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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삼국사기는 왜 최리를 낙랑왕이라 기록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3. 30. 21:33

윤여동설 - 삼국사기는 왜 최리를 낙랑왕이라 기록했을까? - 최초주장

 

[청나라 때의 피서산장(열하행궁) 전경 그림인데 성 내부의 면적이 170만평이나 되는 곳으로서 이곳이 바로 고조선의 왕검성,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비정되는 곳이다.

옛날 고조선의 단군들과 고구려의 왕들은 이렇듯 제왕이 살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멋진 곳에서 살았다.]

 

   우리 삼국 역사를 논할 때 항상 먼저 언급되어야 하는 것이 곧 "낙랑(樂浪)"인데, 이는 낙랑의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하고는 우리의 고대사 해석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낙랑의 어원은 잘 알 수 없으나 "즐거울락(樂) 물결랑(浪)" 자를 쓰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위치가 바다(혹은 큰 강)를 끼고 있는 곳으로서 큰 파도가 치는 것이 장관이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 붙이게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낙랑"이라 하면 기원전 108년에 전한의 무제가 순체와 양복이라는 두 장군을 보내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을 네 조각으로 나누어 설치했던 한사군의 한 군이었던 "낙랑군"을 먼저 떠올리게 되고, 고구려 대무신왕의 아들이었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야기를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낙랑군이라면 그 군의 책임자가 "태수(太守)"이어야 마땅한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최리라는 사람을 "낙랑태수"라 하지 않고 "낙랑왕"으로 기록하고 있어 우리를 헷갈리게 했고, 이로 인하여 낙랑군과 낙랑국이 어떠한 관계인지, 위치는 어디인지를 놓고 논쟁이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전한의 낙랑군이 처음 설치된 것이 기원전 108년이라는 것은 틀림없고, 그 전한 낙랑군의 치소가 옛 위만조선의 도읍이었던 왕검성이었다는 것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이 낙랑의 위치에 대해서 학자마다 사람마다 주장이 다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8년(B.C.11) 조를 보면, "가을 7월 마수성을 쌓고 병산에 목책을 세웠더니 낙랑태수가 사람을 보내 말하기를........" 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낙랑태수라 부르고 있고, 13년(B.C.6) 조를 보면, "여름 5월 왕이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신라본기 파사이사금 8년(A.D.87) 조에는 신라가 서쪽으로는 백제와 이웃했고, 남쪽으로는 가야와 접했다고 했으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A.D.32) 조를 보면, "여름 4월 왕의 아들 호동이 옥저에 놀러갔더니 낙랑왕 최리가 호동을 보고는 ........"이라 하여 갑자기 낙랑왕이 튀어나오고, 20년(A.D.37) 조에는, "대무신왕이 낙랑을 습격하여 이를 멸망시켰다" 라는 기록이 이어지는데, 실제 낙랑에 관한 기록은 훨씬 후대인 서기 313년까지 이어지고, 또 대무신왕 27년(A.D.44) 조에는, "가을 9월 후한 광무제가 군사를 보내 바다를 건너와 낙랑을 치고 그 지역을 빼앗아 군·현을 만드니 살수 이남이 후한에 속하게 되었다" 라는 기록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 우리는 지금까지 왕검성을 북한 평양이라 하고, 고구려의 졸본을 환인, 국내성을 압록강 건너 집안이라 하며, 백제가 서울 부근에서 건국되었고, 신라가 경주 부근에서 건국되었다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수서, 북사, 신·구당서에는 모두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하여 백제가 한반도 서울 부근에서 건국되었다고 생각했던 조선시대 학자들은 생각하기를, 북한 평양은 서울의 북쪽에 위치하는데, 백제 건국초기인 온조왕 때 백제의 동쪽에 낙랑군이 위치하고 있었다면 이는 분명 서울의 동쪽인 강원도 춘천 부근까지가 낙랑군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기록이 남겨질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춘천낙랑설을 주장하게 되는데, 지금도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서기 32년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설화와 서기 44년의 후한 광무제가 낙랑을 쳤다는 기록 그리고 한참 후대인 고구려 미천왕 14년(A.D.313) 조에 "겨울 10월 낙랑군을 침공하여 남녀 2천여명을 사로잡았다" 라는 기록이 나타나자 춘천 부근에 위치하고 있던 낙랑군 땅을 서기 30년경 최리라는 사람이 차지하고 스스로 나라를 세워 칭왕을 하고, 후한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 했기 때문에 후한 광무제가 서기 44년에 춘천 부근에 위치했던 최리의 낙랑국을 쳐서 후한에 다시 복속시키고 낙랑군으로 불렀을 것이라고 생각하고는, 서기 37년에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낙랑을 쳐서 없앴다는 기록은 오기일 것이라고 해석하게 된다. 낙랑군이 한반도에 위치했었다는 것을 전제로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중국 사서들은 낙랑군의 위치를 북한 평양이라 기록하고 있지 않다. 진서지리지에는 "낙랑군 수성현은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 기록하고 있고, 통전에는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는데, 장성이 이곳에서 시작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만리장성이 시작된 곳 부근이 낙랑군이라는 것이다.

