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한사군(漢四郡)은 한반도에 설치되지 않았다 - 최초주장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발해의 산해관 노룡두이다. 앞에 관광객을 싣고 노룡두와 해신묘 앞바다를 한바퀴 돌며 구경 시켜주는 모터보트가 한가롭게 놓여있다.]
지금 우리 모두는 위만조선의 도읍이었던 왕검성(왕험성이라고도 한다)이 북한의 평양을 말하는 것으로 배웠고 그렇게 알고 있다.
그리하여 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순체와 양복이란 두 장군을 보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설치한 한사군이 지금의 북한 지역을 나누어 설치되었다고 역사를 이해한다.
즉 육군인 순체는 지금의 요하 쯤에서 출발하여 압록강, 청천강을 건너고, 대동강을 건너 왕검성으로 향했고, 수군인 양복은 산동반도를 출발해 동쪽으로 서해(황해)를 건너 대동강을 타고 올라와 왕검성에 도착해 포위함으로써 위만조선을 멸망시켜 그 땅을 임둔군·낙랑군·진번군·현토군의 네 군으로 나누어 통치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인의 생각과는 다르게 한사군의 설치지역에 대해서 학자들 사이에서는 아직까지도 주장들이 서로 달라 명확한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 지역에서 한사군을 밝혀줄 확실한 물증이 나타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 지금까지 북한 평남 용강군 해운면에 있는 점제현신사비가 낙랑군 점제현이 한반도 평남 용강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증거라고 했으나 이는 낙랑군의 위치를 평양 부근으로 확정 시키기 위해 일제강점기에 원래 갈석산 부근에 있던 비석을 떼어내 한반도로 옮겨 놓고 그곳에서 발견한 것같이 연출하여 그 동네 어린이를 옆에 세워 놓고 사진을 찍어 세상에 공개한 것이라고 한다. 요즈음 일본 학자가 구석기 유물을 땅에 묻어 놓고 다시 발굴하는 수법을 썼던 것을 감안하면 비석을 한반도로 옮겨 놓고 발견했다고 하기는 쉬웠을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증거품으로 회자되는 낙랑 봉니(封泥)는 위조품이거나 오히려 평양 부근이 낙랑이 아니라는 점을 확실하게 해주는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봉니라는 것이 문서를 보내는 곳에서 중간에 개봉할 수 없도록 봉하는 것이므로 문서를 받는 곳에서 발견되는 것이 당연한데, 대동강 유역에서 낙랑태수장, 낙랑대윤장, 낙랑장사 등의 명문이 있는 봉니가 발견되었다면 이는 평양이 낙랑이 아니라 낙랑으로부터 보내온 문서를 받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러자 어떤 이는 중국 사람들이 위만조선과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실제는 한나라가 패했으나 이를 숨기고 한나라가 승리했다고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실제 설치된 적도 없는 한사군이라는 유령 군들을 설치했던 것처럼 꾸며 기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이 주장하는 주된 내용을 보면,
첫째는 사마천 생존시에 쓰여진 사기 조선전에 "조선을 평정하고 네 군으로 만들었다"고 만 기록했을 뿐 구체적으로 낙랑, 진번, 임둔, 현토라고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만약 한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나누어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토군이라는 네 군을 설치했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면 당시 살아있던 사마천이 그를 정확히 기록하지 않았을 리가 없을 것인데, 그는 "조선을 평정하고 네 군으로 만들었다"라고만 기록했을 뿐이고, 그로부터 200여 년이 흐른 후에야 낙랑·진번·임둔·현토라는 네 군의 이름이 전한서에 기록되었다는 것이 수상쩍다는 것이고,
둘째는 한나라가 삼을 홰청후에, 한음을 적저후에, 왕겹을 평주후에, 최를 온양후에, 우거왕의 아들 장을 기후에 봉한 것은 한나라가 위만조선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형식상 그들을 그 땅의 제후로 봉했을 뿐인데, 후대 반고가 전한서를 쓰면서 그를 바꾸어 진번·임둔·낙랑·현토라고 기록함으로써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한사군이라는 네 군으로 둔갑시켰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이 조선과 한나라간의 전쟁에 참여했던 장수들이 한결같이 모두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이유로 들고 있다.
즉 위산과 공손수는 전쟁 중에 처형당했고, 전쟁이 끝난 후 육군을 이끌었던 순체는 목이 잘려 저자거리에 매달리는 형벌을 받았고, 수군을 이끈 양복은 간신히 사형을 면하고 속죄금을 물고 서민으로 강등되었는데, 위만조선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한사군을 설치했다면 상을 받아야지 왜 벌을 받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 실제는 조선이 승리했고 한나라가 패했는데, 살아서 그를 지켜본 사마천이 한나라가 전쟁에서 패했다고 사실대로 기록하지 않고, 그냥 어정쩡하게 조선을 평정하고 네 군으로 만들었다고 한나라가 승리한 척 왜곡하여 기록했으며, 후대 반고에 의해 사기의 기록을 구체화시키는 과정에서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 현토군이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와 같은 주장이 사실이라면 중국 사람들은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하기 위해 사는 사람들로 치부될 수밖에 없으나 중국 사람들 같이 역사 기록 남기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없다.
