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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북위는 어떻게 백제를 침공할 수 있었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0. 13. 19:01

윤여동설 - 북위의 수십만 기병은 어떻게 백제를 침공할 수 있었을까? - 최초주장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10년(A.D.488) 조를 보면,
  "위(북위)가 군사를 보내 우리를 침공하다가 우리 군사에게 패했다" 라고 간단하게 기록되어 있어 이때 백제와 북위간에 전쟁이 있었고 백제가 승전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전쟁이 끝난 후 백제의 동성왕은 남제에 표문을 보내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공이 많은 장군들의 관직을 높여 달라고 요청하게 된다.
  남제서 백제국 전의 기록을 보면,   
  『"...... 공에 보답하고 열심히 노력한 것을 위로하여 그 이름을 길이 빛나게 하고자 한다.
  가행영삭장군 신 저근(姐瑾) 등 네 사람은 충성스럽게도 온 힘을 기울여 국난을 없앴으니 그 뜻의 굳셈과 과감함이 명장의 등급에 오를만하며, 가히 나라의 간성이요 사직의 튼튼한 번병이라 할 만하다. 
  그들의 노고를 헤아리고 공을 논한다면 의당 현격하게 나타나는 지위에 있어야 마땅하므로 지금 전례에 따라 가행직에 임명했다.
  원하오니 은혜를 베푸시어 임시로 내린 관직을 정식으로 인정하여 주시기 바란다.
  영삭장군 면중왕 저근은 정치를 두루 잘 보좌하였고, 무공을 겸비하였으니 이제 가행관군장군 도장군 도한왕이라 하고, 건위장군 팔중후 여고(餘古)는 젊은 시절부터 임금을 도와 충성과 공로가 이미 드러났으므로 이제 가행영삭장군 아착왕으로 하며,

  건위장군 여력(餘歷)은 천성이 충성스럽고, 소박하며 문무가 뛰어나므로 이제 가행용양장군 매로왕이라 하고,

  광무장군 여고(餘固)는 정치에 공로가 있고, 국정을 빛나게 했으므로 이제 가행건위장군 불사후라 하였다." 하였다.


  모대(牟大: 동성왕)가 또 표문을 보내,
  "신이 파견한 행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 신 고달(高達)과 행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 신 양무(楊茂)와 행선위장군 겸 참군 신 회매(會邁) 등 3인은 지조와 행동이 깨끗하고 밝으며, 충성심이 일찍부터 드러났다.
  지난 태시(A.D.465∼471) 중에 나란히 송나라의 조정에 사신으로 갔었고, 지금 신의 사신으로서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바다를 건넜으니 그 지극한 공로를 따진다면 벼슬을 마땅히 올려 주어야 하므로 선례에 따라 가행직을 내렸다.
  천자의 은혜는 신성하고 아름다워 만리 밖에까지 미치는 것인데, 하물며 스스로 천자의 뜰에 이르렀으니 은혜를 입지 않을 수 있겠는가?
  부디 바라오니 특별히 살피시어 정식으로 관작을 제수하여 주기 바란다.
  고달은 변경에서의 공로가 이미 뚜렷하고 공무에 부지런하여 이제 가행용양장군 대방태수라 하고,

  양무는 마음과 행동이 깨끗하고 한결 같아 항상 공무에 임하므로 이제 가행건위장군 광릉태수라 하며,

  회매는 생각이 꼼꼼하고 빈틈이 없어 여러번 근무의 성과를 나타내 이제 가행광무장군 청하태수라 하였다." 라고 하니 이를 허락한다는 조서를 내림과 동시에 장군의 호를 내리고 태수의 관직을 내려주었다.
  (백제왕을)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으로 삼고, 알자복야 손부를 사신으로 파견하여 책명으로

