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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고구려의 불교전래

윤여동 2008. 4. 21. 00:09

윤여동설 - 고구려의 불교 전래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소수림왕 2년(A.D.372) 조를 보면,
  "여름 6월 진(前秦) 나라왕 부견이 사신과 중 순도(順道)를 파견하여 불상과 경문을 보내왔으므로 왕이 사신을 보내 토산물로서 답례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4년(A.D.374) 조에는,
  "승려 아도(阿道)가 왔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흥법 편「순도조려」조에도 이들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
  순도는 전진왕 부견의 명을 받고 서기 372년에 고구려로 왔고, 아도는 그로부터 2년 뒤인 374년 동진 효무제 영강 2년에 동진으로부터 고구려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 소수림왕 5년(A.D.375) 조를 보면,
  "봄 2월 처음으로 초문사를 지어 순도가 있게 하고, 이불란사를 지어 아도가 있게 하니 이것이 해동불법의 시초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이때 최초로 절이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고구려로 온 이때 고구려의 도읍은 황성이었고, 전진의 도읍은 장안(현 서안)이었으며, 동진의 도읍은 건강(현 남경)이었다.
  앞서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서진이 몰락하고, 선비족, 흉노족, 갈족, 저족, 강족의 소위 말하는 오호가 흥기하여 중원이 혼란해 지자 342년 8월에 환도성으로 옮겨 간다.
  이때 고구려의 고국원왕은 기회를 보아 중국 쪽으로 진출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때 고구려의 서남쪽에 위치해 있었던 선비족인 연(燕)나라 역시 중원으로 진출하고 싶었으나 배후에 강력한 세력인 고구려가 있어 마음놓고 남하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당시 연나라의 왕이었던 모용황은 중원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배후의 고구려를 먼저 약화시킬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342년 11월에 이르러 고구려를 침공하여 환도성을 함락시키고, 왕의 어머니인 태후 주씨와 왕비를 포로로 잡고, 미천왕의 유골을 파 가져가게 된다.

    그러자 고구려에서는 선왕의 유골을 돌려 받고 태후와 왕비를 환국 시키기 위하여 온갖 보물을 바쳐야 했고, 신하라 칭해야 하는 수모를 당하게 되고 이후 13년간 연나라에 끌려 다니게 되는데, 고국원왕은 343년 7월에 연나라로부터 멀리 떨어진 평양동황성으로 옮겨 재기를 도모하게 된다.
  그런데 그로부터 30여 년이 지난 서기 371년 10월에 백제의 근초고왕이 3만의 군사로서 평양성(현 하북성 승덕시부근)을 공격해오자 고국원왕도 급히 평양성으로 가서 백제군을 방어하다가 백제군의 화살에 맞아 10월 23일에 평양성에서 죽고 만다.
  이때 고구려는 왕이 죽고 패전하여 요서 진평현 지역을 백제에게 빼앗기게 된다.  
  고국원왕이 전사하게 되자 그 아들이 왕위를 이었는데, 이 사람이 바로 고구려 17대 소수림왕이다.
  고국원왕에게는 원래 세 아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에 나타나는데, 소수림왕은 원래 고국원왕의 둘째 아들이었고, 고국양왕은 셋째 아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소수림왕은 그 형이 요절하자 태자로 봉해질 수 있었고,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소수림왕 구부를 고국원왕의 둘째 아들로 보는 이유는, 고국원왕 10년(A.D.340) 조에, "왕이 연나라 임금 황에게 세자를 보내 예방하게 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반해, 고국원왕 25년(A.D.355) 조에는, "봄 정월 왕의 아들 구부를 태자로 삼았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354년쯤 세자였던 장자가 죽자 다시 둘째인 구부를 태자로 봉한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소수림왕이 즉위한 시기는 중원의 변혁기로서 전진이 전연을 멸망시켜 세력이 커져 양자강 이북을 통일해 가고 있었고, 나아가 양자강 남쪽의 동진을 치려고 하고 있었다.
  전진으로서는 배후의 고구려와 부딪쳐서 좋을 것이 없을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소수림왕으로서는 이러한 변혁기에 백성들을 정신적으로 하나로 묶을 그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소수림왕은 그 대안으로써 전진의 부견에게 불교를 전해줄 것을 요청했고, 부견은 고구려와의 관계를 돈독히 하기 위해서 순도에게 불상과 경문을 가지고 가서 고구려에 불교를 전해주도록 했을 것이다.
  한편, 전진에서 순도를 고구려에 보냈다는 소식이 동진에 전해지자 동진에서도 아도를 선발하여 고구려에 보내 불교를 전해주며 고구려와의 우호를 과시하게 된다.
  이를 보면 전진이나 동진이 서로 동방의 강자인 고구려와 우호관계를 유지하기를 바라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자 소수림왕은 순도와 아도가 불법을 포교할 절을 짓게 했는데, 이것이 바로 해동 최초의 절인 초문사와 이불란사인 것이다.    
  그런데 이때 고구려의 도읍은 황성이었다.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다.  

   따라서 이때 순도나 아도는 고구려의 왕성인 황성까지 왔을 것이다. 
  순도나 아도는 전진의 도읍인 장안과 동진의 도읍인 건강으로부터 고구려의 도읍 황성까지 왔었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면 전진의 도읍이었던 장안 즉 지금의 서안을 출발한 순도는 어느 길을 따라 고구려의 도읍인 황성으로 오게 되었을까?
  삼국사기 소수림왕 2년 조를 보면, 순도가 고구려로 온 때는 여름 6월이라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순도는 육로가 아닌 바닷길과 강을 타고 올라와 황성으로 왔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이는 후세 송나라에서 고려에 사신으로 오갈 때, 갈 때는 남풍을 이용하고 돌아올 때는 북풍을 이용했다고 했고, 고려도경을 쓴 서긍 일행이 고려에 사신으로 갈 때 5월 28일에 명주를 출발하여 6월 12일에 고려의 예성항에 도착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순도 역시 송나라의 서긍과 비슷한 철에 출발하였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동진의 도읍이었던 건강(현 남경)을 출발한 아도 역시 비슷한 항로를 이용하여 고구려로 왔을 것이라고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삼국 최초의 절 초문사와 이불란사는 어디에 지었을까?