전 왕조가 무너지고 새로운 왕조가 세워져 황제의 자리에 오른 사람들은 반드시 전 왕조의 역사서를 만들었다.
그들은 그것이 황제로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의무라고 생각했다는 말이 되고, 처음에 만들어진 역사서에 오류가 많다고 지적되면 그를 고쳐 다시 만드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중국 사람들은 옛 사서들에 대하여 주석하기를 좋아해 조금의 오류라도 자신의 주장과 다르면 반드시 짚고 넘어간다.
사람으로 치면 온 몸을 모두 헤집어 보고 조금이라도 병든 곳이 있으면 꼭 짚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다.
그러한 사람들이 2천여 년 간 사마천의 사기를 역사서의 바이블과도 같이 생각한다는 것은 그 기록에 오류가 많지 않다고 인정한다는 뜻인데, 사마천은 사기에 분명히 "조선을 평정하고 네 군으로 만들었다"고 만 기록했다.
그렇다면 이때 사마천은 조선을 평정한 것에 무게를 두었을 뿐 네 군의 구체적인 명칭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사마천은 사기 남월열전이나 서남이열전에도 역시 설치된 군의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따라서 곧 조선에게 그 땅을 돌려주고 조공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 될 것으로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한나라는 빼앗은 조선 땅을 다시 돌려주지 않고 전한낙랑군은 기원전 108년부터 서기 37년까지(중간에 최리의 낙랑국이 되기도 했다) 145년 간 우리 옛 강역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고, 진번군은 맥국이 되었고, 임둔군은 예(동예)가 되었으며, 현토군은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처음 설치되었던 동옥저를 떠나 관할지를 바꾸어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겨 부여의 서진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고, 원래 현토군의 관할지였던 동옥저는 낙랑동부도위가 되었다가 서기 30년 대무신왕 때 고구려에 편입되어 소멸되었다.
따라서 한사군이 설치된 적이 없다고 하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고, 억지이며, 민족주의 입장에서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한나라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하기 위해 그렇게 해석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한나라에 투항한 삼, 한음, 왕겹, 장, 최는 위기에 처한 조국을 목숨 바쳐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자기들만 살자고 한나라에 투항한 매국노들일 뿐이다.
우거왕을 죽이고 한나라에 투항한 삼은 기원전 108년에 산동반도 부근의 홰청후가 되어 옛 제나라 지역에 식읍 1천 호를 받고 살다가 조선의 포로들이 도망쳐버리는 사건이 발생하자 하옥되어 기원전 99년에 병들어 죽었고,
우거왕의 아들 장은 기원전 107년에 지금 산서성의 기후로 봉해졌다가 기원전 105년에 죽었는데, 조선사람들이 모반하여 때려 죽여버렸다. 조선 유민들은 왕자의 신분으로서 나라를 끝까지 지킬 생각은 하지 않고 한나라에 투항한 후 한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조선의 유민들을 탄압하는 장을 때려 죽여 버렸던 것이다.
그리고 왕겹은 기원전 108년 4월 지금 하북성 역현부근의 평주후가 되고 식읍 1,480호를 받았으나 다음해인 기원전 107년에 죽었고,
한음은 기원전 108년 발해 부근의 적저후가 되어 식읍 540호를 받고 살다가 기원전 91년에 죽었는데, 역적들 중에서 가장 오래 살았다.
최는 한나라에 투항하려고 오다가 죽은 조선의 재상 노인의 아들로서 왕검성을 끝까지 사수하려한 충신 성이를 죽이도록 사주한 사람인데, 기원전 107년 3월에 산동반도 부근에 위치했던 제나라 땅의 온양후(열양후라고도 한다)로 봉해졌다가 기원전 103년에 죽었다.
조국을 배신한 역적들의 나머지 여생은 그리 행복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고 어느 사람은 이들 역적들이 조선부흥운동을 했던 것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이는 왕검성을 끝까지 지키려다가 역적들의 사주를 받은 자객에 의해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우거왕과 충신 성이의 영혼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또한 한나라의 장수들이 한결같이 벌을 받은 것은 그들이 전쟁 중에 취한 태도 때문에 벌을 받았던 것이지 전쟁의 승패와는 상관이 없었다.
