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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의 22첨로는 어디를 말하는가?

윤여동 2007. 10. 13. 12:20

윤여동설 - 백제의 22첨로(檐魯)는 어디를 말하는가?

 

 

  우리가 "담로"라고 읽고 있는 글자는 나무목변(木)에 "이를 첨(詹)" 자로서 집의 처마라는 의미의 "처마첨(檐)"자이지 담자가 아니다. 따라서 "첨로"라고 고쳐 읽는 것이 옳다.   처음에 어느 학자가 글자형태가 비슷한 처마첨(檐)자와 멜담(擔)자를 혼동하여 첨로를 담로라고 잘못 읽었고, 그후 어느 역사학자도 옥편을 찾아 확인해 보지 않은 채  앵무새 마냥  계속해 담로라고 되뇌이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지금 당장 옥편을 찾아 확인해 본다면 필자의 주장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양서 백제 전을 보면,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曰檐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有二十二檐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치성을 고마라 부르고, 읍을 첨로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에는 22첨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주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남사 백제 전에는,
  "號所都城曰固麻 謂邑曰檐魯 如中國之言郡縣也 其國土有二十二檐魯 皆以子弟宗族分據之(도성을 고마(固麻)라 부르고, 읍을 첨로(檐魯)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 땅에는 22첨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라고 기록하고 있고,

  양직공도 백제국사 조에는,
  "所治城曰固麻 謂邑曰檐魯 於中國郡縣
  (치성을 고마라 하고, 읍을 첨로라 하는데, 중국의 군현과 같은 것이다)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旁小國 有叛
  (22첨로가 있는데, 주변 소국의 반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왕의) 자제와 종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
  波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巳 文下 枕羅 等 附之
  (파탁·다라·전라·사라·지미·마연·상사·문하·침라 등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22개 첨로 중 9개 첨로의 이름을 알 수 있게 하는데, 그 위치에 대하여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이 백제 22첨로의 위치를 놓고 논쟁이 시작되었다. 

[필자주 : 첨로의 이름을 반파(叛波), (), 다라(多羅), 전라(前羅), 사라(斯羅), 지미(止迷), 마연(麻連), 상사문 (上巳文), 하침라(下枕羅)라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사람은 한반도의 백제가 중국 대륙으로 진출해 중국 동쪽 해안을 거의 차지하고 식민지로 삼아 그곳을 왕족들에게 나누어 주었고, 남제서에 나타나는, 면중·도한·팔중·아착·매로·불사·광양·조선·대방·광릉·청하·매라·벽중·불중 등이 백제 22첨로 중의 일부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지금의 일본에 백제가 식민지를 개척해 가지고 있었을 것이며, 이것이 바로 22첨로였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며,
  요즈음 어느 사람은 백제 22첨로가 중국 동부, 중국 남부, 대만, 필리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지에 넓게 위치했었다고 주장하며, 흑치상지는 그 선조가 흑치에 봉해졌기 때문에 흑치를 성씨로 삼았을 것이라고 하며,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제75 왜(倭)전에 주유국에서 동남쪽으로 배를 타고 1년을 가야 도착할 수 있다고 기록된 흑치국과 흑치상지를 결부시켜 흑치국이 지금의 필리핀 부근을 말하는 것이고 흑치상지의 고향이 바로 그곳이었다고 하기도 한다.
  역사적으로 백제가 필리핀까지 진출하였고 그곳이 정말로 백제 땅이었다면야 삼국의 후예라 자처하는 대한민국 국민 치고 그것을 마다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선화봉사 고려도경 권3 성읍 봉경 조에는,
  "高麗南隔遼海 西距遼水 北接契丹舊地 東距大金 又與日本 流求 聃羅 黑水毛人 等國 犬牙相制(고려는 남쪽으로는 요해에 닿았고, 서쪽으로는 요수[필자주 : 고려의 서쪽 국경이 요수였다는 것은 오기가 아닐까 싶다]까지이며, 북쪽으로는 옛 거란과 접하고, 동쪽으로는 대금까지이다. 또한 일본, 유구, 담라, 흑수, 모인 등의 나라와 개의 이빨같이 서로 맞물려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지리적으로 나라의 국경이 개의 이빨같이 서로 맞물려 있다는 것은 고려와 이들 나라들이 바로 국경을 접하고 있었다는 이야기이며, 고려의 서쪽 국경이 요수라고 하여 바다가 아닌 강이 있었다고 하고 있고, 동쪽(필자주 : 동북쪽이다)도 바다가 아닌 금나라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니 고려는 한반도가 아닌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고, 남쪽, 동쪽 만이 바다에 닿아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고려는 곧 옛 백제, 신라 땅과, 고구려 땅의 일부를 차지한 나라였다.  
  그런데 삼국사기 기록 속의 백제는 지금의 발해북쪽  중국 하북성 당산시,진황도시 일원을 중심으로 강역을 넓히며 678년 간 왕조를 유지했고, 신라는 백제의 동북쪽 요녕성 금주시(錦州市) 부근의 진한 6부를 기반으로 흥기하여 강역을 넓혔고, 고구려는 백제, 신라의 북쪽, 북서쪽인 하북성 승덕시, 장가구시를 중심으로 강역을 사방으로 넓혀가 대제국으로 성장했다.

