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삼국 건국시조 탄생설화의 새 해석 - 최초주장
[신라 시조 혁거세의 어머니 파소(사소라고도 한다)공주로 추정되는 천후성모상]
고구려 건국시조 추모왕의 혈통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를 보면 주몽을 "추모 또는 중해라고도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호태왕 비문에도 고구려의 건국시조를 추모왕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 건국시조 주몽의 시호는 동명성왕이 아니라 추모왕이었음에 틀림없다.
☆ 삼국사기에는 주몽을 동명성왕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서 졸본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과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추모왕을 혼동한 결과이다. 이는 국강상광개토경 평안호태왕 비문에 고구려의 건국시조를 동명성왕이라 기록하지 않고 추모왕이라 기록하고 있는 것은 그를 확인시켜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주몽의 탄생설화에서는 그 어머니인 유화부인이 햇빛의 감응을 받아 주몽을 잉태한 것으로 적고 있으나 아무리 옛날이라지만 사람이 진짜 햇빛의 감응을 받아 태어날 수는 없는 일이다. 따라서 주몽의 아버지는 따로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맥의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고구려의 선조는 해모수로부터인데 해모수 어머니의 고향 역시 그곳이다.
조대기에 이르기를 해모수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웅심산에서 살다가 부여의 옛 서울에서 군사를 일으켜 무리에게 추대되어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되니 이를 부여(북부여)의 시조라 한다.
오우관을 쓰고 용광의 검을 차고, 오룡거를 탔다. 따르는 시종이 5백여 명이었는데 아침에 정사를 처리하고 저녁에는 하늘로 오르니 호령하지 않아도 저절로 관경이 교화되었다.
산에는 도적이 없고 벼와 곡식이 들에 가득했다.
나라에 큰 일이 없고 백성 또한 무사했다.
단군 해모수가 처음 하늘에서 내려온 때는 임술 4월 8일로서 곧 진시황 정의 8년(B.C.239)이다.
고리군의 왕 고진(해진의 오기)은 해모수의 둘째 아들이며 옥저후 불리지는 해진의 손자이다. 모두 도적 위만을 토벌함에 있어 공을 세워 봉함을 받았다.
불리지는 일찍이 압록강 서쪽 강변을 지나다가 하백녀 유화를 취하여 고주몽(해주몽의 오기)을 낳게 하였다. 이때가 임인 5월 5일로서 한나라왕 불능(소제)의 원봉 2년(B.C.79)이다.
불리지가 죽으니 유화는 아들 주몽을 데리고 웅심산으로 돌아왔으니 지금의 서란이다.
주몽이 성장하여 사방을 주유하다가 가섭원(동부여)을 택하여 거기서 살다가 관가의 말지기 일을 하게 되었다.
얼마 후 관가의 미움을 받아 오이, 마리, 협보와 함께 도망쳐 졸본으로 왔다.
마침 부여왕(졸본부여왕)에게는 후사가 없었는데 주몽이 마침내 부마(왕의 사위)가 되어 대통을 이으니 이를 고구려의 시조라 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주몽의 혈통을 정확히 알 수 있게 기록하고 있고, 주몽이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나 하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태백일사의 기록대로라면 주몽의 직계 혈통은,
북부여 건국시조 해모수 →해진 →?(실명) →해불리지 →주몽으로 이어졌고, 주몽의 출생년도는 기원전 79년이다.
삼국사기에는 주몽의 출생년도를 기원전 58년으로 기록하고 있고 그가 고구려를 건국한 해를 22세 때인 기원전 37년으로 적고 있으나, 태백일사는 주몽이 기원전 79년에 출생했다고 적고 있고, 22세 때인 기원전 58년에 동부여에서 도망쳐 졸본부여로 와서 후사가 없던 졸본부여 왕의 부마가 되었다가 나라를 물려받아 왕위에 올랐으며, 이가 곧 고구려의 시조라고 기록하고 있다.
