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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까지 진출한 기록의 진실은?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0. 7. 18:50

윤여동설 - 고구려가 우북평·어양·상곡·태원까지 진출했다는 기록은 역사적 사실일까? - 최초주장 

 

  [위 : 요동 표시가 된 곳이 지금의 북경이다. 고대의 요동은 지금의 북경 일원이었고, 고구려와 백제는 요동 동쪽 1천여리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여러 사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모본왕 2년(A.D.49) 조를 보면,
  "봄에 장수를 보내 한나라(후한)의 북평(우북평의 오기),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습격했더니 요동태수 채동이 은의로서 대하므로 다시 화친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그 기록의 사실여부를 놓고 논쟁이 시작되었다.
  이때 고구려의 도읍 국내성이 지금의 한반도 압록강 북쪽 집안이라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때 고구려가 지금의 요하 동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어떻게 그 멀리 북경 부근과 산서성까지 습격할 수 있었겠느냐고 하면서 기록이 잘못되었을 것이라고 하고,
  그와는 반대로 그 기록을 역사적 사실이라 믿는 사람들은 개인의 기록도 아닌 정사서에 그렇게 기록되었다면 그러한 일이 실제로 일어났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이때 고구려가 지금의 요하를 건너고 산해관을 넘어 그 서쪽의 북경을 치고 더 나아가 산서성 태원까지 진출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의 졸본, 국내성, 환도성이 압록강 북쪽이 아니라 지금의 북경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평양성이 북한 평양이 아니라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라면 고구려 역사를 전혀 다르게 해석해야 하고, 이때 고구려가 후한을 선제 기습 공격한 이유를 새로운 각도에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20년(A.D.37) 조를 보면,
  "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전한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설치했던 전한 낙랑군이 고구려의 대무신왕에 의해 일단 소멸했음을 알 수 있고,
  대무신왕 27년(A.D.44) 조에는,
  "가을 9월 한나라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 낙랑을 치고 그 지역을 빼앗아 군현을 만드니 살수 이남이 한나라에 속하게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전한 낙랑군 땅을 고구려에게 빼앗긴 7년 후에 후한의 광무제가 고구려에게 빼앗긴 전한 낙랑군 땅으로 침공해 들어와 살수(필자주 : 지금의 북경 동북쪽 조하) 이남 땅을 탈환해 그곳에 다시 낙랑군(필자는 이를 후한낙랑군이라 부른다)을 설치했다는 것을 알게 하는데, 다시 그로부터 5년 후인 서기 49년에 고구려에서 다시 북평(중국 사서에는 우북평이라 기록되어 있다)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기습 공격하는 것이다.
  옛날 기원전 108년에 전한의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한사군을 설치했을 때 그 중의 한 군이 낙랑군이었고, 이때의 낙랑군은 위만조선의 도읍이었던 왕검성을 치소로 사용했는데,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다. 
  그런데 전한 낙랑군이 설치된 지 145년이 지난 서기 37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그 낙랑군을 쳐서 빼앗아버리자 후한의 광무제는 고구려에게 빼앗긴 전한 낙랑군 땅을 되찾기 위해 서기 44년에 군사들을 출동시켜 고구려를 침공했던 것이다.
  원래 광무제의 목표는 전한의 무제가 설치했던 전한 낙랑군 땅 전체를 되찾고 싶었을 테지만 이때 고구려도 강력한 제국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를 모두 탈환하지는 못하고, 살수이남 땅만을 다시 빼앗아 그곳에 후한낙랑군을 설치했던 것이다.

 

☆ 우리는 지금 이 기록을 한반도에 비정해 해석함으로써 살수가 청천강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나 이는 틀린 것이다.

한반도에는 낙랑군이나 낙랑국이 설치된 적이 없다. 
      
  이때 광무제가 살수 이남에 설치했던 후한낙랑군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흥륭현 일원을 말하는 것으로 생각되고, 이때 고구려의 도읍은 국내성이었는데, 지금의 북경시 연경현 영녕진부근이었다.
  그런데 후한 낙랑군이 설치된 지 5년 후 고구려가 후한의 북평(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습격하는 것이다.
  이때 고구려는 후한 광무제에게 빼앗긴 낙랑 땅을 다시 되찾으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때 하북성 흥륭현 일원에 설치된 후한낙랑군 땅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물론 후한낙랑군을 직접 공격하는 방법도 있겠지만, 이때 고구려는 직접 후한낙랑군을 공격하는 방법을 택하지 않고 우선 후한낙랑군이 후한 본국의 지원을 받을 수 없도록 교통로를 먼저 차단하여 고립시킨 후 공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고구려의 도읍은 국내였는데, 고구려가 흥륭현 일원에 위치한 후한낙랑군을 고립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이는 고구려군이 북경 또는 천진, 하북성 보정시 일원을  차지하고 서쪽 후한 본국과의 육상 교통로를 차단시키면 흥륭 부근의 후한낙랑군은 본국의 지원을 받을 수 없게 되므로 이때 고구려가 후한낙랑군을 공격하면 쉽게 수중에 넣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기록에는 이때 고구려가 북평(北平: 우북평),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 등지를 습격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후한서 고구려전 구려 조에는, "건무 25년(A.D.49) 봄 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 태원을 침입하여 노략질하는 것을 요동태수 제융(삼국사기에는 채동이라 기록했다)이 은의와 신의로 대하니 모두 요새 밖으로 철수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고구려가 북평이 아닌 우북평을 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북평은 고평 부근으로 비정되고, 상곡은 역현 부근으로 비정해 볼 수 있으며, 어양(漁陽)은 물고기잡이와 관련이 있는 지명으로서 석가장 부근으로 비정된다.    

  따라서 이때 고구려가 우북평, 어양, 상곡를 친 것은 틀림없는 역사적 사실일 것이고, 그 목적은 후한낙랑의 목줄을 조이기 위해 후한과 후한낙랑군과의 교통로를 차단하려고 했던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이 기록을 잘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이때 고구려의 도읍 국내가 북경 연경현 영녕진 부근이었음을 알지 못하고 한반도 북쪽 압록강 너머 집안을 국내성이라고 잘못 비정한 결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