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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보덕왕 안승이 살았던 금마저(金馬渚)는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공개

윤여동 2008. 4. 3. 23:51

윤여동설 - 보덕왕 안승이 살았던 금마저(金馬渚) 어디를 말하는가? - 최초공개

 

 

 

  문무왕 10년 서기 670년 6월 고구려 수림성 사람 모잠 대형이 668년에 멸망한 고구려 유민들을 이끌고 신라로 오다가 고구려 귀족인 안승을 만나 백제의 옛 도읍인 한성에서 안승을 왕위에 올린 후 신라에 망명을 요청해 오는 일이 발생하게 된다.  

  삼국사기에는 안승의 신분에 대하여 고구려의 대신 연정토의 아들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문무왕이 안승에게 내린 책명문에 "공의 태조 중모왕은 덕을 북산에 쌓고, 공을 남쪽 바다에 세워 위풍이 청구에 떨쳤고, 어진 교화는 현토를 덮었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안승의 신분은 고구려의 왕족으로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고, 한성이란 한반도의 서울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진황도 도산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자 문무왕은 일단 그들을 "금마저(金馬渚)"라는 곳에 배치하고는 안승을 고구려왕으로 봉했다가 몇 년 후 다시 보덕왕으로 삼고, 왕의 누이동생(혹은 잡찬 김의관의 딸이라고도 한다)을 그에게 시집보내기도 하는데, 지금까지 금마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다.
  사람들은 신라가 한반도의 경주 부근에 위치했었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고, 또 지금 전북 익산에 금마(金馬)가 있기 때문에 그곳이 고구려의 안승이 신라로 망명해 온 후 살았던 금마저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渚)" 라는 의미가 삼각주 또는 강물로 빙 둘러쳐진 작은 섬을 말한다고 보면, 금마저라는 곳은 지금 전북 익산 금마의 지형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명이고, 수서, 북사, 신·구당서에는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나라 낙랑군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삼국의 중심 강역은 한반도가 아니라 발해 북쪽 부근으로 볼 수 있으므로 문무왕이 안승에게 주어 살도록 했던 금마저 역시 한반도의 전북 익산 금마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발해 북쪽 대륙에  위치했을 것인데,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풍윤으로 비정된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신문왕 3년(A.D.683)에 이르자 신문왕은 금마저(金馬渚)에 살고 있었을 보덕왕 안승을 서라벌(금성)로 불러 올려 소판으로 삼고, 신라의 왕성인 김씨 성을 하사하는데, 그로부터 1년 뒤인 684년 11월의 기록에 "안승의 조카뻘 되는 장군 대문이 금마저(金馬渚)에서 반역을 도모하다가 일이 발각되어 사형 당했다.
  백성들이 대문이 사형 당해 죽는 것을 보고 관리들을 죽이고, 읍을 점거하고 반역하므로 왕이 군사들로 하여금 이를 토벌하였는데, 이때 당주 핍실이 죽었다.
  성을 함락시키고 그곳 사람들을 나라 남쪽에 있는 주와 군으로 옮기고 그 땅을 금마군으로 만들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잘 새겨보면, 원래 문무왕은 안승이 처음 신라로 망명해 오자 그에게 금마저(金馬渚)를 주어 영지로 삼게 하고 멸망한 고구려의 망명정부를 세우게 한 후 그를 고구려왕으로 봉했다가 4년 후인 674년 9월에 이르러 국호를 보덕국으로 바꾸어 안승을 다시 보덕왕으로 봉했었다.
  그런데 문무왕이 죽고 그 아들인 신문왕이 왕위에 오른 후 보덕국을 없애버리고, 안승을 서라벌(금성)로 소환하여 소판으로 삼고 성씨도 바꾸어 김씨로 만들자 안승의 조카뻘 되는 대문이 이에 반발하여 난을 일으키려 하다가 미리 발각되어 잡혀 죽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때 신라에서는 금마저(金馬渚)의 고구려 유민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위해 그들이 보는 앞에서 대문을 공개처형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자 고구려 유민들이 이에 격분하여 폭동으로 발전했다고 생각되는데, 문제는 이러한 기록들을 지금 우리는 한반도의 전북 익산 금마에서 일어났던 일이었다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사실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풍윤부근에서 일어났던 일이고, 그때 폭동에 가담했던 금마저의 사람들은 그 사건이후 한반도 남쪽이 아닌 지금의 당산 남쪽 발해변으로 흩어져 살게 되었다는 말인 것이다.

 

# 금마는 고조선의 마지막 단군 준왕이 위만에게 왕검성을 빼앗기고 좌우궁인들을 이끌고 남하하여 마 땅에 이르러 다시 그곳에 도읍을 정하고 한왕에 올랐다고 전해지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