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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의 불교전래

윤여동 2008. 4. 22. 07:20

윤여동설 - 백제의 불교 전래

 

 

 

 

  삼국사기 백제본기 침류왕 원년(A.D.384) 9월 조에는,
  "호승(胡僧)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진[東晋]나라로부터 와서 왕이 궁중으로 맞아들여 예우하고 공경하니 불교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삼국유사 흥법편 「난타벽제」조에도 동일한 기록이 있어 서기 384년에 동진으로부터 백제에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때가 372년이었으므로 백제는 그로부터 12년 후에 전해졌고, 고구려를 거쳐 전해진 것이 아니라 동진으로부터 직접 전해졌다는 것도 알 수 있는 기록인 것이다.

 

 

☆ 한반도에는 대륙백제와는 별도로 서기 365년경 무광왕이 대륙에서 근초고왕과의 왕위쟁탈전에서 패하고 한반도로 건너와 익산 금마에 반도백제를 다시 세우고 지은 제석정사가 한반도 최초의 절로 추정된다. 따라서 고구려나 대륙백제보다 반도백제에 먼저 불교가 전해졌을 가능성이 있다.


 

  앞서 백제의 근초고왕은 고구려로부터 요서 지역을 빼앗고는 371년에 도읍을 남한성에서 북쪽으로 북한산 아래의  한성(漢城)으로 옮겼었다.
  이때 백제(대륙백제)의 강역은 매우 커져 있었다.
  양직공도 백제국사의,
  "백제는 옛날에 왔던 마한의 속국이었다.
  [백제는] 진나라 말기에 요서 진평현을 빼앗았다"라는 기록은 바로 이때의 상황을 기록한 것이다.   
  그리하여 근구수왕을 지나 침류왕에 이르렀는데, 침류왕이 384년 7월에 동진에 사신을 보내 불교를 전해 주기를 요청하자 동진에서는 그 사신이 돌아갈 때 "마라난타"라는 호승을 선발하여 함께 보내 불교를 전해 주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백제의 침류왕이 왜 이때에 이르러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는지 그 확실한 이유는 지금 잘 알 수 없지만, 그는 10여 년 전에 고구려에 불교가 전해진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고, 고구려에서 불교가 백성들을 정신적으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자 백제 역시 그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어 동진에 불교 전파를 요청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백제의 건국지를 한반도 서울부근에서 찾으려 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경기도 광주목 조의,
 "본래 백제 남한산성이다. 시조 온조왕 13년에 위례성으로부터 도읍을 옮겼다.(本 百濟南漢山城 始祖溫祚王十三年 自慰禮城移都之)" 라는 기록을 근거로 하여 백제의 도읍 한성이 지금의 경기도 광주이거나, 서울의 북한산 부근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했었다.
  따라서 동진의 마라난타가 당연히 중국 남쪽의 동진으로부터 서해바다를 건너 지금의 한반도 서울로 왔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백제의 건국지는 한반도가 아니라 사실은 지금 북경의 동쪽인 난하 
동쪽 진황도 도산(都山) 남쪽 부근이었고, 침류왕 당시 백제의 도읍 한성 역시 도산 남쪽 부근으로 비정된다. 
  그렇다면 마라난타는 지금의 중국 남경을 출발하여 동중국해를 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 산동반도를 돌아 발해로 들어서서 발해를 서북쪽으로 가로질러 건넌 후 난하를 타고 올라가 당시 백제의 도읍이었던 한성으로 가서 침류왕을 만났을 것이다.

 

백제 최초의 절을 지은 한산은 지금의 어디일까?
 

