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방 4천리 강역의 삼한(三韓)은 한반도 남한에 위치할 수 없다 - 최초주장
사서들의 기록을 보면 한(韓: 삼한)이 방4천리에 이르는 넓은 강역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되어 있는데, 우리는 지금 1천리에 지나지 않는 한반도 남한에 삼한이 위치하고 있었다고 역사를 해석한다.
삼국지 한전의 주를 보면,
『위략에 이르기를,
진(秦)나라가 천하를 통일 한 뒤 몽염을 시켜 장성을 쌓게 하여 요동에까지 이르렀을 때 조선왕 부(否)가 왕위에 올랐는데, 진나라가 공격할까 두려워하여 복속하는 체 했으나 조회에는 나가지 않았다.
부가 죽고 그 아들 준(準)이 즉위했다.
그 뒤 20여 년이 흘러 진항(진승과 항우)이 병기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나라·제나라·조나라 백성들이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점점 준에게 망명해 갔는데, 준은 이들을 (조선의) 서쪽 땅에 살게 했다.
☆ 연나라는 지금의 하북성 남부, 제나라는 산동성 부근, 조나라는 산서성에 위치했던 나라들이었다. 고조선이 이들 나라들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나라 사람들이 진나라의 고역을 피해 조선으로 망명해 올 수 있었을 것이다.
한나라 때에 이르러 노관을 연왕으로 삼고, 조선과 연은 패수(필자주 : 만반한의 오기? 요수의 오기?)를 경계로 하게 되었다.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도망하자 연나라 사람 위만도 망명하여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투항하고는, 서쪽 변방에 거주하게 해주면 중국의 망명자들을 거두어 조선의 번병이 되겠다고 준을 설득했다.
준은 그를 믿고 총애하여 박사에 임명하고, 백리의 땅을 봉지로 주어 서쪽 변경을 지키도록 했다.
위만이 중국의 망명자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준에게 보내 거짓으로 아뢰기를 '한나라의 군대가 열 군데 길로 쳐들어오니 (왕궁으로 가서) 숙위하기를 청합니다' 하고는 갑자기 준을 공격했다.
준은 만(위만)과 싸웠으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준은) 그의 근신들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도망쳐 바다를 건너 한(韓)의 지역에 거주하면서 스스로 한왕이라 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왕검성을 어떻게 빼앗겼나 하는 것을 알게 한다.
그리고 삼국지 한 전에는,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에 닿았고, 남쪽은 왜와 국경을 접했는데, 땅이 사방 4천리쯤 된다.
한에는 세 종족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한인데, 진한은 옛 진국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한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 삼국지 진한 조를 보면 진나라 사람들이 한국으로 오자 마한이 동쪽 땅을 분할하여 그들에게 주고 살게 하여 진한(秦韓)이라고도 불렀음을 기록하고 있는데 지금의 산해관 동북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한의 위치]
대방
바다 한 바다
(호수 또는 강) (삼한)
왜
그런데 이러한 기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때 위만에게 왕검성을 빼앗긴 준왕이 과연 지금의 어디로 가서 사방 4천리에 이르는 넓은 땅을 차지하고 다시 한왕에 오를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은 아직까지 명쾌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어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그 위치를 놓고 논쟁 중인데 한반도에는 사방 4천리에 이르는 넓은 땅이 있을 수 없다.
그리하여 지금도 기록이 틀렸다, 아니다 하면서 논쟁 중인 것이다.
과연 한의 위치에 대한 진실은 무엇일까?
삼한(三韓)의 위치
삼국지 한전에는,
"마한은 서쪽에 있고, 그 백성들은 농사를 지어 씨뿌려 가꾸고, 양잠을 하여 비단과 베를 짤 줄 안다.
각각 장수(長帥: 渠帥)가 있어, 나라가 크면 스스로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을 읍차(邑借)라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사는데, 성곽이 없다.
