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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잃어버린 나라 정안국(定安國)의 위치 - 최초공개

윤여동 2007. 10. 10. 21:21

윤여동설 - 잃어버린 나라 정안국(定安國)의 위치 - 최초공개

 

 

   송사 정안국전(定安國傳)을 보면, 

 『정안국은 본래 마한의 종족인데, (발해가) 거란에게 격파 당하자 그 추수가 남은 무리들을 규합해서 (발해의) 서쪽 변방에 웅거하여 나라를 세우고 개원하면서 자칭 정안국(定安國)이라 했다.

[필자주 : 정안국은 발해의 서경압록부를 중심으로 세워진 나라였는데, 발해의 서경압록부는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의 고북수진을 말하는 것이다] 
  개보(開寶) 3년(A.D.970)에 정안국왕 열만화(烈萬華)가 여진이 파견한 사신을 통하여 표와 방물을 바쳤다.
  태평흥국(太平興國) 연간(A.D.976∼983)에 (송) 태종이 원대한 계획을 세워 거란을 토벌하려고 하면서 정안국에 조서를 내려 기각의 형세를 펼치도록 하였다.
  정안국도 거란이 침략을 그치지 않는 것을 원망하던 터에 중국에서 군사를 일으켜 북방을 토벌한다는 소식을 듣고는 왕사에 의하여 묵은 울분을 씻을 수 있을까 하여 조서를 받고 대단히 기뻐했다.
  태평흥국 6년(A.D.981) 겨울에 때마침 여진의 조공사신이 정안국을 경유하게 되자 여진의 사신에게 부탁하여 표를 붙여 올렸다. 
  "정안국왕 신 오현명(烏玄明)은 말씀드립니다.
  성왕의 하늘과 땅에 두루 미친 은혜를 입어 오랑캐의 풍속을 단속하고 있으니 신 오현명은 정말 기뻐서 손뼉을 치고 머리를 조아려 재배합니다.
  신은 본래 고구려의 옛 땅인 발해의 유민으로서, 한쪽 귀퉁이에 웅거하여 여러 해를 지내오는 동안 고르게 감싸준 은덕을 우러러 보고 한량없이 적셔준 덕택을 입어 저마다 살 곳을 얻어 본성대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연전에 거란이 그 강포함을 믿고 국토를 침입하여 성채를 쳐부수고 백성들을 사로잡아 갔습니다.
  그러나 신의 할아버지가 절조를 지켜 항복하지 않고, 백성들과 함께 피난하여 다른 지역으로 가서 가까스로 백성들을 보전하여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또 부여부(扶餘府)가 일전에 거란을 배반하고 모두 본국으로 귀속하였으니 앞으로 닥칠 화가 말할 수 없을 만큼 클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천조의 은밀한 계획을 받아 승병을 거느리고 가 토벌을 도와 반드시 원수를 갚을 것이며, 감히 명을 어기지 않겠습니다.
  신 현명은 진실로 정성을 다하여 기원하면서 머리 조아려 재배합니다" 라고 하였으며 그 표의 끝에 "원흥(元興) 6년(A.D.981) 10월  일 정안국왕 신 현명은 성황제 앞에 표를 올립니다" 하였다.

