 서쪽에 있었고, 가야는 신라의 남쪽에 있었다고 했으며, 고구려는 그 서북쪽 또는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하므로 이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를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고,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중국 북경 일원을 말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