☆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건국설화의 주에도 "주몽이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왕이 아들이 없었는데, 주몽을 만나보고 보통사람이 아님을 알고 딸을 주어 아내로 삼게 하였고, 왕이 죽으니 주몽이 왕위를 이었다는 말도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백제본기에도 주몽이 졸본부여왕의 둘째 공주와 혼인한 후 왕이 죽자 그 왕위를 이었다고 동일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어 고려 때에도 이러한 내용이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기록들은 주몽이 왕위에 오른 해에 22세였다고 한다.
삼국사기에는 주몽이 고구려를 건국하고 왕위에 오를 때인 기원전 37년에 나이가 22세였다고 함으로써 주몽의 출생년도가 기원전 58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셈인데, 이랬을 경우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었다는 기록은 설명할 수 없고, 삼국유사 기이 제1 고구려조에는 주몽이 왕위에 오른 때가 12세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22세의 판각시 오각이고, 범장의 북부여기 하(졸본부여기)에는 주몽의 출생년도가 기원전 79년이고, 동부여로부터 졸본부여로 도망쳐 왕의 부마가 되었다가 왕위를 물려받았을 때의 나이가 22세로서 기원전 58년 10월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록들을 종합해 판단해 보면 주몽은 원래 북부여 해모수의 혈통을 이어받아 기원전 79년에 태어났고 동부여에서 자랐다. 그런데 동부여에서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생명이 위태로워지자 그곳에서 급히 도망쳐 졸본부여로 갔고, 그곳에서 아들이 없던 졸본부여 왕의 부마가 되었다가 왕이 죽자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랐는데 이때 주몽의 나이 22세였고, 기원전 58년이었다.
그렇게 주몽은 21년 간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라 있다가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다시 고구려의 왕위에 올랐다고 할 수 있다.
이 말은 주몽이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라 21년 간 재위하다가 졸본부여의 국호를 고구려로 바꾸고 다시 고구려의 왕위에 올랐다고 해석이 가능해 진다.
이때 주몽은 동명왕이 건국했던 졸본부여를 없애버리고 해모수의 북부여를 잇는 고구려를 새로 건국했던 것이다.
범장의 부여기를 보면 세 부여 즉 북부여, 졸본부여, 동부여의 관계를 확실하게 알 수 있도록 기록하고 있는데, 북부여의 건국시조는 해모수이고, 2대는 해모수리, 3대는 해해사, 4대는 해우루로 나타나고 있고, 해우루 13년인 계유년 즉 기원전 108년에 두막루(부여두막이라고도 한다)가 졸본에서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세우고 왕위에 올랐으며 스스로를 동명(동명왕)이라 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곧 졸본부여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86년에 이르러 북부여가 졸본부여에게 복속되어 멸망하게 되자 북부여 해우루 왕의 동생이었던 해부루가 북쪽으로 도망쳐 다시 나라를 세우는데 이가 곧 가섭원부여(동부여)라고 기록하고 있고, 해부루 28년인 기원전 59년에 동부여 사람들이 주몽을 해하려고 하자 주몽이 그곳에서 도망쳐 엄리대수를 건너 졸본부여로 간 후 아들없이 딸만 셋이 있던 졸본부여왕의 둘째 부마가 되었다가 왕이 죽자 기원전 58년 10월에 그 왕위를 물려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이가 곧 고구려의 시조라는 것이다.
앞의 내용들을 모두 종합하여 부여의 왕계(王系)와 주몽의 세계(世系)를 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다.
북부여시조
천제 해모수
↓-------------------------------↓
북부여왕 2대 해모수리 고리군왕 해진
↓ ↓
북부여왕 3대 해해사 ?
↓ ↓
동부여시조 해부루 ← 북부여왕 4대 해우루 옥저후 해불리지
↓ ↓ ↓
동부여 2대 금와 졸본부여시조 동명왕 부여두막 해주몽
↓ ↓ ·
동부여 3대 대소 졸본부여왕 2대 부여무서 ·
. ↓ ·
. 고구려시조 주몽 ←········
그리고 후대의 기록인 호태왕 비문을 보면 광개토대왕을 추모왕의 17세 손으로 기록하고 있어 아직까지 그 비밀을 풀지 못하고 있었다.
