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잃어버린 대륙 역사강역을 찾는 사람들

카테고리 없음

윤여동설 - 신라의 경순왕은 어느 길을 따라 개경으로 갔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08. 4. 11. 04:49

윤여동설 - 신라 금성과 고려 개경의 위치 - 최초주장

 

 

  고려사절요를 보면,
 『태조 을미 18년(A.D.935) 10월 임술일(초하루)에 신라왕 김부가 시랑 김봉휴를 보내 들어와서 조회하겠다고 청하므로 왕(태조 왕건)이 섭시중 왕철과 시랑 한헌옹 등을 보내 회보하였다.

  11월 갑오일(3일)에 신라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왕도(신라도읍 서라벌)를 출발하니 사대부와 서민들이 모두 그를 따랐다.
  향거와 보마가 30여 리에 이어지고 길은 사람으로 꽉 차서 막혔으며, 구경꾼들이 쭉 둘러서 있었다. 길가에 있는 주와 현에서는 접대가 매우 성대하였고, 왕이 사람을 보내 문안하고 위로하였다.

  계묘일(12일)에 신라왕이 왕철 등과 함께 개경에 들어오니 왕이 의장을 갖추고 교외에 나가서 맞이하며 위로하고, 동궁과 여러 재신에게 명하여 그를 호위하고 들어와서 유화궁에 머물게 했다.

 

경순왕이 935년 11월 3일(갑오일)에 서라벌을 출발하여 11월 12일(계묘일)에 개경에 도착했으므로 서라벌에서 개경까지 가는데 만9일이 걸린 셈인데,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에서 하북성 관성현(관성만족자치현)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250-260km로서 지금 거리단위로 환산하면 650여리길이다.하루에 80리씩 걸으면 9일이면 충분히 도착할 수 있는 거리이다. [조양, 능원을 거치면 약 320여km, 호로도, 진황도를 거치면 약 330여km 정도된다]  

 

  계축일(22일)에 왕이 정전에 나아가 문무백관을 모으고 예를 갖추어 맏딸 낙랑공주를 신라왕에게 시집보냈다.
  
  기미일(28일)에 신라왕이 글을 올리기를,
  "본국이 오랫동안 위란을 겪어 나라의 운수가 이미 다하였으니 다시 기업을 보전할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하오니 신하의 예를 갖추어 뵙기를 원합니다"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12월 신유일(초하루)에 여러 신하들이 아뢰기를 "하늘에는 해가 둘이 있을 수 없고, 땅에는 두 임금이 없는 법이니 한나라에 두 임금이 있으면 백성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신라왕의 청을 들어주소서" 했다.

  임신일(12일)에 왕이 천덕전에 나아가서 재신과 백관을 모으고 말하기를,
  "짐이 신라와 서로 피를 마시고 동맹을 맺어 두 나라가 각기 사직을 보전하여 영원히 잘 지내기를 바랬는데, 이제 신라왕이 굳이 신하로 일컫기를 청하며, 경들 역시 옳다하니 짐이 마음으로는 부끄럽게 여기나 의리상 굳이 거절하기는 어렵다" 하고는 이에 뜰 아래에서 뵙는 김부의 예를 받으니 여러 신하들이 경하드리는 소리가 궁궐에 진동하였다.
  김부를 제수하여 관광순화 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 식읍8천호로 봉하고 자리는 태자의 위에 두었다. 해마다 녹 1천석을 주고, 신라국을 없애고 경주(慶州)라 하여 김부에게 주어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그 따라온 사람들도 모두 채용하고 토지와 녹을 주어 그 전보다도 더 우대하였다. 또 신란궁(神鸞宮)을 세워 김부에게 주었으며,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아 부호장 이하 관직 등의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 신라가 역사에서 사라지게 되고 경주라는 지명은 이때부터 사용하게 되는데, 신라 말기에는 경주부근 만이 신라의 강역이었던 듯 하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우리는 지금 이 기록을 보고는 신라의 경순왕이 서기 935년에 고려 태조 왕건에게 나라를 들어 바침으로써 신라가 천년 사직을 문닫게 되었음을 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때 신라의 경순왕이 한반도 경주를 출발하여 황해도 개성까지 갔다고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우리가 역사를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신라의 천년 도읍지 서라벌(금성)은 한반도 경주가 아니라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이었고, 고려의 도읍 개경은 한반도 황해도의 개성이 아니라 지금의 중국 하북성 승덕시 관성현으로 비정되기 때문이다.

