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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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새롭게 비정하는 백제의 도읍과 그 위치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3. 23. 19:06

윤여동설 - 새롭게 비정하는 백제의 도읍과 그 위치 - 최초주장

 

 

 

  온조백제는 기원전 18년 건국하여 위례성에 도읍했고, 기원전 5년 남한성으로 도읍을 옮겼으며, 서기 371년에 한성으로 다시 옮겼고, 475년에 웅진으로 옮기고, 538년에 도읍을 사비로 또 옮겼는데, 결국 이곳 사비에서 나·당연합군의 침공을 받고 의자왕이 서기 660년 7월 18일에 항복함으로써 백제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도읍명                        왕대      도읍이전년도     도읍기간        비고
   위례성                        온조왕       B.C.18             13년           건국지
   남한성                       온조왕       B.C.5              376년          비류백제통합후     
   한성                          근초고왕    A.D.371           104년          요서진출후
   웅진                          문주왕       A.D.475             63년          한성함락당한후
   사비                          성왕          A.D.538 - 660   122년          국세회복을 위해

 

  그런데 후한서 한(韓)전을 보면,
  "한은 삼종이 있는데, 첫째는 마한이요, 둘째는 진한이며, 셋째는 변진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54국이고, 그 북쪽은 낙랑, 남쪽은 왜와 접했다.
  진한은 동쪽에 있는데, 12국이며, 그 북쪽은 예맥과 접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국이며, 그 남쪽은 왜와 접했다.
  모두 78국이며, 백제는 그 중의 한 개 나라이다.
  큰 나라는 1만여 호, 작은 나라는 수천 가인데, 각각 산과 바다를 경계로 한다.  그 땅을 합하면 사방 4천여 리이다
"
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를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마한이 경기도, 서울, 충청도, 전라도 일원을 차지했고, 진한이 경북일원, 변한(변진)이 경남일원, 예맥이 강원도 일원, 낙랑이 평안도 일원을 차지했으며, 왜가 일본열도라고 비정하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고, 백제가 한반도 서울 부근에서 건국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마한·진한·변한(변진)을 합한 삼한의 면적이 사방 4천여리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사방 4천리란 한변의 길이가 4천리씩이라는 말로서 기록대로라면 삼한이 사방 1천리에 불과한 남한보다 무려 16배의 면적을 차지하고 있던 나라였다는 말이 된다.
  삼한이 지금의 한반도 남한보다 16배의 면적을 가진 큰 나라였다면 이는 삼한이 넓은 대륙에 위치하지 않는 한 기록을 충족할 수 없다.
  그런데 진서지리지에는 "낙랑군 수성현은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 기록되어 있고, 태강지리지에는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고,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통전에도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장성이 이 산에서 시작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예로부터 갈석산은 한족과 동이족의 국경선 역할을 하던 산이었다.
  그리고 중국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장성이란 만리장성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의 만리장성은 한반도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중국 하북성 진황도 산해관 노룡두에서 시작되었고, 지금 갈석산이라는 이름의 산도 북한 평양에 있는 것이 아니라 북경의 동쪽 방향인 하북성 진황도 창려현에 있는 산이다.[필자주 : 물론 이 갈석산이라는 산도 원래의 갈석산은 아니다. 원래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 수성진 부근에 위치한 지금의 낭아산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도 "백제의 동쪽에 낙랑이 있고, 북쪽에 말갈이 있다"고 하였고, 또 "신라의 서쪽에 백제가 있고, 남쪽에 가야가 있다"고 했으며, 또 마한의 동북쪽에서 백제가 건국되었다고도 했으며, 중국 수나라의 역사서인 수서에는 "신라국은 고(구)려의 동남쪽에 있다. 한나라 때의 낙랑(낙랑동부도위를 말하는 듯) 땅에 사는데, 혹은 사라라고도 부른다"라고 기록하고 있고,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던 당나라의 역사서인 구당서에는 "신라국은 본래 변한의 먼 후예이다. 그 나라는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과 남쪽은 모두 대해로 한정되어 있고, 서쪽은 백제, 북쪽은 고구려와 인접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기록대로라면 우리가 한반도 경주 부근에서 천년왕국을 건설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삼국이 중국대륙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위치를 비정해 보면, 우리의 백제가 한반도가 아닌 하북성 당산, 진황도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고, 신라(진한)가 한반도 경주가 아닌 요녕성 금주 부근에, 가야(변한)가 한반도 김해가 아닌 요녕성 흥성 부근에 그리고 고구려가 북한 평양이 아닌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위치했으며, 마한이 전북 익산이 아닌 북경 동쪽 하북성 당산시 풍윤 부근에 위치했다는 말이 되니, 현재 한반도에 살고 있고 삼국이 한반도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교육받은 대한민국 사람들로서는 기록이 잘못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발상을 전환하여 우리의 선조들이 원래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서 살았고, 삼한이 실제 사방 4천여리를 차지한 큰 나라였으며, 기록이 정확한 것이라면, 마한이 지금의 당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54개 소국, 진한이 요녕성 금주를 중심으로 12개 소국, 변한(변진)이 요녕성 흥성을 중심으로 12개 소국으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말이 되니 결국 지금 중국의 도읍인 북경 부근까지가 우리의 옛 땅이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선뜻 믿을 수 없겠지만 이것이 사서들이 알려주는 우리의 역사강역으로서 강성할 때는 지금의 북경을 지나 최소한 태행산맥까지는 우리의 옛 땅이었을 것이다.[필자주 : 하북성 보정 부근이 고조선의 서쪽 경계였다] 
  그런데 우리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그곳을 잃어버리고는 한반도 부근만이 우리의 역사강역이었던 것으로 역사를 이해하고는  고대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건들 모두를 한반도로 끌어들여 해석을 시도하고, 한반도에서 그 장소를  찾으려 하고 있으니 이는 솔직히 역사라고 할 수가 없다.