한 무제는 장수가 장수답게 스스로 판단을 내리지 못했다고 벌을 내린 것이었지 전투에 패했다고 벌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
전한 낙랑군의 위치
한사군의 설치 위치를 찾는다는 것은 곧 위만조선을 찾는 것이고, 옛 고조선을 찾는 일이며, 후세의 삼한과 삼국 그리고 고려의 위치까지를 찾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그 한사군 중 우리 역사와 아주 밀접한 낙랑군의 위치에 대해서 의문을 품기 시작한 것은 아주 근세의 일이다.
조선 후기까지도 북한의 평양을 낙랑군이라 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상식에 속하는 것이었고, 정약용은 평양을 낙랑군, 강원도 춘천을 낙랑남부도위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근세에 이르러 국권 회복 후 우리 스스로 삼국사기를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평양에 낙랑군을 설정할 경우 수많은 옛 사서의 기록들을 완벽하게 충족할 수 없게 되자 평양낙랑설에 의문을 제기하게 되어 논쟁이 시작되었다.
낙랑군의 위치에 대한 주장은 대개 네 설로 구분되는데,
첫째는 한반도 평양이 낙랑군이라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는 평양낙랑설과,
둘째는 평양에는 낙랑군이 있었고, 춘천에는 그 일파가 남하하여 세운 낙랑국이 있었다는 춘천낙랑국설,
셋째는 낙랑군은 한반도가 아닌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된 중국 하북성 창려현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는 창려낙랑설,
넷째는 중국 하북성 승덕시가 전한낙랑군의 치소였고, 그 일원이 전한낙랑군이었다는 필자가 주장하는 승덕시낙랑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인식해 왔고,낙랑군의 위치에 대하여 조선시대에 쓰여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라 역사를 해석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평양이 곧 낙랑군이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수백 년 간 이를 아무 의심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이를 평양낙랑설이라 한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평양부 건치연혁에는,
本三朝鮮高句麗之故都 唐堯戊辰歲 有神人降太伯山檀木下 國人立爲君 都平壤 號檀君 是爲前朝鮮 周武王克商封箕子于此 是爲後朝鮮 傳至四十一代孫準 燕人衛滿奪其地 都王險城[險一作儉卽平壤] 是爲衛滿朝鮮 其孫右渠不肯奉漢詔 武帝元封二年 遣將討之定爲四郡 以王險爲樂浪郡(본래 삼조선과 고구려의 옛 도읍이다. 당요 무진년에 신인이 태백산 단목아래로 내려와 나라 사람들이 임금으로 추대했다. 도읍을 평양에 정하고 단군이라 불렀는데 이것이 전조선이다. 주 무왕이 상나라를 없애고 기자를 이곳에 봉했는데 이것이 후조선이다. 41대손 준에 이르렀는데 연나라 사람 위만이 그 땅을 빼앗아 왕험성[왕검성이라고도 한다]을 도읍으로 했는데 이것이 위만조선이다. 그 손자 우거가 한나라에 반하자 무제 원봉 2년에 장수를 보내 평정하고 네 군으로 만들었는데, 왕험(왕검성)은 낙랑군이 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평양이 곧 낙랑군이라고 하는 것은 조선시대에는 설이 아니라 진리와도 같이 받아 들여졌는데, 한반도 북한의 평양에 낙랑군을 설정할 경우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B.C.6) 조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말한 온조왕의 말을 설명할 수 없게 된다.
그러자 조선 후기 정약용은 강원도 춘천이 낙랑남부도위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백제의 건국지를 지금의 서울 부근이라고 생각한 조선시대 사람들은 서울의 동쪽인 강원도 춘천부근에 낙랑이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백제시조 온조왕이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다고 말했을 것이라고 정약용의 주장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다시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낙랑왕 최리라는 기록이 나타나자 춘천을 낙랑국이라고도 주장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소위 춘천낙랑설이다.
지금 춘천낙랑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평양의 낙랑군과 춘천의 낙랑국은 별개로 존재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한나라가 설치한 낙랑군의 책임자라면 낙랑태수라고 호칭하는 것이 마땅한데 삼국사기에 어떻게 최리를 낙랑왕이라 기록할 수 있었겠느냐고 하며, 이는 세월이 흐르면서 평양의 낙랑군이 분열하여 그 일파가 춘천부근으로 남하하여 독립적으로 낙랑국을 세우고 칭왕을 했으므로 삼국사기에 최리를 낙랑왕이라고 기록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7년(A.D.44) 조의, "한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 낙랑을 치고 그 지역을 빼앗아 군·현을 만드니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라는 기록이 그 명백한 증거라고 하기도 한다.