원양국(爰襄國), 모수국(牟水國), 상외국(桑外國), 소석색국(小石索國), 대석색국(大石索國), 우휴모탁국(優休牟 國), 신분고국(臣 沽國), 백제국(伯濟國: 百濟國),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일화국(日華國), 고탄자국(古誕者國), 고리국(古離國), 노람국(怒藍國), 월지국(月支國),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소위건국(素謂乾國), 고원국(古爰國), 막로국(莫盧國), 비리국(卑離國), 점리비국(占離卑國), 신흔국(臣 國), 지침국(支侵國), 구로국(狗盧國), 비미국(卑彌國),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고포국(古蒲國), 치리국국(致利鞠國), 염로국( 路國), 아림국(兒林國), 사로국(駟盧國), 내비리국(內卑離國), 감해국(感奚國), 만로국(萬盧國), 벽비리국( 卑離國),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일리국(一離國), 불미국(不彌國), 지반국(支半國), 구소국(狗素國), 첩로국(捷盧國),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신소도국(新蘇塗國), 점랍국(占臘國), 임소반국(臨素半國), 신운신국(臣雲新國),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일난국(一難國), 구해국(狗奚國), 불운국(不雲國), 불사분사국(不斯 邪國), 원지국(爰池國), 건마국(乾馬國), 초리국(楚離國) 등 모두 50여 국이 있다.
큰 나라는 1만여 가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총 10여만 호이다.
진왕의 치소는 월지국(月支國)이다"
☆ 후한서에는 월지국을 목지국(目支國)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月과 目의 목각 각판의 글자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혼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월지국이 옳을 것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한의 도읍이 마한의 월지국(또는 목지국)이었음을 알게 한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기록을 보고는 고조선의 마지막 왕인 준왕이 지금의 한반도 평양을 위만에게 빼앗기고 도망쳐 바다를 건너 마한으로 가서 도읍했고 월지국이 전북 익산 금마였을 것이라고 추정했는데, 이 주장이 바로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한금마도읍설이고,
한이 한반도에 위치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중국의 북경 부근(하북성 풍윤)에 도읍하고 그 주변의 사방 4천리를 차지했다는 것이 필자가 주장하는 한풍윤도읍설이다.
따라서 필자는 지금의 중국 북경 동쪽 하북성 당산시 풍윤이 곧 한의 도읍이었던 월지국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로 확인될 경우 우리의 역사 강역은 최소한 북경 부근까지로 확대되는 대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한금마도읍설은 한이 한반도의 익산 금마에 도읍했다는 설이다.
이 설은 조선시대부터 전해져 온 것으로서 마한이 지금의 전북 익산 금마에 도읍하고, 한반도의 경기, 서울, 충청, 전라도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던 54개 소국을 통치했고 백제가 그 중의 한 개 나라였으며, 진한은 경상북도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서 12개 소국이 있었으며 신라가 그 중의 한 개 나라였고, 변한은 경상남도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서 역시 12개 소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는 것이다.
다만 사서의 기록들에 한의 강역이 4천리에 이르렀다는 기록은 중국 사람들이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있는 한반도에 대한 정보가 부족해 한의 면적을 잘못 기록했다고 본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를 보면, 마한의 동북쪽 땅에서 건국된 백제의 온조왕은 왕 13년에 이르러 "나라의 동쪽에는 (신라가 있고, 서쪽에는) 낙랑이 있으며,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변경을 침공하기 때문에 평안한 날이 적고........." 라고 말하고 있고, 24년 조를 보면, 온조왕이 웅천에 목책을 세우자 마한왕이 사신을 보내 말하기를 "왕이 처음으로 강을 건너와 발붙일 곳이 없을 때 내가 (마한의) 동북쪽 1백리 되는 땅을 나누어주어 편히 살도록 했으니......" 라고 말하고 있어 백제의 동쪽에는 신라, 서쪽에는 낙랑, 북쪽에는 말갈, 서남쪽에는 마한이 위치하고 있어 백제가 마한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만약 한반도의 익산 금마가 한(마한)의 도읍 월지국(목지국)이었다면, 백제는 익산 금마의 동북쪽에서 건국되었다는 말이 되므로 백제가 충청북도 쯤에서 건국되었어야 기록과 일치하게 되는데, 지금 우리는 백제의 건국지를 전북 익산 금마의 북쪽인 서울부근에서 찾고 있고, 말갈은 두만강 너머 멀리 연해주에 있었다고 하고 있어, 역사 기록과 한반도의 지리적 상황이 일치하지 않는다.