  황제가 조서로 답하기를,
  "정안국왕 오현명에게 조칙합니다.
  여진의 사신 편에 올린 표를 받았는데, 짐이 과거에 직접 쓴 조서를 내려 칙유한 뜻에 감격하여 피력하였는데, 그대는 먼 나라의 호수이자 명왕의 후손으로서 마한의 땅을 다 차지하고 있다가 경해 밖에 있는 탓으로 강한 적에게 옛 땅을 병탄 당하고도 응어리진 원한을 풀지 못했으니 쌓인 울분을 어떻게 씻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저 거란이 아직도 전갈의 독기를 뿜어내기에 군사를 출동시켜 잠시 정벌했더니 (거란이) 하늘의 재앙을 받아 연속 패전하고 있으니 그들의 멸망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 (짐의) 국가가 이미 변군에다 많은 병사들을 널리 주둔시켜 놓았으니 추운 겨울을 넘긴 뒤 바로 토벌을 시행할 것입니다.
  그대가 만약 여러 대의 수치를 생각하여 미리 온 나라의 병사들에게 타일러 내가 (거란의) 죄를 토벌할 때에 맞추어 그대의 복수하고 싶은 뜻을 펼친다면 북방의 사막이 평정된 후 작위와 상을 내릴 터이니 장구지책의 좋은 기회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발해가 (송나라) 조정의 교화에 귀속하기를 원하고 있으며, 부여도 이미 거란을 배반했으니 그대의 묵은 복수심을 가다듬고, 협력하여 진실로 함께 정벌하기로 약속한다면 반드시 큰 공훈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망망한 바다에 가로 막혀 사신을 파견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대에게) 쏠린 간절한 마음을 자내 깨나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고, 조서를 여진의 사신편에 보내 정안국에 전해 주도록 했다.
  단공(端拱) 2년(A.D.989) 정안국의 왕자가 여진의 사신을 통해 말과 새의 깃털로 장식된 명적(소리나는 화살) 등을 바쳤다.
  순화(淳化) 2년(A.D.991) 정안국의 왕자 태원이 여진의 사신을 통하여 표를 올렸는데 그 뒤로는 다시 오지 않았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정안국은 분명 우리 역사의 한 장을 차지하고 있었음에 틀림없으나 지금은 잃어버린 나라가 되고 말았다. 그 위치를 정확히 아는 사람도 없고, 그 역사를 정확히 아는 사람도 없다.
  상황은 그렇다 하더라도 전해진 기록 속에서 그 위치의 대강 만이라도 찾아 후손들에게 알려주는 것이 앞서 사는 사람으로서 해야될 일일 것이다. 
  이제 사서의 기록 속에 언급되고 있는 마한, 부여, 거란, 송, 발해, 여진 등의 위치를 정확히 알아내었으니 이 정안국의 위치도 대강은 비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송사에는 정안국이 본래 마한의 종족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정안국왕 오현명 스스로는 고구려의 옛 땅인 발해의 유민이라 말하고 있다.
  한에는 마한, 진한, 변한이 있었는데, 원래는 월지국(목지국이라고도 한다, 지금의 발해 북쪽 당산시 풍윤부근)에 도읍하고 북경, 하북성 남부와 당산시, 진황도시, 요녕성 호로도시까지를 차지하고 있던 커다란 나라였다. 78개국의 소국과 사방 4천여 리에 이르는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던 대제국이었으나 마한이 소멸하자 그 땅을 놓고 중국, 백제, 고구려가 쟁탈을 벌였던 곳이고,
  부여는 동부여를 말하는 것으로서 그 도읍은 지금의 북경 북쪽 내몽골 정람기 부근으로 비정되는데, 기원전 86년에 건국되어 서기 494년 문자왕 3년에 고구려에 나라를 들어 바칠 때까지 570년 간 유지했던 유서 깊은 나라였다.
  그리고 거란은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소수림왕 8년인 서기 378년 조에 "가을 9월 거란이 북쪽 변경을 침범하여 8개 부락을 함락 시켰다" 라고 하면서 우리 삼국 역사에 언급되기 시작하는데, 지금 그 종족이 과연 어느 종족이냐를 놓고 학자들간에는 논란이 많고, 그 위치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원래 거란의 중심 강역은 지금의 내몽골 오란찰포 상도현 부근으로서 후일 그곳은 요의 상경임황부가 된다.     
  그러나 이 거란은 고구려가 멸망하기 이전에는 고구려에 눌려 세력을 크게 확장할 수 없었고, 그 후에도 발해의 강성한 기세에 눌려 있었으나 발해국이 쇠약해지자 그 틈을 노려 916년 거란국을 세우고, 926년 발해국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동단국(동거란국)을 세웠다가 후일 그 백성들을 요양으로 옮기게 되는데, 이 요양은 요(거란)의 동경요양부가 된다.  
  동단국의 새로 옮긴 치소 요동성(동경요양부)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연경(燕京)은 요의 남경석진부가 되는 곳으로서 거마하가 흐르는 지금의 하북성 탁주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중국 사람들은 내몽골 적봉시 파림좌기가 요 상경이고 요 태조의 능이 있다고 하고, 그 남쪽 영성이 요 중경이며, 요녕성 요양이 요 동경이라고 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 비정한 것이다. 아마 그곳은 발해와 관련 있는 유적일 것이다.  따라서 요나라의 동단국은 처음에 발해의 상경용천부로 비정되는 파림좌기에 위치했을 것인데, 후일 백성들을 요동(지금의 북경부근)으로 옮기고 남경 천복성이라 했다가 천현 13년에 다시 동경요양부로 고쳤다.
  삼국사기 권제37 잡지 제6 지리4 고구려 편을 보면, "옛날 요나라가 망하지 않았을 때에 요의 임금이 연경(하북성 역현 부근)에 있었는데, 우리(고려)의 입조 사신들이 (요)동경(북경 부근)을 지나고 요수(영정하)를 건너서 하루이들 사이에 의주에 당도하여 연경 계주로 향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고려의 도읍 개경은 난하 중 반가구수고 부근의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이었으므로 요 동경은 지금의 북경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936년에는 후진(後晋)의 건국을 도와준 대가로 연운(燕雲) 16주를 획득하고는 국호를 요(遼)로 바꾸게 되고, 후진을 멸망시켜 대제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 연운 16주란 유주, 탁주, 단주, 계주, 순주, 영주, 평주, 울주, 삭주, 운주, 응주, 신주, 규주, 유주, 무주, 환주를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의 산서성 북부지역과 북경 서쪽 하북성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여진은 주로 말갈을 말하는 것으로서 지금의 대흥안령산맥 부근을 넓게 차지했던 나라였고, 그 남쪽에는 고려가 위치하고 있었다.