즉 전한 무제가 설치한 낙랑군을 후한의 광무제가 다시 칠 리는 없으므로 광무제가 친 낙랑은 한나라에 반한 춘천 부근의 낙랑국을 말하는 것이고, 이 낙랑국이 후한의 통치를 거부하고 칭왕을 하며 독립하려 했기 때문에 후한에서 춘천의 낙랑국을 쳐서 빼앗아 살수이남까지 한나라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록 속에 살수라고 기록된 것은 대수의 오기일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그런데 한반도 평양이나 춘천에 낙랑이 존재했다고 했을 경우 옛날에 한반도 북부가 중국 세력들의 식민지였다는 말이되므로 아주 위험한 발상이다. 왜냐하면 중국의 동북공정 논리를 인정하는 격이 되어 후일 중국이 한반도 북부지역까지를 자기들의 옛 강역이었다고 주장할 때 대응논리가 마땅치 않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주장은 폐기되어야 마땅하다.
다른 주장은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는 태강지리지의 기록을 시작으로 나타나고 있는 중국 사서들의 기록에 따라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된 지금 중국 하북성 창려현 갈석산 부근이 낙랑군 수성현이었으므로 원래의 낙랑군은 바로 그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 곧 창려낙랑설이다.
그러다가 창려 부근에 있던 낙랑군 세력의 일부가 후세에 한반도 평양으로 이동하여 다시 낙랑국이라 했기 때문에 사서에 북한 평양이 낙랑이라 기록될 수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위만조선은 한반도에 위치했던 것이 아니라 창려 부근에 위치했으므로 위만조선은 우리의 역사가 아니며, 기자조선 역시 한반도에 위치한 적이 없었다고 설명한다.
이는 우리 민족이 은나라 사람이라는 기자와 연나라 사람으로 기록되고 있는 위만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고 하기 위한 민족주의적인 주장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역사를 그렇게 해석할 경우 옛 왕검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과 후대의 역사를 연결 지어 설명할 수 없다.
왜냐하면 위만조선의 도읍으로서 우거왕이 도읍으로 했던 왕검성이 곧 낙랑군의 치소가 되었고, 고구려의 평양성이었으며, 평양성의 남쪽에 백제가 위치하고 있었고, 동쪽에 신라가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승덕시낙랑설은 고조선·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었으며 낙랑군의 치소가 지금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라는 필자의 주장으로서 이를 승덕시낙랑설이라 이름한다.
필자는 우리 고대 역사의 중심지는 난하 부근으로서 고조선으로부터 고려까지의 역사가 바로 이 난하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본다.
이는 얼핏 들으면 허무맹랑한 주장으로 생각될 수도 있겠으나 지금까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었던 우리 역사 모두가 명쾌하게 설명된다.
낙랑군의 경우 기원전 108년에 설치되어 하북성 승덕시에 치소를 두었는데, 그곳이 바로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이었던 왕검성이었다.
☆ 자치통감에는 "樂浪郡治朝鮮縣蓋以右渠所都爲治所也(낙랑군의 치소는 조선현으로서 우거가 도읍으로 했던 곳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위만조선이 멸망한 후 왕검성이 낙랑군의 치소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36년이 흐른 기원전 82년에 이르러 임둔군은 예(동예)가 되고, 진번군은 맥(맥국)이 되자 한(漢)나라에서는 두 군을 폐지하고, 원래 현토군의 관할지인 동옥저와 임둔군, 진번군의 나머지 현을 낙랑군에 이관하고 현토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기게 된다.
한편 원래의 현토군과 진번군과 임둔군의 나머지 관할지를 이관 받은 낙랑군에서는 그곳에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고 도위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는데, 후한 건무 6년인 서기 30년에 이르러 낙랑동부도위가 고구려에 복속되고, 서기 37년에 이르러서는 최리의 낙랑국 마저 고구려 대무신왕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어 한 무제가 설치했던 전한낙랑군은 일단 소멸하게 된다.
☆ 한 무제가 설치했던 전한 낙랑군은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일원이었고, 낙랑동부도위는 지금의 칠로도산 또는 노로아호산 동쪽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곳이 바로 동옥저, 동예, 맥국이었다.
삼국지 동옥저 전을 보면,
"한 무제 원봉 2년(B.C.109)에 조선을 정벌하여 위만의 손자 우거를 죽이고 그 땅을 나누어 네 군으로 만들었는데, 옥저성을 현토군으로 하였다.
☆ 원봉 2년은 조선과 한나라가 전쟁을 시작한 해이고, 약 1년 간의 전쟁에서 조선이 패하게 되어 한사군이 설치된 해는 원봉 3년 즉 기원전 108년 쯤으로 추정이 가능한데, 전한서지리지에는 현토군의 설치 년도를 원봉 4년 즉 기원전 107년이라 기록하고 있다.
