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전한서지리지가 말해주는 요동군과 요서군의 위치 - 최초주장
전한서의 원문과 해석문을 함께 올리는 것은 우리의 일반적인 역사 상식과 같이 옛날 한나라 때도 과연 지금의 요하가 요수였고, 요하를 중심으로 그 동쪽이 요동군이고, 그 서쪽이 요서군이었는지, 필자의 주장과 같이 지금의 북경 부근이 요동군이고, 영정하 서쪽이 요서군인지를 비교해 보라는 의미이니 지도를 펴놓고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요동군(遼東郡)
진나라가 설치했고 유주에 속했다. 호수는 55,972호이고, 인구는 272,539명이며, 속현이 18현이다.
양평현에는 목사관이 있고, 왕망이 창평으로 고쳤다.
신창현이 있고,
무려현은 서부도위의 치소이다.[사고는 소위 의무려라는 곳이 바로 이곳이라 했다]
망평현에는 대요수가 요새 밖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부터 안시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강의 길이가 1,250리이다. 왕망이 장열이라 고쳤다.
방현이 있고,
후성현은 중부도위의 치소이다.
요대현이 있는데 왕망이 순목이라 고쳤고,
요양현은 대양수가 서남쪽으로부터 요양에 이르러 요(수)로 들어가는데, 왕망이 요음이라 고쳤다.
험독현이 있다.[응소는 말하기를 조선왕 (위)만의 도읍인데, 물이 험한 곳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험독이라 했다고 하였고, 신찬은 말하기를 왕험성이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어 험독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하였으며, 사고는 말하기를 신찬의 설이 옳다고 하였다] [필자주 : 신찬이 패수의 동쪽에 왕험성(왕검성)이 위치했다고 한것은 옳았으나 왕검성이 곧 험독이라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안사고도 틀렸고, 신찬도 틀렸다. 그리고 응소도 험독은 위만의 옛도읍이었고, 왕검성(왕험성)은 현재의 도읍이라고 해야 했다. 왜냐하면 왕검성(왕험성)과 험독은 전혀 다른 장소이기 때문이다. 왕검성(왕험성)은 고조선의 도읍지였고, 험독은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해 왔을 때 고조선의 준왕이 서쪽 변경 백리 땅을 봉해 준 곳이기 때문이다.]
거취현이 있고 실위산이 있는데, 실위수가 발원하여 북쪽으로부터 양평에 이르러 양수로 들어간다.
고현현이 있고,
안시현이 있다.
무차현은 동부도위의 치소인데, 왕망이 환차라 고쳤다.
평곽현에는 철관과 염관이 있고,
서안평현이 있는데 왕망이 북안평이라 고쳤고,
문현은 왕망이 문정이라 고쳤다.
번한현이 있는데 패수(沛水)가 요새밖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응소는 말하기를 한수[汗水]가 요새밖에서 발원하여 서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고 했다]
답씨현이 있다.
(秦置 屬幽州 戶五萬五千九百七十二 口二十七萬二千五百三十九 縣十八,
襄平 有牧師官 莽曰昌平,
新昌,
無慮 西部都尉治[師古曰 卽所謂醫巫閭]
望平 大遼水出塞外 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장열),
房,
候城 中部都尉治,
遼隊 莽曰順睦,
遼陽 大梁水西南至遼陽入遼 莽曰遼陰,
險瀆[應 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臣瓚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說是也 浿音普大反],
居就 室僞山 室僞水所出 北至襄平入梁(水)也,
高縣,
安市,
武次 東部都尉治 莽曰桓次,
平郭 有鐵官 鹽官,
西安平 莽曰北安平,
文 莽曰 文亭,
番汗 沛水出塞外 西南入海[應 曰 汗水出塞外 西南入海],
沓氏)
[참고]
[後漢書 遼東郡
秦置 雒陽東北三千六百里 十一城 戶六萬四千一百五十八 口八萬一千七百一十四
襄平 新昌 無慮 望平 候城 安市 平郭有鐵 西安平 汶 番汗 沓氏]
요서군(遼西郡)
진나라 때 설치했다. 작은 강이 48개가 있는데, 강의 길이가 3,046리이다.
유주에 속했는데 호수는 72,654호이고, 인구는 352,325명이며, 속현이 14현이다.
차려현에는 고묘(高廟)가 있고, 왕망이 서려로 고쳤다.
해양현에는 용선수가 있는데 동쪽으로 흘러 봉대수로 들어간다. 봉대수와 수허수는 모두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염관이 있다.
신안평현에는 이수가 동쪽으로 흘러 요새 밖으로 들어간다.
유성현의 서남쪽에 마수산이 있고, 삼유수가 북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서부도위의 치소이다.
영지현에는 고죽성이 있고, 왕망이 영씨정으로 고쳤다.[응소는 말하기를 옛 백이국으로서 지금 고죽성이 있다고 했다]
비여현에는 현수가 동쪽으로 흘러 유수로 들어가고, 유수는 남쪽으로 흘러 해양으로 들어간다. 또 노수가 있는데 남쪽으로 흘러 현(수)로 들어간다. 왕망이 비이로 고쳤다.[응소는 말하기를 비자가 연으로 도망치자 연에 봉한 곳이 여기라 했다]
빈종현은 왕망이 면무로 고쳤다.
교려현에는 유수가 요새밖에서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동부도위의 치소이다. 왕망이 금로라고 고쳤다.[응소는 말하기를 지금의 창려라고 했다]
양락현이 있고,
호소현이 있는데, 당취수가 도하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도하는 왕망이 하복으로 고쳤다.
문성현은 왕망이 언로라고 고쳤다.
임유현은 백랑에서 발원하는 유수가 동쪽으로 흘러 요새 밖으로 들어가고 또 후수가 있는데, 북쪽으로 흘러 유(수)로 들어간다. 왕망이 풍덕으로 고쳤다.
류현에는 하관수가 남쪽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또 게석수와 빈수가 있는데, 모두 남쪽으로 흘러 관(수)로 들어간다. 왕망이 선무로 고쳤다.
(秦置 有小水四十八 幷行三千四十六里 屬幽州 戶七萬二千六百五十四 口三十五萬二千三百二十五 縣十四,
且慮 有高廟 莽曰 慮,
海陽 龍鮮水東入封大水 封大水 綏虛水皆南入海 有鹽官,
新安平 夷水東入塞外,
柳城 馬首山在西南 參柳水北入海 西部都尉治,
令支 有孤竹城 莽曰令氏亭[應 曰 故伯夷國 今有孤竹城],
肥如 玄水東入濡水 濡水南入海陽 又有盧水 南入玄(水) 莽曰肥而[應 曰 肥子 奔燕 燕封於此也],
賓從 莽曰勉武,
交黎 渝水首水塞外 南入海 東部都尉治 莽曰禽虜[應 曰 今昌黎]其下 同,
陽樂,
狐蘇 唐就水至徒河入海
徒河 莽曰河福,
文成 莽曰言虜,
臨渝 渝水首受白狼 東入塞外 又有侯水 北入 渝(水) 莽曰馮德,
絫 下官水 南入海 又有揭石水 賓水 皆南入官 莽曰選武)
[참고]
[後漢書 遼西郡
秦置 雒陽東北三千三百里 五城 戶萬四千一百五十 口八萬一千七百一十四
陽樂, 海陽, 令支有孤竹城, 肥如, 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