호태왕비는 광개토대왕이 죽은 1년 후인 서기 414년에 세워졌는데, 비문 속의 추모왕이란 고구려의 건국시조인 주몽을 말하는 것이고, 유류왕이란 2대 유리왕을 말하는 것이며, 대주류왕이란 3대 대무신왕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비문은 광개토대왕을 추모왕의 17세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19대 왕이므로 17세 손이라는 기록과는 직접 관련이 없을 것이고, 또 족보를 따져 본다고 해도 광개토대왕은 주몽의 12세 손에 해당하므로 17세손과는 관련지어 생각할 수 없지만, 재사라는 인물의 실체를 알게되면 전혀 다른 해석을 할 수 있게 된다.
[호태왕비문 17세손 기록의 진실]
시조 추모왕(주몽, 고구려 건국시조)
딸 추모왕의 딸(고여달과 혼인)
외손자 고여율
외증손자 고막래
외고손자 고재사(유리왕의 양자로서 유리왕의 혈통을 이어받지 않았다, 고구려는 5대 모본왕까지는 해씨였고,
그 이후는 고씨였다)
이 재사라는 인물은 6대 태조대왕의 아버지로서 유리왕이 막내아들 여진이 비류수 강물에 빠져 죽는
사건 이후 죽은 막내아들 또래의 아이를 양자로 들인 사람이었다. 그런데 5대 모본왕이 폭압정치를
하자 신하들이 그를 제거하고 재사에게 왕위에 오를 것을 권유했으나 그는 왕위를 사양했고,
결국 그 아들 고궁이 왕위에 올랐고, 또 그 조카인 차대왕이 왕위에 올랐으며, 또 그 조카인 신대왕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들은 한결같이 오래 살았다.
외5세손 실명
외6세손 실명
외7세손 신대왕(고재사의 셋째 아들의 후손)
외8세손 실명 (이름을 알 수 없고, 신대왕이 오래 살아 아버지보다 일찍 죽었을 것이다)
외9세손 산상왕
외10세손 동천왕
외11세손 중천왕
외12세손 서천왕
외13세손 돌고(이복형인 봉상왕이 역모로 몰아 죽였다)
외14세손 미천왕
외15세손 고국원왕
외16세손 고국양왕
외17세손 광개토대왕으로 이어지게 되어 정확히 해모수의 17세손이 된다.
광개토대왕의 직계혈통은 위와 같이 정리되는데, 주몽은 졸본부여의 왕위를 물려받아 21년 간 왕위에 올라 있다가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졸본부여를 없애버리고 새로운 나라인 고구려를 다시 건국하고 왕위에 올랐고, 그 아들 유리왕은 막내아들 여진이 비류수 강물에 빠져 죽는 사건이 발생 한 후 이복여동생의 증손자인 고재사라는 아이를 양자로 받아 들였는데, 태조대왕 고궁으로부터는 이 고재사의 혈손들이었다. 고구려는 해씨와 고씨 두 성씨로 왕위가 이어졌다.
☆ 기원전 239년에 해모수가 북부여를 건국하고 기원전 232년에 천제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그리고 그 후손으로 왕위를 이어갔는데, 기원전 108년에 이르러 졸본에서 동명이 다시 졸본부여를 세우고 왕위에 오르게 되고, 기원전 86년에 이르러서는 졸본부여가 북부여를 병합하게 되어 북부여는 멸망하고 만다. 그러자 왕의 동생이었던 해부루가 멸망한 북부여 유민들을 이끌고 동북쪽으로 도망쳐 다시 나라를 세우는데 이가 곧 동부여이다.