모대를 죽은 그의 할아버지 모도(牟都)의 뒤를 이어 백제왕으로 봉하며

말하기를 "아 기쁘도다. 그대들은 충성심과 부지런함을 대대로 이어받아서 그 정성이 먼 곳에까지 이르니 바닷길이 고요하고 맑아져 조공을 끊이지 않았다. 법전에 따라 귀한 관작을 계승하게 하노라.
  삼가 아름다운 업을 지켜야할 것이니 어찌 신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행도독 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 모대에게 조서를 내리고, 모대를 그의 할아버지 모도의 작위를 계승하게 하여 백제왕으로 삼는다.  왕위에 오름에 장수(章綬: 인장과 끈) 다섯과 옥(玉), 동(銅), 호(虎), 죽(竹) 네 개의 부절을 내리니 왕이 이를 공손히 받는다면 이 또한 아름다운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 백제의 동성왕은 위나라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상당히 많은 땅을 빼앗아 전투에 공이 많은 장군들을 그 땅의 왕으로 임명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곤지왕자의 아버지요, 동성왕의 할아버지로서 사지절 도독백제제군사 진동대장군 백제왕(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鎭東大將軍百濟王)으로 나타나는 백제 모도왕(牟都王)은  대륙에서 근초고왕과의 왕위다툼에서 패하고 한반도로 건너와 지모밀 땅에 도읍하고 반도백제를 세웠던 무광왕(武廣王)의 후예(고손자)로서 한반도 반도백제의 왕위에 올랐던 인물로 밝혀졌다. 반도백제는 이 모도왕 때 대륙백제를 흡수 통합하고 손자인 모대(동성왕)를 대륙으로 보내 대륙백제의 왕위에 오르도록 했고, 이후 멸망할 때까지 대륙백제의 왕위에는 모두 이 모도왕의 후손들이 올랐다.    

 

  그런데 북위는 490년에 다시 한번 백제를 침공하게 되는데, 이 때의 일을 기록한 남제서의 기록 때문에 역사 연구자들 사이에 논란이 빚어지게 되었다. 
  기록을 보면, 

  『이해(A.D.490)에 위(북위)나라 오랑캐가 또 다시 기병 수십만을 동원하여 백제를 공격하여

그 지역으로 쳐들어가니 모대(동성왕)가 장군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를 보내 무리를 거느리고 북위의 오랑캐군을 기습 공격하여 그들을 크게 쳐부수었다.
  건무 2년(A.D.495) 모대가 사신을 보내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은 봉작을 받은 이래 대대로 조정의 왕화를 입었고, 또한 절부와 부월을 받아 모든 변방을 평정하였다.
  앞서 저근 등이 모두 영광스러운 관작을 제수 받아 온 백성이 함께 기뻐하였다. 

  지난 경오년(A.D.490)에는 험윤(북위)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히 침입했으나 신이 사법명 등을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역습하게 하여 한밤중의 번개처럼 기습 공격하니 흉리(북위)가 당황하여 마치 바닷물이 쓸려가듯 붕괴되었다. 그 기회를 타서 쫓아가 베니 시체가 들을 붉게 물들였다.
  이로 인하여 그 예기가 꺾여 고래처럼 사납던 그 흉포함이 사라졌다.
  지금 천하가 조용해진 것은 사실은 사법명 등의 꾀에 의한 것이오니 그 공훈을 찾아 마땅히 표창해야할 것이다.
  이제 사법명을 가행정로장군 매라왕으로 하고,

  찬수류를 가행안국장군 벽중왕으로 하며,

  해례곤을 가행무위장군 불중후로 하고,

  목간나는 과거에도 군공이 있으며, 또 성문과 배를 쳐부수었으므로 행광무장군 면중후라 하였다.
  부디 천은을 베푸시어 특별히 관작을 내려 주기 바란다."하였다.
 

  또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이 사신으로 보낸 행용양장군 낙랑태수 겸장사 신 모유와 행건무장군 성양태수 겸사마 신 왕무와 겸참군 행진무장군 조선태수 신 장색과 행양무장군 진명은 관직에 있으면서 사사로운 것을 버리고, 오로지 공무에만 힘써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내 던지고, 어려운 일을 당해서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았다.
  지금 신의 사신으로서의 임무를 맡아 험한 파도를 무릅쓰고 파도를 건너 그의 온힘을 기울이고 있다. 당연히 관작을 올려주어야 하겠으므로 각각 가행직에 임명하였다. 부디 성조에서 특별히 관작을 내려 주기 바란다."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허락하고 장군의 호를 내려 주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때 백제가 한반도의 충남 공주에 도읍하고 있었고, 고구려가 지금 북한으로부터 요하 동쪽을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며, 북위는 양자강 북쪽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고, 양자강 남쪽에는 남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기록에는 490년에 북위의 수십만 기병이 백제를 침공했으나 동성왕이 장군인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를 보내 북위의 침략군을 기습공격하여 북위군이 마치 바닷물에 쓸려가듯 붕괴되었고 그로 인하여 온 들판을 피로 물들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이때 북위가 처절한 패배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 기록을 보고 이때 중국 대륙에 있던 북위 기병 수십만 명이 어느 길을 따라 한반도의 백제까지 올 수 있었으며, 이때 한반도에 있던 백제와 중국 대륙에 위치하고 있던 북위 사이에 무슨 원한관계가 있어 수십만 명을 동원해야 할 만큼 큰 전쟁을 치루게 되었을까 의아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다보니 어느 사람은 북위의 수십만 기병이 고구려를 경유하여 육로로 백제를 침공했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또 어느 사람은 고구려가 북위 기병 수십만 명이 고구려 땅을 가로질러 가게 할 리가 만무하므로 배를 타고 서해(황해) 바다를 건넜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하고,