먼저 낙랑군, 진번군, 임둔군을 설치한 후 1년 후에 현토군을 추가로 설치함으로써 네 군을 모두 설치했던 듯 한데, 추정해 보면 이때 동옥저가 한나라에 반기를 들어 그 세력을 완전히 평정하는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라 여겨진다.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는데, 지금 소위 현토의 옛 부라는 곳이 바로 그곳이다. 옥저는 다시 낙랑(동부도위)에 속하게 되었는데 한나라는 그 땅이 넓고 멀어 단단대령 동쪽을 나누어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하고 치소를 불내성에 두어 별도로 대령의 동쪽 일곱 개 현을 관할하게 하였다. 이때 옥저 역시 모두 현이 되었다.
(후한)건무 6년(A.D.30) 변경의 군을 줄일 때 도위를 폐지하고 그 후 모두 현의 거수로서 현후를 삼으니 불내, 화려, 옥저 등의 여러 현이 모두 후국이 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A.D.37) 조에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라는 기록은 필자의 주장을 뒷받침 해주는 기록들이다.
그러면 위와 같은 상황들을 머릿속에 넣고 중국 사서의 기록들은 낙랑에 대하여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 검토해보자.
사마천의 사기(史記) 권2 하본기에는 우갈석을 설명하는 주에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태강지리지에는 낙랑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 통전 권186 변방2 동이 하 대당 무덕4년 조에는,
按尙書云 夾右碣石入於河 右碣石卽河赴海處 在今北平郡南二十餘里 則高麗中爲左碣石
(상서에 의하면 우갈석이 강을 옆으로 끼고 흐른다고 했는데, 강으로부터 나아가 바다에 이르는 우갈석이 지금의 북평군 남쪽 20여 리에 있으니 고(구)려에 있는 것은 좌갈석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연수의 진서지리지(晉書地理志)에는 "樂浪郡遂城縣 秦築長城之所起(낙랑군 수성현은 진나라 때 쌓은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 진서 14 지제4 지리 상에는,
"樂浪郡[漢置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낙랑군[한나라가 설치했고 6개 현을 통치한다. 백성은 3천7백호이다] 조선(현)[주나라가 기자에게 봉한 땅이다] 둔유(현), 혼미(현), 수성(현)[진나라 때 쌓은 장성이 시작된 곳이다] 누방(현), 사망(현)]"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두우의 통전에는 "碣石山 在漢樂浪郡遂成縣 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
水而入高麗 遺址猶存(갈석산은 한나라 때의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되었다. 지금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가로질러 고(구)려로 들어가는데 옛 터가 남아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사마광의 자치통감에는 "以故遂定朝鮮 爲樂浪·臨屯·玄莵·眞番 四郡 樂浪郡治朝鮮縣蓋以右渠所都爲治所也(조선을 평정하고 낙랑·임둔·현토·진번 네 군으로 만들었다. 낙랑군의 치소는 조선현으로서 우거가 도읍으로 했던 곳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 자치통감 권21 한기 13 세종효무황제 원봉 3년 조에
茂陵書臨屯郡治東暆縣去長安六千一百三十八里領十五縣 玄莵郡本高句麗也旣平朝鮮倂開爲郡治沃沮城後爲夷貊所侵徙郡句驪西北 眞番郡治霅縣去長安七千六百四十里 領十五縣余據後廢臨屯眞番二郡(무릉서에는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으로서 장안에서 6,138리이고, 15현을 다스렸고, 현토군은 본래 고구려였다. 조선을 평정하고 군을 설치할 때 옥저성을 군의 치소로 했다가 후에 이맥의 침공을 받아 군을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 진번군의 치소는 삽현으로 장안에서 7,640리이고, 15현을 다스렸다. 얼마 후 임둔, 진번 두 군을 폐했다고 했다) ♣ 당시의 거리단위는 지금처럼 4km가 10리가 아니라 2.3km가 10리였다고 한다.
모든 기록들이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를 한반도 평양 부근이 아닌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이 사서들의 기록들이 사실일 경우 우리 역사 해석에 있어 천지개벽과도 같은 상황이 올 수 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3년 조에 왕이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변경을 침공하기 때문에 평안한 날이 적다" 라고 말한 기록이 있고,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8년 조에도 왕이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하고 남쪽으로는 가야를 접하였다"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고구려, 백제, 신라는 물론 가야까지도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므로 결국 앞 시대인 고조선, 부여, 위만조선, 삼한도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며, 후 시대인 고려까지도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 사실이 이러할 경우 우리 역사는 어찌해야 하는 것인가?
모두를 처음부터 다시 해석하고 다시 정리해야 하며, 후손들에게도 새로운 역사를 교육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 역사의 천지개벽이 아니고 무엇이랴!