 

☆ 중국 사서들의 기록이 이렇게 나타나자 낙랑군과 낙랑국으로 나누어 낙랑군은 진황도 부근에, 최리의 낙랑국은 평양으로부터 춘천부근까지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서 우리의 삼국역사를 해석하려 하기도 하는데, 이는 잘못된 것이다. 한반도에는 어떠한 형태의 낙랑도 존재한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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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따라서 북한 평양은 한나라 때의 낙랑군이 될 수 없고, 낙랑의 서쪽에 있었다는 백제 역시 한반도 서울 부근이 아닌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일원에 위치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인데, 이에 따라 우리 역사를 해석할 경우 천지개벽과 같은 상황이 전개되는 것이다.
  이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상식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리고 중국 한나라의 역사를 보면, 왕망은 서기 8년에 한나라의 국호를 "신(新)"으로 바꾸었는데, 이로 인하여 한나라의 역사는 일시 단절되었는데, 서기 25년에 이르러 광무제가 왕망을 죽여버리고 한나라를 다시 복원시키게 된다.
  그렇지만 이 시기는 대단히 혼란스러운 시기였고, 역사에서는 신나라 이전을 전한이라 하고, 신나라 이후를 후한이라 엄격히 구분한다.
  그런데 백제 온조왕이 낙랑태수(필자주 : 낙랑동부도위의 오기인 듯 하다)를 언급한 때는 기원전 11년으로서 전한 말 때였으므로 이때까지 전한 낙랑군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고, 후한서 예전에는 건무 6년(A.D.30)에 낙랑동부도위를 폐지했다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이는 낙랑동부도위가 후한의 영향권에서 제외되었다는 말로써 고구려 대무신왕에게 빼앗겼을 것으로 생각되고,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대무신왕 15년인 서기 32년의 기록에는 낙랑태수가 아닌 "낙랑왕 최리"로 바뀌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최리라는 사람이 낙랑왕을 칭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이전 언젠가 낙랑군이 낙랑국으로 바뀌었다는 말이 된다.
  이는 결국 최리라는 사람이 전한→신나라→후한으로 이어지는 혼란기를 틈타 낙랑군 땅을 차지하고 나라 이름을 "낙랑국"이라 하고 왕위에 올랐었다는 말이 되고, 서기 37년에 이르러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후한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있는 최리의 낙랑국을 쳐서 병합해버렸다는 말로 해석이 가능해 지는데, 이로써 낙랑군은 우리의 역사 강역에서 일단 소멸하게 된다.
  그런데 서기 44년에 이르면, 후한의 광무제가 낙랑 땅을 침공해 그 땅을 빼앗아 살수이남 땅에 다시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기록이 나타나게 된다.

 

☆ 낙랑이 고구려의 소유가 되어 있지 않고 후한의 영향권 하에 그대로 있었다면 후한의 광무제가 자기들의 땅을 공격한 것이 되어 이해할 수 없는 기록이 되고 만다.

 

  이는 고구려의 대무신왕이 서기 37년에 쳐서 멸망시킴으로써 고구려의 소유가 되어 있던 땅 즉 옛 전한낙랑군이었다가 혼란기를 틈타 최리가 차지하고 낙랑국을 세웠던 바로 그 땅의 일부를 도로 탈환하여 살수 이남에 후한낙랑군을 다시 설치했던 것이다.

 

☆ 낙랑왕 최리의 신분에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알 수 없다. 그가 조선사람으로서 낙랑군을 쳐서 빼앗아 낙랑국을 세웠는지 아니면 한나라 사람으로서 낙랑군 태수로 임명되어 있던 사람이 그 땅을 차지하고 낙랑국으로 만들었는지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이는 결국 전한낙랑군과 최리의 낙랑국 그리고 후한낙랑군이 모두 지금의 중국에 위치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고, 백제, 신라, 고구려, 가야 역시 한반도가 아닌 북경 부근이 중심지였다는 말이 되므로, 북경 부근까지가 우리의 옛 땅이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고, 삼국사기가 얼마나 정확히 기록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우리 고대사의 중심지를 완전히 착각하고 있고, 너무도 잘못 해석함으로써 한반도보다도 훨씬 큰 우리의 옛 땅을 잃어버리고도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있었으나 드디어 필자가 그 잃어버린 대륙의 우리 옛 땅을 다시 찾아낸 것이다.

  

   ☆ 필자의 연구결과에 의하면 전한낙랑군의 치소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으로서 그곳이 고조선의 도읍 왕검성, 고구려의 평양성, 고려의 서경이었고, 낙랑동부도위는 칠로도산 동쪽으로서 내몽골 객라심기가 치소로 비정되고,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은 요녕성 금주 부근, 백제는 하북성 당산시, 진황도시 일원과 난하 하류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며, 살수는 고북구를 지나 밀운수고로 들어가는 지금의 조하로서 후한낙랑군은 지금의 밀운수고 부근, 대방군은 북경 동쪽 준화 부근에 설치되었다.
  이것을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만이 삼국사기, 삼국유사, 고려사를 이해할 수 있고, 또 중국 25사를 별 무리없이 해석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의 잃어버린 대륙의 옛 땅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