 

☆ 많은 사람들은 삼국사기, 삼국유사가 한반도 삼국의 기록인 것으로 알고 한반도에서 그 기록 속의 장소들을 찾으려 하고 있으나 사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는 대륙을 중심으로 존재했던 삼국의 역사서이고, 고려사 역시 대륙에 있던 개경을 중심으로 쓰여진 고려의 역사서이지 한반도 개성을 중심으로 쓰여진 기록이 아니다. 필자는 이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만이 우리의 고대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잃어버린 대륙의 옛 강역을 제대로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단언한다.

 

   따라서 백제의 건국지 위례성이나 남한성은 한반도의 서울 부근이 아닌 북경 동쪽 하북성 당산, 진황도시 일원에서 찾아야 한다.
  위례성은 기원전 18년에 건국된 온조십제의 도읍이었는데, 지금의 진황도 도산 남쪽으로 비정된다. 
  그런데 얼마 후 미추홀로 가서 비류백제를 세웠던 비류가 갑자기 죽게 되자, 온조왕이 비류백제를 통합한 후 국호를 새롭게 백제라고 한 후 기원전 5년 정월에 남한성으로 도읍을 옮겼는데, 그 위치는 지금의 당산시 건창영 부근이다. 
  그리하여 백제는 서기 371년까지 남한성에 도읍하고 나라의 기틀을 다지게 된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백제의 온조왕이 말하기를 "내가 어제 나아가 순행하다가 한수의 남쪽 토양이 비옥함을 보았으니 그곳으로 도읍을 옮겨 영구히 편안할 계책을 강구해야겠다" 라고 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원래의 위례성은 한수의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13대 근초고왕 때인 371년 겨울에 이르러 백제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고 승리하여 고구려가 서진으로부터 빼앗아 차지하고 있던 요서 진평현 지역을 백제가 차지하게 된다.
  그리하여 근초고왕은 도읍을 한성으로 옮기게 되는데, 지금의 도산 남쪽으로서 첫도읍 위례성 부근이다.
  근초고왕은 이때 고구려를 압박하기 위해 남한성에서 한성으로 도읍을 이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백제는 근구수왕, 침류왕, 진사왕, 아신왕, 전지왕, 구이신왕, 비유왕, 개로왕때까지 그곳에 도읍하게 된다.  그런데 396년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침공을 받고 한성이 포위되어 아신왕이 항복함으로써 근초고왕이 고구려에게 빼앗았던 요서 땅을 고구려에게 다시 빼앗기게 된다.   호태왕비문 병신년 조에서 58개성, 700개 촌을 백제로부터 빼앗았다는 기록은 바로 이러한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장수왕이 475년에 그 아버지 광개토대왕에 이어 다시 한번 백제의 한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개로왕을 잡아죽이게 되자 문주왕이 급히 웅진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충남 공주를 백제의 도읍 웅진이라 하고 금강을 웅천 또는 백강이라 하지만 이는 잘못 알고 있는 것으로서 웅진은 청룡하와 난하가 합류하는 노룡으로 비정되고, 백제는 웅진에 63년 간 도읍하며 다시 강국으로 부상한다.
  그리고 26대 성왕 16년인 538년 봄에 사비로 도읍을 또 옮기게 되는데, 우리는 이때의 상황을 한반도에 비정해 성왕이 고구려의 세력에 밀려 충남 공주에서 부여로 도읍을 옮겼다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지만 이 역시 우리의 착각이고, 성왕은 이때 노룡에서 그 하류인 지금의 난현(난주) 즉 사비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라 하게 된다.  
  그런데 백제는 결국 이 사비에서 엉뚱하게도 나당 연합군의 침공을 받고 멸망하고 말았으니.........
  상황이 이러한데도 역사학자라는 사람들은 아직도 삼국사기 기록 속 백제의 도읍들을 한반도에서 찾고 있다.
  그리고는 풍납토성이 위례성이라 하기도 하고, 서울이 한성이고 한강이 한수라고 하기도 하고, 공주가 웅진이고, 부여가 사비라고 우기고 있다.
  대륙에 한반도보다도 훨씬 큰 우리의 옛 땅이 있었음을 꿈에도 모르고..............

 

☆ 한반도에 있는 백제의 흔적들은 4세기 중엽 대륙에서 근초고왕과의 왕위 다툼에서 패한 무광왕이 한반도로 건너와 지모밀지(현 익산 금마 왕궁리)에 도읍을 정하고 새로 세웠던 반도백제의 흔적들이다. 그리고 공주에서 발견된 무령왕릉 때문에 헷갈리게 되었으나 이는 반도백제 무광왕의 후손인 무령왕이 대륙으로 건너가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다가 죽은 후 그 뼈를 간추려 한반도로 가져와 고향 땅인 한반도에 능을 조성했던 것이고, 위덕왕 역시 반도백제 무광왕의 후손으로서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다가 죽었으므로 부여에 묻혔을 가능성이 많다.
  백제는 대륙백제와 반도백제가 있었는데,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대륙백제의 기록이고, 반도백제의 기록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