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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위나라 관구검 기공비 비편이라 하는 것은 관구검비가 아니다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3. 11. 00:24

윤여동설 - 관구검기공비 비편이라 하는 것은 관구검비가 아니다 - 최초주장

 

                                                                         

  서기 1906년 길림성 집안 판석령에서 도로공사를 하다가 손바닥 크기보다 조금 큰 비편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그 비편에는 "正始三年高句驪反/ 督七牙門討句驪五/ 復遣寇六年五月旋/ 討寇將軍巍烏丸單于/ 威寇將軍都亭侯/ 行裨將軍領"이라 새겨져 있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내용도 정확히 알 수 없는 그 비편 중의 "정시 3년에 고구려가 반했다"는 기록을 보고는 이 비편이 위나라 관구검기공비의 일부였을 것이라고 말들하고 있다.
  이는 정시 3년에 고구려의 동천왕이 장수를 보내 요동 서안평을 침공했고, 정시 5년에 관구검이 격파했다"는 삼국지나 양서의 기록과 정시 7년에 위나라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공해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장군 왕기를 시켜 동천왕을 쫓아 남옥저를 지나 숙신 남쪽 경계까지 이르러 그곳에서 돌에 전공을 새기고, 또 환도산에도 불내지성(不耐之城)이라고 새기고 돌아갔다는 사서의 기록들을 보고 그렇게 해석한 것이라 판단되는데, 왕기가 동천왕을 쫓아 숙신 남쪽 경계까지 갔던 때는 정시 7년인 서기 246년이었지, 정시 3년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서의 기록들을 보면 "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지숙신씨남계 각석기공)"이라 하여 "숙신 남쪽 경계에 이르러 기념으로 돌에 공을 새겼다"고만 기록되어 있을 뿐 비석을 세웠다는 말은 없다. 따라서 각석기공이란 말은 산에 있는 큰 바위의 넓직한 면에 공을 새겼다는 말인 것이다.

 

 

 

 

 

☆[삼국지 관구검열전 중]
正始中, 儉以高句驪數侵叛, 督諸軍步騎萬人出玄 , 從諸道討之. 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 進軍沸流水上, 大戰梁口, 梁音渴. 宮連破走. 儉遂束馬縣車, 以登丸都, 屠句驪所都, 斬獲首虜以千數. 句驪沛者名得來, 數諫宮, 宮不從其言. 得來歎曰:「立見此地將生蓬蒿.」遂不食而死, 擧國賢之. 儉令諸軍不壞其墓, 不伐其樹, 得其妻子, 皆放遣之. 宮單將妻子逃竄. 儉引軍還. 六年, 復征之, 宮遂奔買溝. 儉遣玄 太守王 追之, 過沃沮千有餘里, 至肅愼氏南界, 刻石紀功, 刊丸都之山, 銘不耐之城. 諸所誅納八千餘口, 論功受賞, 侯者百餘人. 穿山漑灌, 民賴其利.

 

  그리고 우리는 아직까지 요동 서안평의 정확한 위치에 대하여 알지 못한다.
  어느 사람은 지금의 압록강 하류를 서안평이라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요하의 하류를 서안평이라 하기도 하는데, 필자는 서안평의 위치를 북경 부근으로 비정하고 있다.
  또한 필자는 남옥저를 지금의 내몽골 적봉시 객라심기 일원으로, 숙신(말갈)을 대흥안령산맥 부근으로 비정하며, 말갈 중에 가장 남쪽에 위치했었다는 속말말갈의 위치를 내몽골 파림좌기, 파림우기 부근으로 비정한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예와 맥을 지금의 내몽골 고륜기, 능원 부근으로 비정하고 있다.  
  따라서 필자의 주장대로라면 동천왕을 쫓아 온 왕기는 숙신 남쪽으로서 북옥저에 해당하는 지금의 내몽골 옹우특기 부근 어디쯤의 넓직한 바위에 자신들의 공적을 새겼을 것이고, 또 돌아가다가 환도산(지금의 북경 북쪽 회유구 발해진 부근)에 이르러 다시 불내지성(不耐之城)이라고도 새겼을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아무 것도 밝힐 수 없는 비편 한 조각만을 보고 그 비편이 관구검기공비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 있었는지 필자로서는 매우 의아하다.
  그 비편의 비문 중에서 관구검과 연관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는 정시(正始)라는 연호뿐인데, 어떻게 그 비편이 관구검기공비의 일부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그렇게 작은 비편이라면 얼마든지 이동이 가능하므로, 설령 그 비편이 관구검과 관련 있는 것이라 해도 그 비편이 발견된 지점에 꼭 비석이 세워졌었다고 할 수도 없고, 필자가 보기에 관구검군은 길림성 집안은 고사하고 지금의 요하도 건넌 적이 없으니 길림성 집안의 판석령에 비석을 세웠을 리도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비편은 관구검기공비의 일부가 아니라 전혀 다른 내용의 비석일 것이므로 그 비문 조각을 근거라 하며 환도산성이 집안 부근에 있다는 말을 한다는 것은 소가 웃을 일이고, 현토태수 왕기가 숙신 남쪽 바위에 새겼다는 글을 집안 부근에서 찾으려 한다는 것 역시 부질없는 짓이다.
  우리의 고대 역사는 첫 단추가 잘못 끼워져 있어 이렇듯 곳곳에서 헷갈리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