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동설 -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된 백제 무광왕(武廣王)은 과연 누구를 말하는가? - 최초주장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1970년 일본에서 불교의 신기한 이적에 관한 사항을 기록한 관세음응험기라는 두루마리가 발견되었는데 그 기록 속에 "백제 무광왕(武廣王)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정사(절)를 새로 지었다(百濟 武廣王 遷都 枳慕密地 新營精舍)" 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백제에 무광왕이라는 왕이 어디 있는가 하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무광왕이라는 왕이 나타나지 않고 또한 지모밀지라는 곳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도 나타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을 개보수 하다가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되어 있는 유물이 탑속에서 출토되었다.
그리하여 과연 이 무광왕이 누구를 말하는지, 지모밀지(枳慕密地)라는 곳이 어디를 말하며, 그곳으로 도읍을 옮겼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인지를 밝히기 위한 연구가 시작되었는데, 무광왕(武廣王)의 신분에 대한 주장은 대개 두 설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무광왕은 백제 30대 무왕을 말하는 것이라는 무광왕무왕동일인설이고,
둘째는 필자가 주장하는 무광왕이 백제 12대 계왕의 태자로서, 반도백제의 건국자라는 무광왕반도백제건국설이다.
무광왕무왕동일인설은 지금 정설같이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관세음응험기 자체의 기록인 "정관 13년(A.D.639) 기해년 겨울 11월에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제석정사에 불이 났다" 라는 기록을 움직일 수 없는 근거라 하고 있다.
정관 13년 즉 서기 639년은 백제 무왕 40년에 해당하는 해인데, 이때 제석정사에 불이 나서 절이 타 버렸다고 기록하고 있으므로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새롭게 지었다는 정사(절)의 이름이 곧 제석정사였을 것이므로 그 절은 백제 무왕이 지은 절일 것이고,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도 무왕 35년에 왕흥사라는 절을 준공했는데, 그 절이 강 언덕에 세워졌고 채색으로 웅장하고 화려하게 장식했으며, 왕이 자주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무왕은 불심이 돈독한 왕이었을 것이며,
또한 삼국유사 왕력 편에, 백제 30대 무왕에 대하여 "무강(武康) 또는 헌병(憲丙)이라 한다. 어릴 때의 이름은 일기사덕(一耆篩德)이고 경신년에 즉위했다. 치세는 41년 간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무왕을 무강왕이라고도 불렀을 것이므로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되어 있는 무광왕이란 무강왕의 오기이거나 무강왕을 무광왕이라고도 불렀을 것이라는 것이며,
☆ 고려사절요 충숙왕 16년(A.D.1329) 3월 조에는, "도적이 금마군에 있는 마한의 시조 호강왕릉을 파헤쳤다(盜發 金馬郡 馬韓祖 虎康王[武康王]陵)"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호강왕이라 기록한 것은 한 무제의 무자를 피해 호자로 기록한 것으로서 실제는 무강왕이다.
삼국유사에 고구려 3대왕인 대무신왕(大武神王)을 대호신왕(大虎神王)으로 기록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따라서 관세음응험기 속의 백제 무광왕과 마한의 시조 호강왕(무강왕)은 별개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백제의 마지막 도읍지로 잘못 알려지고 있는 부여에서 가까운 익산 금마에 서동설화가 전해지고 있고, 미륵사지가 있으며, 그 가까운 곳에서 제석사터가 발견되었으며, 왕궁리라는 곳에 백제 말기 시대의 석탑형식인 왕궁리 5층 석탑이 있는데, 그 탑 속에서 관세음응험기에 기록되어 있는 유물들이 발견되었으므로 그곳이 지모밀지가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기록에는 백제의 마지막 도읍으로 사비까지만 나타나고 있고, 다시 지모밀지로 도읍을 옮겼다는 기록이 나타나지 않자 무왕이 지모밀지로 도읍을 옮기기 위하여 건설했으나 무슨 사정이 있어 실제로는 도읍을 옮기지는 못하고 부도읍 같이 이용하면서 신라를 압박했을 것이라는 것이 주장의 핵심이다.
그런데 필자는 그와는 의견을 달리한다.
기본적으로 무광왕과 무왕을 동일인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확실치 않다는 것이고, 이들이 별개의 인물이라면 관세음응험기의 기록 중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제석정사를 지은 시기와 639년에 불탄 시점을 모두 무왕 때라고 볼 수 있는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절을 지은 시기가 훨씬 앞설 수 있고, 불에 타버린 시점이 수백 년의 시차가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익산 금마 지역에 전해지는 서동 설화가 역사적 사실이라는 근거가 발견되지 않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록 속 백제(온조백제, 대륙백제)의 건국지는 한반도가 아니라 지금 발해 북쪽 중국 북경 동쪽 하북성 난하 부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반도에서 백제 초기의 유물이 한 점도 출토되지 않고 4세기 중반부터 나타나는데, 이에 대한 해답이 백제의 왕위 계승 속에 들어 있다.
