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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여동설 - 백제 무왕은 왕흥사를 어디에 세웠을까? - 최초주장

윤여동 2007. 10. 17. 09:36

윤여동설 - 백제 무왕은 왕흥사를 어디에 세웠을까? - 최초주장

 

 

 

 

 

 

 

  삼국사기 백제본기 법왕 2년(A.D.600) 정월 조를 보면,
  "創王興寺 度僧三十人(왕흥사를 창립하고 승려 30명에게 도첩을 주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무왕 35년(A.D.634) 조를 보면,
  "春二月 王興寺成 其寺臨水 彩飾壯麗 王每乘舟 入寺行香(봄 2월 왕흥사가 낙성되었다. 그 절이 물가에 위치했고 채색과 장식이 웅장하고 화려했다. 왕이 자주 배를 타고 절에 들어가서 향을 피웠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왕흥사를 준공하는데 무려 34년이나 걸렸음을 알게 하는데, 지금까지 기록으로만 전할 뿐 한반도에서 그 왕흥사의 실체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무왕 때 백제의 도읍은 사비였으므로 우리는 충남 부여를 백제의 마지막 도읍 사비라고 생각하고 왕흥사 역시 부여 부근에 세워졌던 절로 생각해 백제의 왕궁이 부여 부소산에 위치하고 있었다고 보고 부소산에서 백마강(부여를 지날 때의 금강)을 건넌 맞은 편 지점에 왕흥사가 세워졌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부소산 맞은 편인 충남 부여군 규암면 신리에서 "왕흥(王興)"이라 새겨진 명문 기와편이 발견되어 그 부근이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왕흥사가 있던 곳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요즈음에 이르러서 발굴을 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고려시대 가마터가 발견되었고, 그곳에서도 "왕흥(王興)"이라 새겨진 고려시대 명문기와가 다수 출토되어 그곳이 왕흥사지가 분명하고, 고려시대까지도 왕흥사가 존재하다가 언젠가 절이 없어지게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되었다.

  그런데 필자는 이 한반도 충남 부여의 왕흥사가 삼국사기에 기록되어 있는 무왕 때 지은 왕흥사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 부여 왕흥사지에서 577년에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를 위해 절을 지었다는 황금 사리병과 명문이 발굴되었다. 따라서 부여의 왕흥사는 무왕이 지은 왕흥사가 아닌 것이다.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왕흥사 창건 기록이 틀렸을 것으로 보나  왕자가 죽어 그 혼령을 위로하기 위해 위덕왕이 절을 지었다면 절의 이름을 "왕흥사(王興寺)" 라고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극락을 가라고 극락사라 하거나 영혼을 위로한다는 의미의 위령사라 했을 것이다. 

  왕흥사라는 절의 이름은 왕을 위한다거나 나라의 국태민안을 기원하기 위한 절을 짓고 붙일 수 있는 이름이지 일개 죽은 왕자를 위한 절 이름이 아니다.

  따라서 위덕왕이 죽은 아들을 위해 처음 절을 지었을 때 왕흥사라고 했을 리가 없고, 후대에 이르러 왕흥사라고 절의 이름을 바꾸었을 것이다. 고려때의 왕흥명 기와가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백제 30대 무왕은 반도백제의 왕이 아니라 대륙백제의 왕위에 올랐던 인물로서 무왕이 왕위에 오른 사비는 한반도의 부여가 아니라 지금 북경 동쪽 당산시 난현(난주)이었기 때문에  무왕이 왕흥사를 짓고 자주 절에 들러 향을 피웠다면 왕흥사가 한반도 부여가 아닌 난현(난주) 부근에 지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산시 난현(난주)은 난하의 하류쯤에 위치한다. 
  삼국유사를 보면, 미륵사 창건 설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를 보면,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아래 큰 연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못 가운데 나타나므로 어가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부디 여기에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하였으므로 왕이 그것을 허락했다.
  곧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력으로 하루밤 사이에 산을 헐어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불을 만들고, 불당과 탑과 낭무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국사에는 왕흥사라 했다]라 했다.

 

☆ 우리는 지금 이 기록 속의 미륵사를 전북 익산 금마의 미륵사지를 말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기도 하다.

 

  진평왕이 여러 기술자들을 보내 그 일을 도왔는데 그 절은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라고 기록되어 있어 일연이 삼국유사를 저술할 때까지도 미륵사가 실제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고, 일연은 그 절이 곧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흥사와 같은 절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왕흥사가 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인 법왕 때 이미 창건되었음을 감안하여 생각해 보면 무왕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이미 왕흥사를 짓기 시작했는데, 무왕이 왕위에 오른 후 못을 메우고 터를 더 넓혔을 것이다. 

 

☆ 삼국유사 무왕 조에는 무왕의 부인이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다른 기록들에는 진평왕에게 천명, 덕만이라는 두 딸만 나타나 선화라는 인물이 정말로 진평왕의 셋째 딸이었는지는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를 보면 처음 왕흥사가 호수가 또는 강가에 짓고 있었는데, 그 땅이 비좁자 일부는 부근의 산을 허물어 그 흙으로 연못을 메워 절터를 넓혔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또한 처음 절을 지을 때는 왕흥사라고 했다가 후대에 이르러 절 이름을 미륵사로 바꾸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삼국사기를 보면 무왕은 왕흥사가 준공된 한달 뒤인 3월에 이르러서는 "대궐 남쪽에 못을 파서 20여 리 밖에서 물을 끌어들이고 사면 언덕에 수양버들을 심고, 물 가운데 섬들을 만들었는데 마치 방장선산과 같았다"라고 기록되어 되어 있는데, 이 역시 우리는 지금 부여에 있는 궁남지가 그 흔적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사실은 지금 난현(난주)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또 37년(A.D.636) 3월 조를 보면,
  "왕이 측근 신하들과 함께 사비하 북쪽 포구에서 잔치를 베풀고 놀았는데, 포구의 양쪽 언덕에 기암괴석이 이곳저곳에 서 있고, 사이사이에 기화요초가 있어 마치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왕이 술을 마시고 몹시 즐거워 거문고를 타면서 친히 노래를 부르니 신하들 중에 춤을 추는 자들도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그곳을 대왕포라 불렀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우리는 이 기록을 보고 백제의 무왕이 충남 부여의 부소산 낙화암에서 잔치를 베풀고 놀았을 것이라고 하기도 하고, 그 아래 지금의 고란사 부근이 대왕포였을 것이라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부여의 낙화암은 강 양쪽으로 기암괴석이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강의 한쪽만 높은 절벽이고, 고란사 아래는 사람들이 수시로 건너 다닐 수 있는 곳이 아니며, 짐을 싣거나 내릴 수 있는 포구는 더더욱 아니다.
  삼국사기 기록과 현 충남 부여의 지형은 전혀 다른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공주목 부여현 고적 조에는, "반월성이 있는데, 돌로 쌓았고 둘레가 1만 3천 6척(약 4km)인데, 옛 백제의 도읍성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부여에는 지금 4km에 이르는 반월형의 석축성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무엇을 보고 이러한 기록을 남겼을까? 

  
  사실 이때 백제의 무왕은 지금의 난하변에서 신하들과 잔치를 베풀고 놀았고, 그 곳이 강을 건너 다니는 포구 부근이었으므로 사람들은 그 포구를 대왕포라고 불렀을 것인데, 우리는 지금 대륙에서 일어났던 삼국의 모든 일을 한반도에 비정하여 해석하고 있는 것이다. 
  무왕이 지은 진짜 왕흥사는 지금의 당산시 난현(난주) 남쪽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지 한반도에서 찾을 일이 아니다.