 

☆ 수서, 북사, 신·구당서에는 신라가 한나라 때의 낙랑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신라의 천년도읍 서라벌(금성)은 지금의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에 위치했었다. 따라서 신라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던 백제는 난하 하류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고, 고구려는 그 북쪽인 하북성 승덕시 부근에 위치했으며, 삼국의 땅을 차지하고 건국된 고려 역시 진황도시, 당산시, 승덕시, 요녕성 조양시, 호로도시, 금주시(錦州市), 내몽골 일부를 차지했던 나라였다. 

   

  옛날 왕들의 행차 시에는 전체가 말을 타고 달려가는 것이 아니고, 걸어가는 수행원도 많고, 또 중간에 강도 건너야 하고, 산도 넘어야 하며, 잠도 자고 밥도 먹어야 했기 때문에 하루 평균 1백리 가기도 어려웠다고 한다.
  그런데 경순왕은 신라의 도읍인 금성을 출발하여 만 9일 만에 개경에 도착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금성과 개경이 그리 멀지 않았다는 말이다. 

  필자가 추측하기에 이때 신라의 경순왕은 신라의 도읍이었을 지금의 중국 요녕성 금주시(錦州市)를 출발하여 서쪽방향에 위치한 하북성 관성현에 도착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나라를 고려에게 들어 바치는 것을 반대했던 경순왕의 태자 마의태자(이름은 김일[金鎰]이라고 한다)는 북쪽의 노로아호산으로 들어갔던 것이 아닌가 싶은데, 이 역시 우리는 마의태자가 한반도의 경주를 떠나 강원도 금강산으로 들어갔다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대륙에서 일어났던 사건의 기록을 한반도로 가져와 한반도 내에서 옛 기록 속의 지명들을 찾고 있으니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신라의 서라벌(금성)은 한반도의 경북 경주가 아니라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에 있었고, 경순왕은 그곳에서 고려의 개경(현 관성)으로 가서 천년 사직을 고려태조 왕건에게 바쳤던 것이고, 고려 500년 왕조의 중심강역 역시 발해 북쪽 대륙이었다.
  그러다가 이성계가 고려를 멸망시키고 조선을 건국한 후 도읍을 개경에서 한양으로 옮겼는데, 이때 옮긴 한양이 바로 한반도의 서울인 것이다.

 

☆ 앞서 반도백제 무광왕이 대륙에서 근초고왕과의 왕위쟁탈전에서 패하고 한반도로 건너와 지모밀지인 지금의 익산 금마에 도읍하고 반도백제를 세움으로써 중심지가 되었던 적도 있었으나 통일된 국가로서 한반도가 역사의 중심지가 된 때는 조선시대부터이다.  

 

  이것을 인식해야 만이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사를 명쾌하게 해석할 수 있고 또 잃어버린 우리의 대륙 옛 땅을 찾을 수 있는 것이지, 단군릉이 한반도 평양에 있고, 한반도 강화도에서 단군들이 하늘에 제사지냈다고 하고, 방 4천리 강역의 삼한이 방 1천리에 지나지 않는 한반도 남부에 위치했다고 하며, 서울이 백제의 위례성이며, 경주가 신라의 천년 도읍 서라벌(금성)이고, 김해에 가야가 있었다고 하고, 황해도가 대방이고, 개성이 고려의 도읍 개경이라 인식하는 한 우리의 역사 해석은 엉터리 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고대 역사의 중심은 한반도가 아닌 난하를 중심으로 한 그 부근이었다.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의 평양성은 지금 하북성 승덕시 피서산장(열하행궁)이다.   
  그곳에 커다란 우리의 잃어버린 옛 땅이 있는데, 우리는 지금 왜 그를 모르는가?
  서쪽으로는 최소한 북경을 지나 보정 부근까지가 우리의 옛 땅이었던 적이 있었고, 북쪽으로는 바이칼호 부근까지도 우리의 옛 땅이었던 적이 있었다.
  거란, 여진, 몽골은 우리와 광의의 동족이다.
  반도사관에서 탈피하여 멀리 대륙을 바라보며, 새 역사를 써 놓아야 한다.
  그리하면 언젠가는 이들 모두를 다시 통합하여 대제국을 이룰 영웅이 출현할 때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 때를 위해 이 글들을 써 놓는 것이다.
  광대한 강역을 가진 세계 최강의 강국 대한민국을 꿈꾸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