한북경 부근(하북성 풍윤)도읍설은 필자가 주장하는 것으로서 한(韓)이 한반도에 존재하지 않았고, 지금 중국 북경 동쪽 하북성 당산시 풍윤현에 도읍했다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사서의 기록에 한의 강역이 4천리에 이르렀다는 것은 한이 한반도 남쪽에 위치하지 않았다는 결정적 근거라고 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반도 남쪽에는 4천리에 이를 정도로 넓은 땅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의 거리가 겨우 1천리쯤 될 뿐이고, 한반도 전체라고 해도 4천리가 되지 않는다. 우리가 보통 한반도를 이야기 할 때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따라서 4천리 강역의 한이 1천여리에 지나지 않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필자는 앞에서 고조선·위만조선의 도읍 왕검성이 북한의 평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준왕은 위만에게 왕검성을 빼앗기고 난하(패수)를 타고 내려와 발해를 가로질러 건너고 또 황해를 건너 아무 연고도 없었을 한반도의 전북 익산 금마까지 와서 그곳에 도읍하고 국호를 한이라 하고 다시 왕위에 올랐을 리가 없을 것인데, 이때 고조선의 준왕은 어디로 가서 다시 4천리 땅을 차지하고 한왕에 올랐던 것일까?
삼국지에는,
"(한이) 한(漢)나라 때에는 낙랑군에 소속되어 철마다 조알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한(韓)이 낙랑군과 가까이 접하고 있었음을 알게 하고, 또 "(후한) 환제와 영제 말기에 한(韓)과 예(濊)가 강성하여 군현에서 제대로 통제할 수 없어 많은 백성들이 한국으로 흘러 들어갔다. 건안(A.D.196∼219) 중에 공손강이 둔유현 남쪽의 황무지를 분할하여 대방군(帶方郡)을 만들고 공손모, 장창 등을 보내 한나라의 유민들을 불러모으고, 군대를 일으켜 한과 예를 정벌하자 옛 백성들이 점점 돌아왔고, 후에 왜와 한이 드디어 대방에 복속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한이 대방군과도 가까이 접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예와 왜도 한의 강역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전한낙랑군은 한반도의 평양 부근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북경 동북쪽 난하 중류 지역을 말하는 것으로서 그 치소는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었고, 그곳이 바로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이었다.
그리고 후한서 한(韓) 전에는,
"한은 세 종족이 있으니 첫째는 마한, 둘째는 진한, 셋째는 변진이다.
마한은 서쪽에 위치하는데 54국이고, 그 북쪽은 낙랑(후한낙랑), 남쪽은 왜와 접했다. 진한은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12국이고, 그 북쪽은 예맥과 접했다. 변진(변한)은 진한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역시 12국이며, 그 남쪽은 왜와 접했다. 모두 78개국으로서 백제(伯濟: 百濟)는 그 중의 한 개 나라이다.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가인데 각각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 전체 국토의 넓이가 4천여 리나 된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삼국지에는 "한은 대방의 남쪽에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삼국지와 후한서의 기록을 중심으로 각 나라들의 위치를 그려보면 아래와 같다.
낙랑 예맥
대방
마한 진한
(54국) (12국)
변진(변한)
(12국)
왜
☆ 백제는 마한의 동북쪽에서 건국되었고, 한의 78개 나라 중의 한 개 나라라고 했다.
그렇다면 한(韓)은 한반도 남쪽에 위치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의 남쪽인 지금 북경·당산·진황도·부근에 위치했다는 말이 되고, 위만조선은 만리장성 북쪽에 위치했었다는 말이 된다.
따라서 한은 지금의 북경 동쪽 풍윤에 도읍하고 4천여 리의 땅을 차지했으므로 북쪽으로는 만리장성을 위만조선과의 국경으로 하고, 동북쪽으로는 당산을 지나 진황도 산해관을 넘어 호로도, 금주시(錦州市) 부근까지, 서쪽으로는 태행산맥까지, 남쪽으로는 황하 하류에까지 이르는 사방 4천여 리 땅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은 것이다.
그런데 삼한이 북경, 하북성 북부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마한의 동북쪽 땅에서 건국된 백제가 난하 부근에서 건국되었다는 말이 되고, 마한의 동쪽에 위치했던 진한 땅에서 건국된 신라도 대륙의 요녕성 호로도시, 금주시(錦州市)부근에서 건국되었다는 말이 되며, 진한의 남쪽이며 변한 땅에서 건국된 가야도 호로도의 흥성 부근에서 건국되었다는 말이 되니 결국 우리 삼국의 건국지도 발해 북쪽 대륙이라는 말이고, 예(동예), 대방, 왜 등도 모두 그 부근에 위치했다는 말이 된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