[백제 최초의 절터로 비정되는 폐사지 오봉산 조양사지] 

 

삼국사기 백제본기 침류왕 2년(A.D.385) 조를 보면,  
  "봄 2월 한산(漢山)에 절을 창건하고 중 1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겨울 11월 왕이 죽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백제의 침류왕이 385년에 한산에 백제 최초로 절을 지었음을 알 수 있는데, 백제에 불교가 전해진 침류왕 때 백제의 도읍은 한성(북한성)이었다.
  앞서 온조왕의 어머니인 소서노는 어린 두 아들 비류와 온조를 데리고 기원전 42년 기묘년에 졸본을 떠나 동남쪽으로 향하여 마한 동북쪽 한산(漢山) 부근에 자리잡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기원전 18년에 이르러 한산 부아악(負兒嶽)에 올라 도읍할 곳을 바라본 후 비류는 서쪽의 미추홀에 자리잡고 백제라 했고, 온조는 위례성에 자리잡고 십제라 했다가 비류왕이 죽자 온조왕이 백제와 십제를 통합한 후 새롭게 "백제"로 국호를 정한 후 남한성(후대의 광주)으로 도읍을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 부아악(負兒嶽)이란 산봉우리가 어린애를 업은 것과 같이 보인다는 의미로서 누가보아도 그 산세에 어린애 모양을 볼 수 있었을 것인데, 사실 지금 서울 부근에 이러한 산은 없다.   

    
 

 
  그러다가 371년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죽이며 승전하여 요서 진평현을 빼앗은 후 도읍을 북쪽의 한성으로 옮기게 된다.
  그렇게 근초고왕, 근구수왕을 지나 15대 침류왕 원년인 384년에 이르러 백제에 불교가 전해지는 것이다.
  그러자 침류왕은 한성 부근의 한산에 백제 최초의 절을 짓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백제 최초의 절을 한반도 서울 부근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현장은 난하 부근의 대륙인데 바다건너 한반도에서 그 흔적을 찾고 있으니 침류왕 때 지었던 절의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백제는 언제 불교를 공인했을까?

 

  삼국유사 흥법 난타벽제 조에는,
  "아신왕이 즉위한 대원 17년(A.D.392) 2월에 영을 내려, 불법을 숭상하고 믿어 복을 구하라고 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백제는 아신왕 때인 392년에 불교를 공인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아신왕은 원래 불교를 처음 받아들였던 15대 침류왕의 장자였으나 침류왕이 죽었을 때 나이가 어렸던 탓에 숙부인 16대 진사왕에게 왕위를 빼앗겼다가 성장한 후 진사왕을 제거하고 왕위를 되찾아 백제 17대 왕위에 오른 인물로서, 그가 태어날 때 한성 별궁에 신광이 비쳤으며, 장성해서는 의기가 호방하고 사냥과 말타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 7년(A.D.391) 조를 보면,
  "봄 정월 궁실을 중수했으며, 연못을 파고 그 안에 산을 만들어 기이한 새를 기르며 이색적인 화초를 가꾸었다" 라는 기록이 보인다.
  이를 보면 진사왕은 불교보다는 도교에 심취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만약 왕이 도교에 심취했었다면 백제에 전해진 불교는 침체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392년 11월 진사왕이 죽고 아신왕이 왕위에 오르자 아신왕은 자기 아버지인 침류왕 때 전래된 불교를 공인하고 적극 권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백제 불교는 이때부터 민간에도 널리 퍼져갔을 것이다.

 

출가하여 스님이 되려고 했던 위덕왕

 

  서기 554년 7월에 성왕은 전선에 나가 오랫동안 고생하고 있는 태자를 위문하기 위해 경호원 일부만을 대동하고 비밀리에 전선으로 향한다. 그런데 그 정보가 신라로 새어나가 길목을 지키고 있던 신라군에게 잡혀 죽어 목이 잘려 신라로 보내지게 된다. 이때 위덕의 나이 30세였다.    그리하여 위덕의 마음속에는 아버지인 성왕이 자기 때문에 죽었다는 자책감에 빠지게 되어 그는 죽은 자기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출가하여 스님이 되려고 마음먹게 된다.
  그러자 신하들은 펄쩍 뛰었고, 정 아버지의 명복을 빌고 싶으면 다른 사람 1백 명을 출가시켜 명복을 빌게 하면 된다고 위덕을 설득한다.
  부여의 능산리에서 창왕명 석조사리감이 발굴되었는데,
  "백제창왕13계태세재정해매형공주공양사리(百濟昌王十三季太歲在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라는 글자가 새겨 있었다. 
  "백제 창왕(위덕왕) 13년 정해년에 맏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 라는 뜻이다.