해모수의 고손자인 주몽은 기원전 79년 동부여에서 태어나 22세 때인 기원전 58년에 졸본부여로 도망쳐 와 졸본부여왕의 부마가 되었다가 왕이 죽자 그 왕위를 물려받아 북부여의 후예가 졸본부여의 왕위에 오르게 되는 이상한 일이 벌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하백의 의미
호태왕 비문에서 주몽의 어머니인 유화를 하백의 딸(河伯女郞)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 하백(河伯)이란 의미를 지금까지 정확히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하백이란 강에서 물고기를 잡아 살아가는 어부를 말하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된 고구려 건국설화에는 주몽이 동부여에서 도망쳐 쫓겨 엄호수까지 왔을 때, 주몽이 강에 대고 "내가 지금 쫓기고 있는데, 나는 천제의 자손이요 하백의 외손자이다" 라고 소리치자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주몽 일행에게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고 했고, 비문의 기록도 엄호수를 엄리대수, 자라를 거북으로 기록한 것만 다를 뿐 설화의 구성은 같다.
그런데 자라나 거북은 용왕의 병을 치료할 토끼의 간을 구하기 위하여 토끼를 꼬여 용궁으로 데려간다는 별주부전에 등장하는 동물이다. 즉 자라나 거북은 무언가를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고, 물고기는 고기잡이 어부들이 잡는 것이라는 것이다.
비문의 기록 중에도 갈대로 엮은 거북이 떠올라 주몽을 강 건너게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갈대로 엮은 거북이란 바로 갈대 배 즉 갈대를 베어 엮어 만든 고기잡이배를 말하는 것이다.
이때 주몽은 동부여 군사에게 쫓겨 강을 건널 수 없게 되자 강에서 갈대 배를 타고 고기잡이를 하고 있던 어부들에게 소리쳐 강을 건너게 해 달라고 도움을 청했는데, 이때 자기의 외할아버지도 어부라는 말을 덧 붙였고, 주몽의 말을 들은 어부들은 갈대 배를 끌고 와서 주몽 일행을 배에 실어 강을 건너 주고는 다시 흩어져 고기잡이를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상황을 역사에서는 물고기와 자라가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어 주몽 일행을 건너게 하고는 다시 흩어졌으므로 뒤쫓는 병사들은 건널 수 없었다고 기록했던 것이며, 비문에도 갈대로 엮은 거북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으므로 강을 건너 홀본의 비류곡 서성산 위에 도읍을 세웠다 라고 기록했던 것이다.
따라서 주몽의 어머니 유화는 귀족의 딸이 아니라 어부의 딸이었다는 말이 된다.
주몽의 아버지인 불리지는 압록강 서쪽을 지나다가 유화라는 어부의 딸을 겁탈하여 주몽을 낳게 했던 것이다.
[참고]
☆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비문
惟昔始祖鄒牟王之創基也
옛날 시조 추모왕이 터를 잡고 창업했도다.
出自北夫餘天帝之子母河伯女郞 部卵降世生而有聖德☆☆☆☆
아버지는 북부여 천제의 자손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다.
알을 깨고 세상으로 내려와 태어나시니 성덕이 있고...
(天)命駕巡幸南下路由夫餘奄利大水王臨津言曰我是皇天之子母河伯女郞鄒牟王
하늘의 명을 받아 남쪽으로 순행하며 부여의 엄리대수를 지날 때 왕이 나루에 다달아 말하기를 "나는 황천의 자손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인 추모왕이다.
爲我連 浮龜應聲卽爲連 浮龜然後造
나를 위하여 갈대로 엮은 거북이여 떠오르라" 소리치니 갈대로 엮은 거북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다.
渡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
강을 건너 비류곡 홀본 서성산 위에 도읍을 세웠다.
焉不樂世位因遣黃龍來下迎王 王於忽本東岡黃龍負昇天
왕위에 올라 세상의 즐거움을 누리시지도 못했는데 하늘에서 황룡을 내려 보내와 왕을 영접해가니 왕이 홀본 동쪽언덕에서 황룡을 타고 승천하셨다.