후한 낙랑군의 위치
미우나 고우나 우리 역사는 낙랑군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전개된다.
따라서 우리 역사를 해석하기 위해서 낙랑군의 위치가 매우 중요한데, 삼국사기에 낙랑에 대한 기록은 서기 313년까지 나타난다.
그리하여 우리는 지금까지 한 무제가 설치했던 전한 낙랑군이 기원전 108년부터 서기 313년까지 무려 421년 간 쭉 이어졌을 것이라고 이해했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A.D.37)조에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또 대무신왕 27년(A.D.44) 조를 보면,
"한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 낙랑을 치고 그 지역을 빼앗아 군현을 만드니 살수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지금까지 그 기록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후한의 광무제가 미치지 않고서야 왜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빼앗아 설치했던 낙랑을 공격하느냐 하는 것이고, 또 서기 44년에 광무제가 낙랑을 칠 수 있었다는 것은 그 당시 낙랑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어떻게 서기 37년에 고구려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망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느냐는 것이다.
그리하여 삼국사기의 기록이 틀렸을 것이라느니, 한 무제가 설치한 전한 낙랑군이 이때 후한에 반기를 들고 칭왕을 했을 것이라느니 온갖 추측성 주장들이 나오게 되었다.
☆ 지금 일부 사학자들과 재야 연구자들 중 삼국사기에 최리를 낙랑왕이라 기록한 것을 가지고 낙랑군의 일부세력이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낙랑군 지역인 진황도 지역을 떠나 한반도 평양지역으로 이동하여 낙랑국을 세우고 칭왕을 했을 것이라고 해석함으로써 낙랑군과 낙랑국을 나누어 낙랑국은 한반도 평양 부근에 있었다고 하기도 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아니라 전한에서 신나라, 후한으로 넘어가는 혼란한 시기를 틈타 최리라는 사람이 원래의 전한 낙랑군 지역을 차지하고 칭왕을 했다가 고구려 대무신왕의 침공을 받고 멸망함으로써 그 땅이 고구려의 수중으로 들어온 기록인 것이다.따라서 낙랑군의 기본 강역에는 변동이 없었다. 즉 낙랑군과 낙랑국은 모두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일원을 말하는 것이고, 낙랑동부도위는 그 동쪽 내몽골 적봉, 영성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전한 때 설치했던 낙랑군을 서기 37년에 고구려가 빼앗아가자 후한의 광무제가 그를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 서기 44년에 고구려에게 빼앗긴 옛 전한 낙랑군 지역을 쳐 살수이남 땅을 고구려로부터 다시 탈환하여 그곳에 후한 낙랑군을 다시 설치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모든 상황이 간단하게 설명된다.
후한 광무제의 입장에서는 전한의 무제가 설치하여 기원전 108년부터 서기 37년까지 무려 145년간이나 전한으로부터 후한으로 이어져 통치했던 그 땅을 고구려 대무신왕이 빼앗아가자 후한의 광무제가 옛 전한 낙랑군 지역을 되찾으려고 했을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무제가 낙랑을 쳐 그 땅을 빼앗아 살수이남 땅을 한나라의 군현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바로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에 빼앗겼던 전한 낙랑군 땅을 모두 탈환하려고 시도했으나 그를 전부 회복하지는 못하고 그 일부인 살수이남 땅 일부 만을 탈환한 후 그곳에 후한낙랑군을 새로 설치했던 기록인 것이다.
후한의 광무제가 왜 낙랑을 쳤다고 기록되어 있는지 이제야 그를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후한의 광무제가 살수이남 땅에 설치한 후한 낙랑군은 과연 지금의 어디에 설치되었을까?
우리는 지금까지 이 기록을 해석하면서 한반도의 청천강을 살수(薩水)로 보고 청천강 이남에 후한의 낙랑이 설치되었을 것이라 하기도 하고, 또는 살수가 대동강 보다 남쪽에 위치한 다른 강을 말하는 것이라 하기도 했다.
살수가 청천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이유는, 청천강을 살수로 볼 경우 전한 낙랑군이 소멸한 313년보다 훨씬 앞 시기인 동천왕 21년(A.D.247) 조의 기록에 "왕이 환도성은 병란을 겪어서 다시 도읍할 수 없다하여 평양성을 쌓고 백성들과 종묘와 사직을 옮겼다. 평양이란 본래 선인 왕검이 살던 집이다. 혹은 왕이 도읍했다 하여 왕검이라고도 한다" 라는 기록과 상충되기 때문이다.
지금 북한 평양은 대동강가에 위치하고 있는데, 청천강은 대동강보다 더 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동천왕 때 청천강(살수) 이남이 후한낙랑 땅이었다면 고구려가 동천왕 때 평양성으로 도읍을 옮길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에 삼국사기의 기록이 틀린 것이 되고 만다.