 

                                            

 

 

☆  삼국사기에 의하면 성왕이 죽은 해는 서기 554년 7월이었으므로 이해에 위덕왕이 왕위를 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백제 창왕 13년은 서기 566년으로서 병술년이 된다. 그런데 석조사리감에는 창왕 13년이 정해년이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정해년은 서기 567년이다. 1년의 시차가 발생하고 있다.
  이를 보면 위덕왕이 그 아버지를 죽게 했다는 자책으로 바로 왕위에 오르지 않았던 것이 아닌가 싶다.

 

  만약 성왕의 맏공주로 생각되는 사람이 공양했다는 사리가 그 아버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때 만들어진 창왕명 석조사리감이 부여에서 출토되었다는 것은 사시하는 바가 크고, 반도백제 무광왕의 후예였던 창왕(위덕왕)이 혹시 그 아버지의 명복을 빌기 위한 절을 대륙이 아닌 한반도의 부여에 지었던 것이 아니었나 생각해 볼 수도 있고, 부여 능산리에서 출토된 백제금동대향로가 성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위덕왕이 지었던 바로 그 절에서 사용하던 향로가 아닌가 생각해볼 수도 있다.

  
 

  그리고 얼마 전 부여의 부소산 건너편 폐사지에서 창왕명 사리기가 발굴되었는데, 그곳에는 "丁酉年 二月 十五日 百濟王昌 爲亡王子 立刹 本舍利二枚 葬時神化爲三(정유년 2월 15일 백제 창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또는 탑)을 세웠다. 본래 사리가 2과(매)였는데 매장할 때는 신의 조화로 3과가 되었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그 절(또는 탑)은 위덕왕 때인 서기 577년 정유년에 지어진 절(또는 탑)로서, 절(또는 탑)을 지은 목적이 위덕왕의 죽은 아들을 위해서였음을 알 수 있는데 죽은 왕자의 이름을 아직은 잘 모른다. 

 

                                                    

 

   이를 보면 위덕왕은 그 죽은 아버지를 위해 충남 부여 능산리에 절을 지었고, 또 죽은 아들을 위해서는 부소산 건너편에 절(또는 탑)을 지었다는 말이 된다.
  위덕왕과 충남 부여는 특별한 관련이 있는 곳이라는 말이 되는데, 사실 위덕왕은 한반도 반도백제의 왕이 아니라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던 사람이다.
  그리하여 위덕왕은 수나라가 고구려를 치려고 하자 길 안내를 하겠다고 자청하고 나서기도 했던 것이다. 백제가 대륙에 위치하지 않고는 위덕왕이 고구려를 치는 수나라군의 길 안내를 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 백제 위덕왕이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에 길잡이 노릇을 하겠다고 하는 기록과 무왕이 수나라의 고구려 침공 때 요수를 건너온 수나라군과 만났다는 기록을 보고는 백제가 지금의 요동에 별도의 땅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는데, 이는 대륙삼국의 위치를 잘 알지 못하고, 한반도를 삼국의 중심 강역이라 생각하고는 그러한 주장을 하는 것이나 그것은 틀린 것이다.
삼국사기 기록 속의 대륙백제는 지금의 중국 하북성 난하 중하류 부근이 중심강역이었다.

  

 

  그렇다면 위덕왕(창왕)이 왜 대륙이 아닌 한반도의 부여에 그 죽은 아들을 위해 절을 지었는지 이상할 것이지만 이는 그리 혼란스러워할 사항은 아니다.
  왜냐하면 위덕왕이나 그의 아들은 반도백제 건국시조인 무광왕의 후예이기 때문이고, 무령왕 역시 무광왕의 후예였기 때문에 죽은 후 고향 땅인 한반도에 묻혔다고 생각하면 간단히 설명되기 때문이다.

    
 

☆ 창왕명 사리함이 발굴된 부여의 폐사지를 왕흥사지라고 하여 무왕이 지은 왕흥사지라고 하는 사람도 있으나 부여의 폐사지는 무왕이 지은 왕흥사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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