顧命世子儒留王以道興治
외아들 유류왕이 도를 일으켜 나라를 다스리고
大朱留王紹承基業
대주류왕이 왕위를 이어 대업의 기초를 튼튼히 했다.
還至十七世孫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二九登祚 爲永樂太王
세월이 흘러 17세손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에 이르렀는데 18세에 왕위에 올라 영락태왕이라 하였다.
恩澤洽于皇天威武桭被四海掃除☆☆庶寧其業 國富民殷五穀豊熟
황천의 위력으로 온 세상을 깨끗이 하고... 은택을 베푸니 사람들이 편안히 각자의 생업에 열중하게 되었다.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들은 풍년가를 불렀다.
昊天不弔州有九宴駕棄國以甲寅年九月二十九日乙酉遷就山陵於是立碑銘記勳績以示後世...
하늘의 부름을 받으니 그를 잊지 않기 위하여 구연가기국에서 산릉 가까이로 돌을 옮겨 갑인년(A.D.414) 9월 29일 을유일에 후세에 볼 수 있도록 훈적을 새겨 비를 세우노라.
백제 건국시조 온조왕의 혈통
백제의 건국시조 비류왕과 온조왕의 혈통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은 채 학자마다 사람마다 온갖 주장들이 난무하는데, 기록에 나타난 탄생설화를 정리해 보면, 주몽과 졸본부여 공주 사이 탄생설, 주몽과 월군여인 사이 탄생설, 우태와 소서노 사이 탄생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어느 사람은 비류는 우태와 소서노 사이에서 출생했고, 온조는 주몽과 소서노 사이에 출생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주몽과 졸본부여 공주 사이 탄생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백제 시조 온조왕은 그의 아버지가 추모인데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이 북부여에서 난을 피하여 졸본부여에 이르렀더니 부여왕이 아들은 없고 다만 딸만 삼형제가 있었는데, 주몽을 보고는 그가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둘째 딸로서 아내를 삼게 했다. 그 후 얼마 되지 않아서 부여왕이 죽고 주몽이 그 왕위를 이었다. 주몽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비류요, 차자는 온조이다" 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이 기록만을 본다면 비류와 온조가 틀림없이 주몽과 졸본부여 둘째 공주와의 사이에서 탄생한 것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고,
주몽과 월군여인 사이 탄생설은 삼국사기의 주에 "혹은 주몽이 졸본에 이르러 월군여인에게 장가를 들어 두 아들을 낳았다고도 한다" 라고 부기해 놓았기 때문에 대두된 설이다.
우태와 소서노 사이 탄생설은 비류와 온조는 주몽의 혈통을 이어받지 않고 우태와 소서노 사이에서 탄생했다는 주장이다.
이는 삼국사기에 "일설에는 시조 비류왕은 그 아버지가 우태이니 북부여왕 해부루의 서손이요, 어머니는 소서노이니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로서 처음 우태에게로 시집을 가서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아들은 비류요, 둘째 아들은 온조였다.
우태가 죽은 뒤 졸본에 홀로 살았는데 그 후 주몽이 부여에서 용납되지 못하고 전한 건소 2년 봄 2월에 남쪽 지방으로 도망하여 졸본에 이르러 도읍을 정하고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으며, 소서노에게 장가를 들어 왕비를 삼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주장하게 된 설이다.
그리고 또 비류는 우태의 아들이고 온조는 주몽의 아들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는 소서노가 우태와 혼인했다가 우태가 죽은 뒤 주몽과 다시 혼인했었다는 기록과 주몽을 동명성왕이라고 기록한 삼국사기의 기록 그리고 온조가 주몽이 죽고 난 그 다음해에 십제를 건국하고 맨 처음 동명왕의 사당을 세웠다는 것을 주몽의 사당을 세운 것으로 오해하여 생겨난 주장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어느 기록도 비류와 온조 형제가 아버지가 다르고 어머니가 같은 이부동모 사이라고 기록하고 있지 않고 친형제로 기록하고 있어 주장에 신빙성이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러 주장 중 어느 설이 진실일까?