[백제 초기의 왕위계승도]
시조 온조왕
↓자
?(실명): 온조왕보다 일찍 죽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자
2대 다루왕 :온조왕의 손자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자
?(실명) :다루왕보다 일찍 죽어 왕위에 오르지 못했다
↓자
3대 기루왕 : 다루왕의 손자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자
?(실명):기루왕이 오래 살아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죽었다
↓자
4대 개루왕: 기루왕의 손자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장자파) (차자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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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차자
5대 초고왕 ?(구태)
↓장자 ↓자
6대 구수왕 ?(실명)
↓자 ↓자
?(실명):구수왕보다 일찍 죽었다 8대 고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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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2자 ↓자
7대 사반왕 ?(실명) 9대 책계왕
↓자 ↓장자
11대 비류왕 10대 분서왕
↓2자 ↓장자
13대 근초고왕 12대 계왕
↓자 ↓ 자
14대 근구수왕 ?(무광왕) : 반도백제 건국시조
지금까지 우리는 백제의 왕위계승도를 위와 같이 그릴 수 없었는데, 이는 삼국사기 백제본기 속에 들어 있는 왕위 계승의 비밀을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왕위계승에 관한 기록을 생몰연대를 세밀히 따져 도표로 정리하면 위와같이 된다.
그런데 위와 같이 백제의 왕위계승도를 정리해 놓고 보면, 백제가 장자파와 차자파로 나뉘어 왕위찬탈전을 벌였음을 알 수 있다.
즉 시조 온조왕부터 7대 사반왕까지는 장자 계승을 원칙으로 하여 왕위가 전해졌으나 차자파인 고이왕이 사반왕으로부터 왕위를 찬탈해 그 왕위를 책계왕, 분서왕으로 이어갔는데, 사반왕의 동생의 아들인 비류왕이 자라서 그 왕위를 장자파로 되돌리고, 차자파인 분서왕의 아들 계왕이 자라서 다시 차자파로 왕위를 되돌렸으나 비류왕의 아들인 근초고왕이 다시 장자파로 왕위를 되돌리는 과정이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결국 장자파 근초고왕에게 왕위를 빼앗긴 차자파 계왕의 아들과 근초고왕 사이에 20여 년에 걸친 왕위 다툼이 있게 되고, 결국 근초고왕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대륙백제의 왕위는 장자파로 이어지게 된다.
그렇다면 왕위다툼에서 패한 차자파 계왕의 아들은 이때 어떠한 조치를 취할 수 있었을까?
방법은 단 한가지 죽지 않으려면 도망쳐야 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365년경 도망쳐온 곳이 바로 한반도의 익산 금마였던 것이다.
☆ 고구려는 무광왕의 반도백제를 정통으로 인정했고, 근초고왕의 대륙백제는 고구려와는 적대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자 고구려에서는 대륙백제를 왕위를 찬탈한 불순한 무리로서 백제의 나머지 잔여세력이라고 인식해 백잔이라 불렀을 것이다. 이는 후세 광개토대왕이 대륙백제를 침공하면서 백잔이라 불렀으며, 백잔이 조공을 바치지 않기 때문에 정벌한다는 기록이 호태왕 비문에 나타나기 때문에 그를 알 수 있다.
그리고는 그곳 지모밀지에 도읍하고 다시 백제를 세워 왕위가 이어졌다면 대륙백제와 반도백제를 설명할 수 있고, 한반도에 4세기 중엽부터 백제의 유물이 출토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며, 근초고왕과 왕위를 다투다가 패하고 한반도로 건너와 지모밀지에 다시 반도백제를 건국한 사람이 바로 관세음응험기에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새로 절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무광왕이라는 것도 알 수 있는 것이다.
관세음응험기는 바로 이 반도백제의 무광왕이 365년경 지모밀지로 옮겨와 나라를 세우고 제석정사도 함께 지었는데, 세월이 한참 지난 639년에 이르러 그 절에 벼락이 쳐서 절과 목탑이 모두 불탔던 상황을 기록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 익산 금마의 왕궁리는 반도백제의 초기 도읍 지모밀지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세월이 흐른 639년에 제석사에 불이 나 전소하자 불탄 제석사로부터 지금의 왕궁리로 장소를 옮겨 왕궁 안에 절을 짓고, 불에 타지 않는 돌을 다듬어 다시 석탑을 세웠는데 이것이 바로 지금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왕궁리 5층석탑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반도백제의 도읍은 나라가 커지면서 공주(고마성), 부여(거발성)로 옮기게 되어 지금 공주에서는 반도백제 무광왕의 후예인 무령왕릉이 발견되게 되었고, 부여에도 백제의 흔적들이 남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무광왕에 대한 예우를 극진히 해야하는데, 그를 알지 못하고 있고, 김제 벽골제는 아마 무광왕 때 만들었을 것인데 그를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익산시는 반도백제의 건국자인 무광왕에 대한 제사를 최소한 1년에 한번씩이라도 지내 주는 방안을 검토해야 하고, 반도백제의 초기도읍인 왕궁리를 성역화하여 보존해야 한다.
[참고]
觀世音應驗記[관세음응험기] 중 백제의 지모밀지 천도 기사
百濟 武廣王 遷都 枳慕密地 新營精舍
백제 무광왕이 지모밀지로 천도하고 정사(절)를 새로 지었다.
以 貞觀 十三年 歲次 己亥 冬十一月
그런데 정관 13년(A.D.639) 기해년 겨울 11월에
天大雷雨 遂災帝釋精舍
하늘에서 벼락이 떨어져 제석정사에 불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