 

☆ 발해는 속말말갈, 금은 흑수말갈, 후금(청)은 동여진이 중심 부족이다.


 
  그런데 대흥안령산맥을 중심으로 살던 여진의 조공사신이 개봉에 도읍하고 있던 송나라에 갈 때 정안국을 경유해서 갔다고 했고, 고려의 북쪽에 위치했을 부여가 정안국으로 귀속했다고 하고 있으니 정안국은 발해의 서경압록부 부근에 위치했던 나라로서 지금의 북경 동북쪽 밀운수고 부근으로부터 그 북쪽 내몽골 정람기 부근까지에 위치했던 것으로 비정해 볼 수 있다.   
  
  송사 발해국전을 보면, 태평흥국 6년(A.D.981)에 송나라에서 오사성 부유부 발해염부왕에게 조서를 보내 요나라를 치는데 협조하라는 조서를 보낸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발해가 926년에 완전히 멸망했던 것이 아니라 981년까지도 존속하고 있었다고 보여지고,[필자주 : 학자들은 이를 후발해국이라 한다] 이때 정안국에도 동일한 조서를 보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정안국이 정확히 언제까지 독립성을 유지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송사에는 991년까지만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후 요나라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록에 정안국 왕의 이름이 열만화, 오현명으로 바뀌고 있는데, 이를 보면 왕조가 안정되어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 왕의 성씨가 "열"씨에서 "오"씨로 바뀌었다는 것은 이때 정안국에 역성 혁명이 있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여진이 한반도 동북쪽 두만강 북쪽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정안국이 압록강 북쪽 요양 부근에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했으나 여진이 대흥안령산맥 부근에 위치했다면 정안국의 위치도 새로 비정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