 

☆ 북위의 수십만 기병이 서해(황해) 바다를 건너 한반도의 백제를 침공하려면 군사 수십만 명이 탈 배와 또 수십만 필의 말을 운송할 배가 필요하며, 그 외에도 전투용품, 전투식량, 식수, 말먹이 등을 실어 나를 배가 필요하게 된다.
  최소 수만 척의 배가 필요할 것이고, 여차하여 바람이라도 세게 부는 날에는 수십만의 군사들은 물귀신이 될 각오를 해야한다. 
  그리고 위나라가 군사 수십만 명을 한반도로 보낼 경우 위나라를 지킬 군사는 없게 되는데 이때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던 남제나 고구려의 침공을 받는다면 북위는 나라가 멸망할 수 있는데 이러한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 건너 백제를 침공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대륙과 한반도에 떨어져 있는 북위와 백제간에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있을 수 없고, 고구려를 경유하여 백제를 공격한다는 것도 말이 안되고, 수십만 기병이 바다를 건넌다는 것 역시 말이 되지 않으므로 이는 아마 송서 등에 기록되어 있는 백제가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는 기록과 관련이 있어 백제가 서해바다를 건너가 중국대륙에 개척한 식민지 땅인 요서 진평현과 북위 사이에 갈등이 있어 실제 전쟁은 대륙에서 일어났던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각각 나름대로는 온갖 가능성과 추리력을 총 동원하여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어느 주장도 명쾌하지 않다.

 

  그런데 필자의 주장대로 백제가 대륙에 실제 위치하고 있었고, 이때 대륙백제가 북위와 직접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고 한다면 설명은 아주 간단해 지는 것이다. 
  이때 대륙백제는 지금의 중국 북경 동쪽 하북성 일원을 차지하고 있었고, 북위가 양자강 이북을 차지하고 있었다면 이때 두 나라는 지금의 영정하(필자주 : 옛 요수이다)  부근을 국경으로 하고 서로 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북위에서는 국경을 접하고 있는 백제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북위의 도읍을 침공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온 국력을 기울여 수십만 기병을 동원하여 백제를 쳤다면 설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때 북위는 백제를 침공하여 평원지역인 영정하 중, 하류부근을 빼앗으려 하다가 오히려 백제에게 대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그 후 북위는 더 많은 땅을 백제에게 빼앗기게 되어, 국력이 약해지기 시작해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결국 534년에 이르러 탁발규의 북위는 멸망하고, 원선견의 동위와 원보거의 서위로 쪼개지고 만다.
  그러다가 동위는 북제에게, 북제는 다시 북주에게 멸망하게 되고,
  서위는 북주에게, 북주는 다시 수나라에게 멸망하게 되는 것이다.
   
  북위는 바다 건너 멀리 한반도에 있던 백제를 수십만 기병을 동원하여 침공했다가 무참하게 패했던 것이 아니라 사실은 육지로서 국경을 접하고 있던 북경 부근의 대륙백제를 침공했던 것이고, 이때 두 나라가 전투를 했던 곳은 아마 북경 서쪽을 흐르는 영정하 부근이었을 것이다.

  지금의 영정하는 옛 요수였고, 대개의 경우 동이족과 중국 세력들과의 국경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옛 기록들이 곳곳에서 백제가 대륙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는데도 우리가 지금까지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