제반 상황을 종합해 보면 비류왕과 온조왕은 우태와 소서노 사이 출생설이 진실인 것으로 판단된다.
소서노는 졸본사람 연타발의 딸로서 기원전 66년 생이고, 주몽은 기원전 79년 생으로서 22세 때인 기원전 58년에 동부여로부터 졸본부여로 도망쳐 와서 졸본부여 둘째 공주와 혼인하고 왕이 죽자 졸본부여의 왕위에 오르는데, 이때 소서노의 나이는 9세에 지나지 않았다.
그 후 소서노는 자라서 졸본부여 동명왕의 아들(또는 손자)인 우태와 혼인을 하여 두 아들인 비류와 온조를 낳았던 것으로 보인다.
☆ 삼국사기에는 우태를 해부루의 서손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서 우태는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의 손자일 것이다.
왜냐하면 고구려나 백제가 같은 부여에서 발원했지만 고구려 왕실의 원래 성씨는 해씨였고, 백제 왕실의 성씨는 부여씨였기 때문인데, 해씨의 시조는 북부여 건국시조 천제 해모수였고, 부여씨의 시조는 졸본부여 건국시조 동명왕이었다.
따라서 후일 백제왕실의 성씨를 부여씨라 했다는 것은 온조왕이 부여씨라는 의미이고, 온조왕의 아버지인 우태 역시 부여씨라는 의미이며, 시조인 동명왕 역시 부여씨라는 의미인데, 그렇다면 동명왕의 원래 이름은 부여두막(또는 부여두막루라고도 한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둘째아들인 온조가 태어난 얼마 후 그 아버지인 우태가 젊은 나이로 죽게되자 그 어머니인 소서노는 애 둘 딸린 젊은 과부가 되어 졸본에 홀로 살고 있었는데, 이때 마침 주몽이 혼인했던 졸본부여 공주가 죽게 되었을 것이고,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라 있던 주몽은 다시 왕후를 구해야 했을 것인데, 이때 주몽은 아들 둘 딸린 과부 소서노를 왕비로 선택한다.
이때 주몽이 왜 명문가의 처녀를 새로운 왕비로 간택하지 않고 아들이 둘이나 딸린 과부 소서노를 왕비로 맞아들였다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으나 이때 주몽이 처한 상황을 생각해 보면 충분히 가능한 선택이었다고 판단된다.
즉 동부여에서 졸본으로 도망쳐 와 졸본부여에서의 정치적 기반이 약했던 주몽으로서는 자신의 절대적인 지지기반이었을 졸본부여 둘째 공주가 죽게 되자 졸본부여의 호족이었으며 갑부였던 연타발을 자신의 지지기반으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애 둘 딸린 연타발의 딸 소서노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고, 소서노의 입장으로서는 자신에게는 졸본부여 건국시조인 동명왕의 혈손인 비류와 온조라는 두 아들이 있었으므로 주몽과 혼인함으로써 자신의 아들을 태자로 봉해 주몽의 뒤를 이어 다음 왕위에 올리려고 했을 것이다.
☆ 주몽은 졸본부여 둘째 공주와의 사이에서는 아들은 낳지 못했던 것으로 보이나 딸은 하나 낳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자 소서노는 두 아들을 데리고 기원전 42년인 기묘년에 진번 부근 땅으로 가버리게 되고, 기원전 37년에 이르러 주몽은 졸본부여를 없애버리고 새로운 나라 고구려를 다시 건국하게 된다.
☆ 태백일사 고구려국본기에는 "고주몽은 재위 시에 말하기를 '만약 적자인 유리가 오게 되면 마땅히 태자로 봉할 것이다' 라고 했다.