 

  소수림왕은 불교를 받아들여 초문사(肖門寺)와 이불란사(伊佛蘭寺)라는 절 두 개를 지어 초문사에는 순도가 있게 하고, 이불란사에는 아도가 있게 했는데, 이것이 해동불법의 시초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까지 이 삼국 최초의 절 초문사와 이불란사의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하고 그 흔적도 찾아내지 못하고 있다.
  소수림왕 때 고구려의 도읍은 황성이었다. 
  
고구려는 졸본에서 2대 유리왕 22년인 서기 3년에 국내위나암(국내성)으로 옮겨 10대 산상왕 13년 209년까지 200여년간 도읍했고, 산상왕이 환도성으로 옮겼으나 동천왕 때 관구검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함락되자 동천왕 21년인 247년에 도읍을 평양성으로 옮기게 되고, 16대 고국원왕 12년인 342년에 잠시 환도성으로 다시 옮겨 살았으나 전연 모용황의 침공을 받아  환도성이 또다시 함락되자 황성으로 도읍을 옮겨 17대 소수림왕, 18대 고국양왕, 19대 광개토대왕을 지나 427년인 20대 장수왕 15년에 다시 평양성으로 옮기게 되고, 평원왕 28년인 586년에 또 다시 장안성으로 옮겼다고 기록에 나타난다.

 

[고구려의 도읍이전]

추모왕 원년(B.C.37) - 유리왕 22년(A.D.3) : 졸본

유리왕 22년(A.D.22) - 산상왕 13년(A.D.209) : 국내성

산상왕 13년(A.D.209) - 동천왕 21년(A.D.247) : 환도성

동천왕 21년(A.D.247) - 고국원왕 12년(A.D.342) : 평양성

고국원왕 12년(A.D.342) - 고국원왕 13년(A.D.343) : 환도성

고국원왕 13년(A.D.343) - 장수왕 15년(A.D.427) : 황성(평양동황성)

장수왕 15년(A.D.427) - 평원왕 28년(A.D.586) : 평양성

평원왕 28년(A.D.586) -                                : 장안성

 


  그렇다면 소수림왕은 고구려 최초의 절인 초문사와 이불란사를 당시의 도읍이었던 황성(평양동황성) 부근에 지었을 것이다.

  지금의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다.    

 

고구려는 언제 불교를 공인했을까?

 

  고구려의 18대 고국양왕은 17대 소수림왕의 동생이며, 광개토대왕의 아버지이다. 
  형인 소수림왕이 아들이 없이 죽게 되어 동생인 이련이 왕위를 이었는데 이가 곧 고국양왕인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양왕 9년(A.D.392) 조를 보면,
  "봄 3월 교서를 내려 (백성들이) 불교를 숭배하여 복을 받도록 하라고 명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지 20년이 지난 이때에 이르러 불교가 공인되어 민간에까지도 널리 퍼지게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고구려에서 불교가 공인된 때는 고국양왕 때였을 것이고, 그 이전에는 왕실이나 일부 귀족층에서만 불교를 믿었을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지은 아홉개 절의 흔적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광개토대왕 2년(A.D.393) 조를 보면, "평양에 9개의 절을 새로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고국양왕이 죽고 그 아들인 광개토대왕이 왕위에 오르자 평양에 9개의 절을 새로 세웠음을 알게 한다.
  그런데 고구려는 고국양왕 때 이미 불교가 공인되어 있었으므로 광개토대왕이 세운 9개의 절은 왕실이나 귀족들만을 위한 절이 아니라 일반 백성을 위한 절이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이 절들은 후일 수 양제가 고구려를 침공한 서기 612년에 이르러서는 전쟁에도 활용되게 된다.
  기록을 보면,
  "여름 6월 좌익위대장군 내호아가 강·회의 수군을 통솔하여 수백 리에 뻗친 배들로 바다를 따라 먼저 패수로부터 들어오니 평양과의 거리가 60리였다.
  우리 군사와 맞부딪치자 수나라 군사가 진격하여 우리를 크게 깨뜨렸다.
  내호아가 이긴 틈을 타서 성으로 진격하려 하니 부총관 주법상이 그를 만류하고 강한 군사 수만 명을 뽑아 가지고 곧바로 성 밑까지 왔다.
  이때 우리 장수는 성밖에 있는 빈 절에 군사들을 숨겨 놓고 군사를 내어 내호아와 맞 싸우다가 패하는 척 하니 내호아가 성안으로 쫓아 들어와 군사들을 풀어놓아 사람들을 사로잡고 재물을 약탈하느라 대오를 정돈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우리의 숨었던 군사들이 내달으니 내호아가 크게 패하여 내호아는 간신히 붙잡히지 않았으나 군사들이 살아서 돌아가는 자가 수천 명에 불과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어 그를 알 수 있는데, 지금 중국 하북성 승덕시 부근이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비정되므로 광개토대왕이 세웠다는 9개의 절들은 바로 이곳 승덕시 부근에 세웠을 것이다.
  지금 승덕시에는 외팔묘라는 티벳라마사원들도 있고 다른 여러 절들도 있는데, 이들이 바로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세웠다는 아홉개 절의 흔적은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