그런데 옛 고조선의 왕검성, 낙랑군의 치소, 고구려의 평양성을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 비정하고 역사 기록들을 해석하면 너무도 명쾌하여 한치의 의문도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살수는 한반도에 있는 강일 수 없고, 지금의 조하(潮河)를 살수로 비정할 수 있다.
따라서 후한낙랑군은 지금의 북경 동북쪽 하북성 흥륭현 일원에 설치되었다고 보면 정확할 것이다.
지금의 밀운수고 동쪽 흥륭(興隆) 일원이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에 빼앗겼던 옛 전한낙랑군의 일부분을 되찾아 설치했던 후한낙랑군인 것이다.
현토군과 낙랑동부도위의 위치
기원전 108년에 설치된 초기 현토군의 위치는 지금까지도 오리무중이고, 소제 시원 5년(B.C.82)에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다는 현토군 역시 아직도 어디를 말하는지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한반도 북한 평양을 낙랑군으로 인식한 조선시대 사람들은 초기 현토군이 함경도 함흥 부근에 설치되었다가 요하 부근으로 옮겼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다.
그렇지만 옛 고조선, 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었고, 낙랑군의 치소였던 곳이 한반도 부근에 위치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면 현토군의 위치 역시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된다.
☆ 우리는 지금 보통 "玄莵郡"이라고 쓰고 "현도군"이라고 읽는데 왜 이렇게 읽게 되었는지 의아하다. "莵(토)" 자는 새삼이라는 식물을 나타내는 새삼토 자이므로 "현토군"이라고 읽어야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
후한서 동옥저 전을 보면,
"(한) 무제가 조선을 멸망시키고 옥저 땅으로 현토군을 만들었다.
뒤에 이맥의 침략을 받아 군을 고구려(구려의 오기이다)의 서북쪽으로 옮기고는 옥저를 현으로 고쳐 낙랑의 동부도위에 속하게 했다.
(후한) 광무제 때에 이르러 도위의 관직을 없애고 후에 모두 그 거수를 봉하여 옥저후로 삼았다. 그 땅이 작아 큰 나라 사이에 끼어 핍박을 받다가 마침내 (고)구려의 신하가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옥저 땅에 초기 현토군의 치소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하고,
후한서 예전에는,
"원봉3년(B.C.108)에 조선을 멸망시키고 낙랑·임둔·현토·진번으로 나누었는데, 소제 시원 5년(B.C.82)에 이르러 임둔과 진번을 폐지하여 낙랑과 현토에 합쳤다가 현토를 다시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겼으며 단단대령 동쪽의 옥저와 예, 맥은 모두 낙랑에 속하게 했다.
뒤에 그 지역이 넓고 멀어 (단단)대령의 동쪽 일곱 개 현을 나누어 낙랑동부도위를 설치했다.
예가 한나라에 내속된 후부터 풍속이 점점 나빠져 금지하는 법도 늘어나 60여 개 조에 이르게 되었다.
건무 6년(A.D.30) (낙랑동부)도위를 폐지하고 (단단)대령 동쪽의 땅을 포기하고 그 거수로서 현후를 삼고 모두 때때로 조하하도록 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보면 낙랑동부도위(원래 현토군)는 예와 옥저의 나머지 현을 관할하는 기관이었다고 할 수 있고 동옥저에 초기 현토군의 치소가 위치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후한서 동옥저 전을 보면,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의 동쪽에 있다. 동쪽은 대해까지이고, 북쪽은 읍루와 부여, 남쪽은 예, 맥과 접했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지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또 삼국지와 후한서에는,
부여의 남쪽에는 고구려, 동쪽은 읍루, 서쪽은 선비와 접했고, 북쪽에는 약수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고,
예는 북쪽으로는 고구려·옥저, 남쪽으로는 진한과 접했고, 동쪽은 대해에 닿았으며, 서쪽은 낙랑까지이다. 예,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 땅이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 위치를 충분히 찾을 수 있도록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기록에 따라 이들의 위치를 그림으로 그려보면,
약수
선비 부여 읍루
고구려 동옥저
(초기현토군)
(후한)낙랑 예 대해
진한
위와 같은 배치가 되는데, 우리는 지금 고구려의 도읍 평양성을 북한의 평양이라 알고 있고, 신라의 도읍 금성이 한반도 경주였다고 하고 있다.