소서노는 장차 두 아들에게 이로울 것이 없음을 염려하여 기묘년 3월에 패대의 땅이 기름지고 산물이 풍부하고 살기 좋다는 말을 사람들에게 듣고 남쪽으로 내려가 진번지간에 이르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비류와 온조가 주몽의 혈통이 아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때 소서노가 졸본을 떠나 패수와 대수 사이의 땅인 진번으로 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는데, 기묘년이란 고구려가 건국되기 전인 기원전 42년을 말하는 것이므로 이때 주몽이 졸본부여의 왕위에 올라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기록이고, 이때 비류와 온조는 어린애였다. 우리는 지금 주몽의 아들 유리가 기원전 19년 동부여로부터 도망쳐 와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가 그때 졸본을 떠나 진번 부근의 땅으로 가서 백제를 건국했다고 알고 있으나 사실은 그보다 훨씬 전에 졸본을 떠났던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소서노는 기원전 42년에 어린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진번 부근의 땅으로 가서 처음에는 농사를 지어 10년 만에 사방 반 천리의 땅이 소서노의 것이 되었다고 하는데 진번이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도산 일원이다.
그러다가 기원전 19년 주몽이 죽고 동부여에서 도망쳐 온 유리가 고구려의 2대 왕위에 오르자 소서노는 다음 해인 기원전 18년에 자신이 개척한 진번 부근의 땅에 두 아들로 하여금 나라를 세우게 하는데, 이때 비류와 온조는 한산 부아악에 올라 도읍할 곳을 물색하게 된다.
결국 비류는 서쪽 물가인 미추홀에 도읍하고 국호를 백제라 하게 되고, 온조는 부아악 북쪽이며, 한수의 남쪽 위례성에 도읍하고 십제라 했는데, 기원전 6년경 형인 비류가 갑자기 죽자 비류의 백제를 통합해 새롭게 백제라 함으로써 역사에 백제를 등장시키는 것이다.
이때 온조왕은 나라를 세우고 맨 처음 동명왕의 사당을 세우는데, 이는 주몽의 사당을 세웠다는 말이 아니라 사실은 졸본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의 사당을 세운 것이다.
온조왕은 졸본부여 동명왕의 증손자였던 것이다.
신라 건국시조 혁거세거서간의 혈통
신라의 건국시조 혁거세의 혈통은 매우 아리송해 지금까지도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고허촌장 소벌공이 양산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 우물 옆 숲 가운데에 말이 꿇어앉아 울고 있었다. 즉시 가서 보니 갑자기 말은 보이지 않고 다만 큰 알이 있었다. 이를 쪼개니 그 속에서 어린 아이가 나오므로 이를 거두어 길렀다. 그의 나이 10여세가 되니 매우 숙성하여 6부 사람들이 그의 출생이 신기하고 이상하므로 떠받들어 높이더니 이 때에 이르러 그를 세워 임금을 삼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혁거세의 출생에 대해 신화적으로 기록하고 있고,
삼국유사 신라시조 혁거세왕 조에는,
"전한 지절 원년 임자(B.C.69) 3월 초하루에 6부의 조상들은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 언덕위에 모여 회의를 했다.
우리들은 임금이 없어 백성들을 다스리지 않기 때문에 백성들이 방자하게도 제멋대로 하고 있다. 그러니 어찌 성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서 임금으로 추대하고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지 않을 것인가 하였다.
이에 그들이 높은 곳에 올라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 아래 나정 우물가에 번개 빛처럼 상서로운 기운이 땅에 닿도록 비추고 있었다. 그리고 흰 말 한 마리가 땅에 끓어 앉아 절하는 형상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곳을 찾아가 보았더니 그곳에 자주빛 알 한 개(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한다)가 있었다.
말은 사람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알을 깨고서 어린 사내아이를 얻으니 그는 모습이 단정하고 이름다웠다. 모두 놀라고 신기하게 여겨 그 아이를 동천(東泉)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들이 따라서 춤을 추었다.
이내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청명해졌다.
