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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온조백제(대륙백제)의 건국지는 지금의 어디인가?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0. 11. 20:47

윤여동설 - 온조백제(대륙백제)의 건국지는 지금의 어디인가? - 최초주장

 

  우리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백제의 건국설화를 한반도에 비정하여,

  비류와 온조가 졸본(환인)을 떠나 남쪽으로 내려와 압록강을 건너고, 패수(대동강)와 대수(예성강 또는 임진강)를 건너, 한산 부아악(서울 북한산)에 올라 지세를 살펴보고, 비류는 서쪽의 미추홀(인천)로 갔고 온조는 위례성(서울)에 도읍하였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까지 서울 부근에서 위례성의 확실한 흔적을 찾지 못했고, 인천에서 비류가 도읍 했던 미추홀의 흔적을 찾아내지 못했으며, 백제가 500여 년 간 도읍 했을 것이라는 지금의 서울지역에서 확실한 백제의 왕릉을 한 곳도 발견하지 못하고 있다.

 

☆ 석촌동 적석총을 백제 왕릉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적석총은 고구려식 무덤조성 형식이다.


  조선시대로부터 지금까지 역사학자들은 충남 천안의 직산에 위례성이 있다고 하기도 하고, 경기도 광주를 한성이라고도 했으며, 또 한강 북쪽에 위례성이 있었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요즈음에는 풍납토성이 위례성일 것이라고 기대에 부풀어 발굴 작업을 하고 있으나 그것을 확인시켜줄 물증이 출토되지 않는다.

 

☆ 풍납토성에서 여러 유물이 출토되고 있으나 그것은 백제의 건국지를 밝혀줄 수 있는 유물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풍납토성이나 몽촌토성은 왕성이 아니라, 옛날 한강을 중심으로 장사하던 장사꾼들의 물류단지 역할을 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韓)이 한반도가 아닌 중국 당산 부근에 도읍하고 사방 4천여 리에 이르는 넓은 땅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했고, 삼국사기 백제 건국설화에서는 비류와 온조가 졸본에서 남쪽(사실은 동남쪽으로 갔다)으로 내려가 한산이 있고 한수가 흐르는 부근에 자리잡았다고 했으며, 마한왕은 마한의 동북쪽 사방 100리 땅을 백제 온조왕에게 주어 나라를 건국할 수 있게 해 주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백제는 당산의 동북쪽 방향인 난하 반가구수고 또는 대흑정수고 부근 한산이 있고, 한수가 흐르는 부근에서 건국되었다는 말이 되는데, 백제의 건국설화에서 비류와 온조가 신하들과 함께 한산의 부아악에 올라 지세를 살펴볼 때 신하들이 "惟此河南之地 北帶漢水 東據高岳 南望沃澤 西阻大海(이 남쪽의 땅은 북쪽으로는 한수로 띠를 두르고, 동쪽에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판이 보이고, 서쪽은 대해로 가로막혀 있습니다)"라고 말하고 있으므로 신하들은 이러한 기록을 충족할 수 있는 곳이 한산 부근에 있었고, 그곳이 도읍지로서 적당한 곳이라고 추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이때 신하들이 도읍지로서 한산 부근의 한수 남쪽 땅이 적당하다고 건의했으나 비류는 그를 거부하고 서쪽 물가의 미추홀로 가버리자 온조는 신하들이 추천하는 한수 남쪽에 도읍하고 위례성이라 했다.
  
  그렇다면 이 기록을 충족할 수 있는 장소를 찾아야 하는 것인데, 우리는 지금까지 백제의 위례성을 한반도 서울부근으로 비정하여 역사를 해석하려 했다.
  그러나 한반도 서울 부근에서 백제 초기 역사를 밝혀줄 아무런 단서가 발견되지 않자 그것 참 이상하다고 고개를 갸우뚱해야 했다.
  왜냐하면 역사 기록을 한반도에 비정했을 때 서울 부근이 틀림없는 백제의 도읍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서울 부근에서 백제 초기의 유물이 출토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착각이었고, 백제는 한반도에서 건국된 것이 아니었다.