그리하여 예(동예)는 당연히 경주의 북쪽인 강원도 강릉 쯤에 치소를 두었을 것으로 생각했고, 대해란 동해를 말하는 것이며, (후한)낙랑은 강원도 춘천 쯤에 위치했을 것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동옥저는 함경남도 함흥 쯤에 치소를 두었을 것으로 생각했고, 읍루는 두만강 부근으로부터 연해주 부근, 부여는 압록강 북쪽에, 선비는 대흥안령산맥 부근에, 약수는 흑룡강 쯤으로 비정하여 역사를 해석하고 있었다.
그런데 전한 때의 낙랑군의 위치가 갈석산이 있고, 만리장성이 시작된 그 부근이라면 전한낙랑군은 한반도가 아니라는 말이 되고, 전한 낙랑군 땅을 고구려에 빼앗겼다가 후한의 광무제가 그 일부를 도로 찾아 설치했다는 후한낙랑군도 당연히 옛 전한 낙랑군 땅의 일부였을 것이므로, 후한낙랑군의 위치 역시 한반도가 아니라는 말이된다.
고구려의 개마대산이란 바로 지금의 북경 동북쪽 대흥안령을 말하는 것이되고, 단단대령이란 지금의 칠로도산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따라서 낙랑동부도위란 바로 지금의 적봉, 영성 부근 지역을 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동옥저를 떠나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긴 현토군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사서의 기록을 한반도를 기준으로 해석할 경우 새로 옮긴 현토군은 요하 부근으로 비정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발상을 획기적으로 전환하여 고구려의 평양성을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 비정하고, 후한낙랑군을 고북구 일원으로 비정한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 해석과는 전혀 다른 양상이 전개되는 것이다.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4 고구려·백제 편 고구려조에는 "고구려가 처음에는 중국 북쪽 땅에서 살았는데 점점 동쪽의 패수 옆으로 옮겨왔다(高句麗始居中國北地 則漸東遷于浿水之側)"고 하였으므로 고구려의 건국지 졸본이 중국 북쪽지역에 위치했었다는 것은 분명하고 후한의 도읍은 낙양이었다.
낙양은 동경 112도와 113도 사이에 위치하는데, 그 북쪽이라면 호화호특, 대동, 장가구, 화덕, 상도, 고원 등 내몽골고원지대에 속하는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고, 동북쪽은 지금의 북경 부근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록을 지금까지 압록강 북쪽 지역으로 비정하여 역사를 해석하는 우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졸본, 국내성, 환도성은 압록강 부근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북경 부근에서 찾아야 하고, 평양성은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다.
그런데 후한서 고구려 전을 보면,
"구려는 일명 맥이라 한다. 별종으로서 소수에 의지하여 살기 때문에 소수맥이라 한다" 라는 기록이 보이고, 또 고구려의 위치를 "요동 동쪽 1천리에 있다. 남쪽은 조선과 예, 맥, 동쪽은 옥저, 북쪽은 부여와 접했다. 땅이 사방 2천리이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우리는 이 기록을 한반도를 중심으로 해석하여, 요동으로부터 동쪽으로 1천리 거리를 지금의 길림성 집안 쯤으로 보았고, 남쪽의 조선은 북한 평양부근, 예는 강원도 강릉부근, 맥은 춘천부근, 동쪽의 옥저는 함경남도 함흥부근, 북쪽은 길림성 송원 부근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마침 집안에는 광개토대왕의 능비인 호태왕 비가 서 있고, 송원의 옛 지명이 부여였으므로 그렇게 비정하는 것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따라서 집안의 서쪽 방향인 환인을 졸본으로 보았는데, 그곳에도 마침 높은 절벽 위에 세워진 오녀산산성이 있어 그곳을 졸본성이라고 하게 되었고, 구려 역시 그 부근에 위치했다고 생각하여 동옥저로부터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긴 현토를 요녕성 철령시 부근으로 비정했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낙랑군의 치소로 사용한 고조선·위만조선의 왕검성이 지금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었고, 졸본이 하북성 적성현 후성진 부근을 말하는 것이었으니 우리 역사는 첫 단추를 잘못 끼운 것이다.
아니 우리가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기 때문에 빚어진 착각이었던 것이다.
구려는 북경시 연경현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러므로 구려의 서북쪽으로 옮긴 현토군의 치소는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시 부근으로 비정할 수 있는 것이다.
장가구 부근이 바로 지금까지 어디를 말하는지 알 수 없었던 새로 옮긴 현토군의 치소였다.
현토군은 동쪽의 고구려, 북쪽의 동부여를 방어하기 좋은 지역에 절묘하게 자리를 잡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현토군은 그 동쪽 가까이에서 건국된 고구려와의 접촉 기록이 많이 남겨지게 되고, 동부여와의 접촉기록도 남겨지게 되며, 중국 세력들이 고구려를 침공할 때 때로는 현토를 지나 공격해오기도 하고, 고구려가 현토군을 공격하기도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