 원래 삼국의 중심 강역은 한반도가 아닌 발해 북쪽 지역이었다.
  물론 후일에 이르러 한반도 남부 서쪽은 무광왕이 세운 반도백제가 차지하고 있었고, 남부 동쪽은 흉노족인 투후 김일제의 후손인 성한왕(星漢王) 김성이 왕망의 신나라가 후한의 광무제에 의해 멸망하자 한반도로 도망쳐 와서 세운 흉노족왕국이 있었다
  그런데 북사 백제전에는,
  "백제의 서남쪽에 사람이 사는 섬이 열다섯 군데 있고, 모두 성읍이 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당산시 남쪽 발해 중에는 지금 공업지구로 개발되고 있는 조비전과 약 70여 개의 크고 작은 섬들이 있는데, 석구타도가 가장 크고, 월타, 요타, 합타 등이 있다.

   전한서에는 樂浪海中有倭人分爲百餘國(낙랑해 가운데 왜인이 있는데 1백여 개 나라로 나누어져 있다)이라고 기록하고 있고, 양직공도 왜국사 조에는 왜국이 30여 국으로 이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어, 낙랑군과 접해있는 바다 즉 지금의 발해 중의 섬들의 일부가 왜국이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삼국지 한전에는 한이 남쪽으로 왜와 접했다고 했고, 변진(변한)의 독로국이 왜와 국경을 접했으므로 한(韓), 예(濊), 왜인(倭人)이 모두 변진(변한)으로 와서 철(쇠)을 사간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후한서 한 전에도 마한이 남쪽으로 왜와 접해 변경 지역 사람들 중에는 문신한 사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어 왜와 한이 아주 가까이 국경을 접하고 있었음을 알게 한다.  
  따라서 지금의 요동반도 부근이 왜국이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통폐합 과정을 거치면서 후일에는 30여 개 나라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의 왜국은 발해와 접한 발해연안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첨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지만, 백제는 근초고왕 때 고구려를 침공하여 승리하고 탁록 즉 지금의 하북성 탁주 부근의 요서 지역을 차지했었으나 그 후 광개토대왕에게 빼앗겼다가 후일 동성왕 때 고구려로부터 요서지역을 다시 탈환했던 것으로 보이고, 위(북위)나라와의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산동성 청주지역까지 강역을 더욱 많이 넓혔던 것으로 생각된다.
  백제가 22첨로를 설치한 이유는 주변 소국의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왕의) 자제 종족들에게 나누어주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본국 이외에 부근의 정복지역을 왕족 등에게 나누어줌으로서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반란에 대비했다고도 할 수 있다.

  특히 그 명칭을 첨로라고 한 것은 그곳이 비바람을 막아주는 처마와같이 외침을 방어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당시 백제의 본국은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진황도시 일원이었고, 산동반도의 황하 하류 부근까지 진출했을 것이다. 
  따라서 22첨로는 백제와 중국 세력과의 변경지역에 설치되었을 것인데, 지금의 북경, 천진, 하북성 남부, 산동성 지역에 설치되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아마 국경인 태행산맥과 황하하류 부근, 산동성 태산 부근에 설치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그리고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면  한반도 무광왕의 반도백제에 첨로가 위치하고 있었을 가능성도 많다. 

  좀더 심도있는 연구가 필요한 사항이라 하겠다.   

  

  그리고 요즈음 백제, 신라가 양자강 부근에 위치했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 고대 역사를 정확히 밝히는 것이야 좋은 일이지만 의도적으로 너무 확대 해석해 백제가 한반도에서 황해를 건너 산동반도로부터 양자강 남쪽까지 중국 동부 해안지역을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 사서의 단편적인 기록 한줄을 너무 신봉해 흑치가 필리핀을 말하는 것이라 하며 그곳이 백제 22 첨로 중의 하나였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신라가 양자강 부근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주장하는 것등은  너무 심한 비약이라 하겠다.

 

 천문학자인  박창범은 신라가 양자강 부근에 위치했다고 말 한적이 없다. 다만 신라 상대의 일식최적관측지가 양자강 부근으로 나타난다고 했을 뿐이다. 이 말은 신라 상대에 일어났던 일식 중에 개기일식을 가장 잘 관측할 수 있는 장소가 양자강 부근이라는 의미로서 기록에 나타나는 신라의 일식기록이 부분일식을 관측했던 기록이라면 그 관측지는 전혀 다른 곳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서울대학교 천문학과 박창범 교수에게 직접 물어보면 아마 친절하게 설명해 줄 것이다. 

  
  흑치상지가 정말로 섬 출신이라면 지금 당산시 남쪽 발해 가운데의 어느 섬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되고, 흑치상지의 고향 역시 그곳일 테지 흑치상지가 필리핀에서 태어나 수 만리 떨어진 발해 북쪽의 대륙백제까지 왔을 리는 없을 것이다.
  지금의 중국 하북성 당산시, 진황도시 일원이 대륙백제였고 그 남쪽 섬인 흑치라는 이름의 섬에서 흑치상지가 태어나 자라서 바로 북쪽인 육지로 건너와서 백제의 장군이 되었다고 한다면야 믿지 못할 이유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