  지금  난하는 북쪽에서 만리장성을 끊고 남으로 흐르다가 천서 부근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흐르다가 장하(長河)를 합류하고 윤장 동쪽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꺾어져 천안을 지나 노룡 부근에서 청룡하(靑龍河)를 합류하고 다시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난현(난주) 동쪽을 지나 또 다시 동남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낙정 동쪽에서 물길을 동쪽으로 돌려 발해로 흘러 들어가는데, 이 부근에서 백제 건국설화에서 "북쪽으로 한수가 띠를 둘렀다(北帶漢水)"라는 기록을 충족할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 속의 한산은 지금 서울의 북한산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한강은 한수가 아니다.

풍납토성을 위례성으로 생각하고 발굴 중에 있으나 이는 착각이 빚어낸 해프닝이다.

풍납토성은 아마 장사꾼들이 장사하던 곳일 것이다. 

    
  그리고 구당서에는 백제의 위치에 대하여,
  "백제국은 본래 부여의 별종으로서 마한의 옛 땅에 있다.
  경사에서 동쪽으로 6,200리에 있으며, 대해의 북쪽, 소해의 남쪽에 위치한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한반도에 비정해서는 백제의 북쪽에 소해가 위치할 수는 없고, 삼국사기를 보면, 온조왕이 "나라의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어서..." 라고 말하고 있는 기록을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신하들이 북쪽으로는 한수가 띠를 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맥이 있고, 서쪽으로는 대해로 막혀 있고, 남쪽에는 비옥한 넓은 들판이 펼쳐져 있다고 말한 곳은 진황도 도산 남쪽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동쪽의 높은 산맥이란 연산산맥이 산해관까지 이어지는 것을 말하며, 서쪽의 대해는 지금의 우교수고 또는 반가구수고를 말하는 것이고, 남쪽의 넓은 들이란 난하 하류의 넓은 평원지역을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구당서에 기록된 백제 남쪽의 대해는 지금의 발해를 말하는 것이고, 북쪽의 소해란 반가구수고를 말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온조왕은 왕 13년 5월에 이르러 "내가 어제 나아가 순행하다가 한수의 남쪽 토양이 비옥함을 보았으니 그곳으로 도읍을 정하여 영구히 편안함을 도모해야겠다" 라고 하고는 7월에 위례성의 백성을 새로 정한 도읍지로 옮기고, 8월에는 마한에 도읍을 옮긴다는 것을 알려 강역을 새로이 획정하고, 9월에는 성을 쌓고 대궐을 건축하고는 드디어 왕 14년(B.C.5) 정월에 이르러 도읍을 위례성에서 하남위례성 즉 한성으로 옮긴다.
  이 기록을 세밀히 분석해 보면, 결국 위례성은 한수의 중류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되고, 남한성이란 위례성보다 한수의 하류에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위례성은 도산 가까운 그 부근에서 찾아야 한다는 말이 된다.

  우리는 지금까지 대륙에 있는 위례성, 미추홀을 한반도에서 찾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 당시 비류는 경제적 이익만을 염두에 두고 미추홀로 갔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결국은 나라를 이루는데 실패했다.

 그런데 지대가 낮아 많은 사람 살기에 적당한 곳이 아니었다고 판단된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한반도 서울 부근에서 백제의 왕릉을 발견할 수 없었고, 백제의 왕성도 발견할 수 없었으며, 인천에서 비류백제 초기의 유물을 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온조왕은 백제를 한반도에서 건국한 것이 아니라 지금은 중국 땅이 되어버린 북경 동쪽 난하부근에서 건국했던 것이다.

  그곳에 우리의 옛 대륙백제 땅이 있었는데, 우리가 지금까지 그를 모르고 한반도에서 백제의 건국지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에 있는 백제의 흔적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것일까?

  한반도에 있는 백제의 흔적들은 무광왕이 세운 반도백제가 남겨 놓은 것들로서 그에 대한 것은 다음에 논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