이에 그 아이를 혁거세왕이라 하고 위호를 거슬감이라고도 했다" 라고 역시 신화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태백일사 고구려국 본기에는,
"사로의 시왕(시조왕)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다. 옛날 부여제실의 딸 파소가 있었는데 남편없이 잉태했으므로 사람들의 의심을 받을까 두려워 (부여로부터 도망쳐) 눈수를 지나 동옥저에 이르렀다. 또 배를 타고 남하하여 진한의 나을촌에 도착하여 (아이를 낳았다). 이때 소벌도리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집에 데려다 길렀다. (혁거세가) 나이 13세가 되자 지혜가 빼어나고 숙성하며, 성덕이 있어 진한 6부의 사람들이 모두 존경하며 거세간이 되니 도읍을 서라벌에 세우고 나라를 진한이라고도 하고 또는 사로라고도 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혁거세의 어머니가 부여공주인 파소라고 기록하고 있고, 아버지에 대해서는 신분을 밝히지 않고 있다.
☆ 동부여는 지금의 중국 내몽고자치구 정람기 부근에 위치한 나라였고, 눈수는 길림성 대안을 지나는 강이며, 동옥저는 내몽골 옹우특기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진한은 요녕성 금주(錦州)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 기록 중 과연 어느 기록이 진실일까?
사람이 새나 병아리가 아닌 바에야 진짜 알에서 태어날 수는 없는 노릇이고 여자가 남자 없이 아이를 잉태할 수 없다는 것을 감안해 생각해 보면 혁거세 탄생설화는 태백일사의 기록이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혁거세가 태어난 때는 기원전 69년이고, 13세 때인 기원전 57년에 신라의 시조가 된다.
그 어머니인 파소가 18세쯤 혁거세를 낳았다고 보면 파소의 출생년도는 기원전 86년이 된다.
기원전 86년은 북부여가 졸본부여에게 멸망당하고, 북부여의 해부루가 멸망한 북부여 유민들을 이끌고 가섭원으로 옮겨 가 동부여를 다시 건국한 해인데, 이 어수선한 해에 파소가 출생하게 된다.
그런데 삼국유사 감통 제7 선도성모 수희불사 조를 보면,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의 딸이며 이름은 사소(裟蘇: 婆蘇)였다. 일찍이 신선의 술법을 배워 해동에 와서 머물러 오랫동안 돌아가지 않았다. 이에 부황이 솔개 발에 서신을 매달아 보내 말했다. '솔개가 머무는 곳에 집을 지으라' 그리하여 사소(파소)는 서신을 보고 솔개를 날려보내니 선도산으로 날아가서 멈추므로 드디어 그곳에 살아 지선이 되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혁거세의 어머니 파소(사소)는 동부여 해부루왕의 공주였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 삼국사기 신라본기 경순왕 조의 논평을 보면 정화연간에 김부식이 사신 일행으로 송나라에 갔을 때 우신관에 이르러 한 사당에 선녀의 화상을 걸어놓은 것을 보았는데, 관반학사 왕보가 말하기를 "이것은 귀국의 신인데 공들은 이를 아십니까? 옛날 어떤 제왕의 딸이 남편없이 잉태해 남들로부터 의심을 받을까 하여 곧 바다를 건너가 진한으로 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가 곧 해동의 첫 임금이 되었으며, 제왕의 딸은 지선이 되어 길이 선도산에 있게 되었는데 바로 이 상입니다" 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당시 중국 송나라에도 혁거세의 어머니인 파소의 사당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시조 혁거세의 혈통은 성씨를 알 수 없는 아버지와 동부여 해부루왕의 공주인 파소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혁거세의 성씨를 박씨라고 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아버지의 원래 성씨가 박씨가 아니었을까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파소는 신라에서 어떠한 대접을 받았을까?
삼국유사에는 "신모는 오랫동안 이 산(서연산)에서 살면서 나라를 진호하니 신령스럽고 이상한 일이 매우 많았다. 때문에 나라가 세워진 후로 항상 삼사(나라에서 지내는 큰 제사)의 하나로 삼았고, 그 차례도 맨 위에 있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파소를 매우 중요하게 받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