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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선지 장군은 어떻게 파미르 고원을 넘었을까?

윤여동 2007. 10. 10. 08:35

윤여동설 - 고선지 장군은 어떻게 파미르 고원을 넘었을까?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고구려 지역의 5부 176성 69만여 호를 9도독부 42주 101현으로 만들고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한다.
  그리고는 고구려 백성 3만8천3백호를 끌고 가 중국 남쪽과 서쪽 변방으로 배치했다.
  이때 고선지의 가족들도 포로로 잡혀가 안서지역에 배치되었는데, 고선지의 아버지 고사계는 그곳에서 무공을 세워 장군으로 승진한다.
  그리하여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했던 고선지도 그 아버지의 공으로 유격장군에 임명될 수 있었다.
  고선지가 속한 부대는 안서도호부 산하로서 지금의 타림분지 부근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임무는 실크로드의 천산 남북로를 보호하는 것이었다. 
  타림분지는 매우 넓은 지역으로서 북쪽으로는 천산산맥, 서쪽으로는 파미르고원, 남쪽으로는 곤륜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분지사막지대였다.
  처음에는 그의 인물됨을 상관들이 알아보지 못해 발탁되지 못했으나 안서사진절도사 부몽령철이 고선지를 알아보고 그를 발탁하게 된다.
  그리하여 그는 진수사에 오르게 되었고, 당 개원 말에는 군사 2천을 이끌고 천산산맥 서쪽의 달해부를 정벌해 전공을 세우자 당 현종은 그를 안서부도호 사진도지병마사로 승진시킨다.
  그런데 이때 투루판이 급성장하여 당에 대항하게 된다.
  투루판은 이때 길기트(지금의 캐시미르 지방)로 진출해 정복한 후 당나라에 조공하는 주변국들을 차례대로 정복해 조공 길을 막아 버렸다.
  그러자 당 현종은 고선지 장군을 행영절도사로 임명하고 투루판 정벌을 명하게 되고, 고선지는 1만의 보기병을 거느리고 서역을 향하여 출발해 온갖 고생 끝에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고 천산산맥을 넘어 지금의 신장 위구르자치구 카쓰(喀什)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서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다시 평균해발 4∼5천m나 되는 파미르고원을 넘어야 했다.    
  파미르고원은 험준하고 좁은 협곡과 늪지대와 미끄러운 빙하지대를 수없이 지나야 하는 지옥 길과 같은 곳이었다.
  무려 100여 일의 강행군 끝에 간신히 파미르고원을 넘은 고선지는 군을 셋으로 나누어 공격을 개시해 투루판군을 격파하고 더 나아가 다시 험준한 힌두쿠시산맥을 넘어 투루판으로부터 항복을 받게 되자, 주변 72개국이 항복해 왔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지역이다.  
  그리하여 고선지 장군의 이름은 서역 전체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고선지는 투루판 원정 승전 보고서를 작성해 황제에게 보고하고 1천의 군사를 그곳에 남겨두고 철수해 오는데, 바로 이 보고서가 문제였다.
  이때 고선지의 상관이었던 부몽령철이 자신을 경유하지 않고 직접 황제에게 승전보고서를 올렸다고 시비를 걸고 나선 것이다.
  고선지는 황제에게 문서로서 먼저 보고하고 부몽령철에게는 직접 돌아와 자세히 보고할 요량이었을 것인데, 부몽령철은 자신을 건너 뛰어 황제에게 직접 보고했다고 온갖 욕설과 함께 고선지를 죽여버리겠다고까지 협박했다.
  부몽령철의 입장에서는 고선지가 자신을 무시했다고 생각할 만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중사 변령성이 비밀리에 황제에게 글을 보냈다.
  그 글 속에는 "고선지 장군은 지금 공을 세우고 개선했으나 황제에게 먼저 승전보고를 했다하여 죽을 운명에 처해 있습니다. 이렇게 그가 죽는다면 후일 누가 황제를 위해 충성을 바치겠습니까?"라고 썼다.
  그러자 현종은 고선지를 장안으로 불러들여 전공을 칭찬하고 홍로경으로 임명하고 어사중승을 겸하게 했다가, 부몽령철을 장안으로 불러들이고 고선지를 다시 안서사진절도사로 임명하여 그들을 떨어뜨려 놓게 된다.
  고선지는 다음해 2차 서역 원정길에 올라 소발률국과 석국을 정벌해 항복을 받고 그 왕을 포로를 잡아 당 현종에게 바치게 되고, 당 현종은 고선지를 개부의동삼사로 승진시키게 된다.
  그런데 포로로 바쳤던 석국왕이 조정 대신들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자 에에 격분한 석국왕자가 서역 제국에 고선지의 거짓말과 죄상을 고하고 대식국에 구원을 요청하게 된다.
  석국왕을 죽인 사건으로 인해 서역 제국들은 당나라를 믿을 수 없는 나라로 인식하게 되었고, 당에 반기를 드는 빌미를 제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이 연합하여 안서사진을 공격해오자 고선지는 7만의 정벌군을 편성하여 탈라스 대평원으로 달려가 전투를 하게 되었는데, 이때 칼루크군의 배신으로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군은 대패하게 되고, 고선지는 간신히 탈출에 성공하여 겨우 수천의 병사만을 이끌고 돌아와야 했다.
  이렇게 되어 당나라는 타림분지를 잃게 되고 안서도호부를 후퇴시키게 된다.
  장안에 돌아온 고선지는 우우림군대장에 임명되고 밀운군공에 봉해진다.
  그를 밀운군공으로 봉한 것을 보면 그의 원래 고향이 밀운 부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755년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고선지는 부원수에 임명되어 난을 토벌하기 위해 출병하게 되었는데, 고선지는 장안을 방어하는 섬주에 주둔했고, 현종은 변령성을 고선지군의 감군으로 임명한다.
  한편 봉상청이라는 사람도 범양절도부대사에 임명되어 동경인 낙양에 주둔하여 반군을 방어하려 했으나 기수 전투에서 패해 낙양이 함락되자 남은 군사를 이끌고 섬주로 퇴각하여 고선지에게로 와서는 지금 동관에 수비병이 없으니 만약 반군이 그곳을 통과한다면 장안이 위태로워진다고 말하게 되고, 고선지도 이에 동조하고 빨리 군사들을 그곳으로 이동시켜 요충인 동관에 방어선을 구축하게 되었고, 예측대로 반란군이 동관을 공격했으나 고선지군에 막혀 더 이상 진군할 수 없었다. 
  앞서 봉상청이라는 사람은 인물이 아주 못 생겼고, 절름발이였으며, 나이는 서른이 넘었으나 아직 출세를 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고선지가 안서사진병마사로 있을 때 고선지가 출입할 때는 항상 호위병 수십 명으로 하여금 호위를 하게 하고 다녔는데, 어느 날 봉상청이라는 사람이 글을 올려 자신을 기용해 주기를 청했으나 고선지는 그의 외모를 보고는 거절했다.
  그런데 봉상청은 그 다음날도,  또 그 다음날도 찾아와 고선지는 할 수 없이 그를 호위병 명단에 넣어 주었다.
  이때 마침 달해 부족이 배반하자 황제로부터 그들을 요격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절도사 부몽령철은 고선지에게 군사 2천을 주고 그들을 토벌하게 했고, 달해는 멀리 패주해 달아났다.
  고선지는 전과보고서를 작성하여 올려야 했는데, 그 보고서를 봉상청이 작성하여 고선지에게 가지고 왔다. 
  글을 읽어보니 명문이어서 고선지는 그 보고서를 그대로 황제에게 올렸다.
  고선지가 올린 전과보고서를 읽어본 장안의 대신들은 하나같이 명문이라 하며 그 보고서를 작성한 사람이 누군지 궁금해했다.
  그리하여 고선지는 그의 재주를 인정해 발탁했고, 이때부터 봉상청은 출세가도를 달리게 된다. 고선지와 봉상청은 이렇듯 인연이 깊은 사이였다.     
  그런데 감군인 변령성이 고선지가 방어담당지역인 섬주를 멋대로 이탈해 동관으로 군사를 움직였다고 보고하게 되어 고선지와 봉상청은 전선의 군중에서 함께 처형되고 말았다.
  앞서 안서에 있을 때 변령성은 고선지의 입장을 황제에게 알려 주어 도움을 주었던 사람이었는데, 이제 와서는 그를 죽이고 말았으니 이것도 운명인가?
  서역 정벌의 영웅 고선지 장군은 이렇게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그런데 고선지 장군보다 수백 년 앞선 시기에 광개토대왕이 천산, 우랄산맥 부근까지 진출했을 가능성이 있으니 이때 고선지 장군은 옛 광개토대왕이 갔던 곳에서 더 나아가 파미르고원을 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서역 정벌은 결국 우리 고구려인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